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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18화 (218/228)
  •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4화

    * * *

    우지직. 손에 쥔 종이컵을 우그러뜨렸다. 종이컵을 채우고 있던 믹스 커피가 왈칵 넘쳐흘러 서류철을 적셨다.

    “아, 이런.”

    희나는 당황해서 젖은 종이를 박박 닦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종이는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젖어 버렸다.

    “무슨 일 있어?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왜 그래?”

    우민아가 깜짝 놀라 희나의 손을 닦아 주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버렸네요.”

    희나는 젖은 종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나저나 이건 인사팀 가서 다시 받아 와야겠네요. 볼 게 있었는데, 젖어서 쓸 수가 없네.”

    “뭐 보려고?”

    “진현 씨 이번 달 스케줄이요.”

    “걔? 이번 달 별일 없을 텐데?”

    “……그래요?”

    희나의 마음속에 의심이 피어올랐다.

    ‘이상하다? 분명히 어제도 일 있어서 엄청 늦게 들어왔는데?’

    덕분에 강진현과 이야기 한마디 못 나눠 보고 잠들어 버렸다.

    강진현이 몰래 다니는 레스토랑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좀…… 궁금했고, 따져 묻고 싶은 게 많았을 뿐이다.

    내 음식에 질렸는지, 그 남자 음식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프랑스 음식을 배워서 해 준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지 등등…… 아주 ‘사소한’ 질문들이었다.

    물론 강진현이 제대로 대답해 내지 못한다면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어젯밤 희나가 강진현의 머리카락 끝조차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내 기억으로는 이번 주 일정이 좀 빡빡했던 것 같은데……. 시간을 따로 빼서 다른 식당에 간다고?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제대로 알아봐야겠어!’

    희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진현 헌터님 일정이요? 아, 네. 잠시만요, 금세 뽑아 드릴게요.”

    인사팀 팀원에게 이번 달 강진현 스케줄표를 요청하자, 금세 표를 뽑아 건넸다.

    그리고 희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뭐야? 이거, 내 기억이랑 많이 다른데?’

    월초에 강목현 인사팀장에게 직접 받아 보았던 강진현의 스케줄표는 상당히 빽빽했다.

    당연했다. 동생의 깜짝 이벤트를 응원하기 위해 강목현이 수정 이전 버전 일정표를 건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희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월간 계획표를 손가락질했다.

    “여기, 이번 달은 왜 이렇게 텅텅 비어 있어요? 되게 바빴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기 팀장님의 눈물겨운 동생 사랑을 모르는 인사팀 팀원은 자기가 아는 사실을 순순히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 강진현 헌터님 요청으로 비워 뒀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일정은 거의 미루거나 캔슬했어요.”

    “그, 그런가요?”

    “의외죠? 저도 여기서 꽤 오래 일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천하의 일벌레 강진현 헌터가 그런 부탁이라니.”

    “아……. 네.”

    희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네, 네, 대답해 주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머리가 띵했다.

    “진현 씨,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어제 일정표를 확인해 보니, 오전에 작은 회의가 있는 것 빼고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그렇게 밤늦게 들어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상해. 너무 수상해.”

    희나는 턱을 괸 채 생각했다.

    강진현이 다른 사람의 음식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건 싹 잊었다.

    그도 그럴 게, ‘좋아하는 식당에 몰래 간다’라는 단순한 이유를 대기엔 강진현의 행적은 다소 거창한 감이 있었다.

    ‘분명히 뭔가가 더 있어.’

    희나의 촉이 바짝 섰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따각따각 두들기며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지이이잉.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문자 메시지 알람이었다.

    “어휴. 중요한 거 생각하고 있는데 누구야, 정말?”

    투덜거리며 발신자를 확인하니, 강진현이었다.

    [진현 씨♥: 희나 씨, 급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오늘 밤은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현 씨♥: 정말 미안합니다. 대신 내일 데이트는 꼭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진현 씨♥: 우리가 자주 봤던 르 블랑에 예약석을 마련해 두었으니, 미리 들어가 계시면 됩니다.]

    참고로 ‘르 블랑’은 어제 희나가 강진현을 미행하다 도착했던 목적지, 그러니까 ‘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었다.

    희나는 이마를 책상 위에 콩, 들이받았다.

    “또 르 블랑이야? 아니, 대체 진현 씨는 무슨 생각인 거야?”

    이쯤 되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희나는 한참 동안 발을 동동 구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르겠다, 정말!”

    마음이 복잡할 때는 자고로 청소를 하여 속을 다스려야 했다.

    희나는 걸레와 먼지떨이를 찾아 뒤지며 생각했다.

    ‘내일 진현 씨 만나면 속 터놓고 물어봐야겠어! 속 터져서 이대로는 못 참아!’

    혼자 의심하고, 속상해하는 건 희나 성미에 영 안 맞았다. 뭐든 속으로 썩이는 것보다 툭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게 최고인 법이다.

    * * *

    데이트 당일. 싱숭생숭한 기분과는 별개로, 옷은 예쁘게 차려입었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는 것도 가는 것이거니와, 기분이 좀 안 좋다는 이유로 데이트 옷차림을 엉망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몇 주 전에 미리 정해 둔 약속이니까.’

    약속 날짜를 잡을 때 강진현이 어찌나 즐거워하던지, 그 기억이 아주 생생했다.

    ‘꼭 특별한 날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희나는 대수롭지 않게 아주 중요한 힌트를 지나쳤다.

    르 블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웨이트리스가 곧바로 희나를 맞이했다.

    “이희나 님이시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희나는 가게로 걸어 들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언제나 예약이 밀려 사람이 꽉 차 있던 곳인데…….

    “레스토랑을 통으로 빌린 건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작게 중얼거리자, 앞서가던 웨이트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맞습니다. 이희나 님께서는 오늘 우리 가게 단독 손님이세요. 특별한 날이죠?”

    “아, 그렇구나…….”

    이런 일은 강진현과 데이트하며 왕왕 겪어 봤기에 경악스럽지는 않았다.

    ‘적어도 호텔 라운지를 전세 놓는 것보다야 이런 작은 식당 하나 빌리는 편이 백 배는 더 저렴할 테니까.’

    강진현 곁에 있다 보니 희나의 금전 개념도 제법 대범해졌다. 여전히 마트 세일에 눈이 반짝하는 건 피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그럼 저는 저기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하신 서비스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웨이트리스가 자리를 뜨자마자 시계를 보았다. 막 6시 정각이 지나 있었다.

    ‘약속은 6시까지였는데. 오늘은 좀 늦나?’

    강진현은 언제나 먼저 와서 기다리지, 늦는 법이 없었으므로 이 상황이 조금 어색했다.

    희나가 어색하게 냅킨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부우웅 울렸다. 텍스트 메시지였다.

    [진현 씨♥: 미안합니다. 조금 늦을 것 같스ㅂ니ㄷㅏ. 1 0분만 기다ㄹㅕ주실 수 잇으십니가?]

    아주 급하게 쓴 듯, 메시지에 오타가 난무했다. 언제나 격식에 맞추어 반듯한 메시지를 보내는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덕분에 신뢰도가 팍 치솟았다.

    ‘그래. 긴급 상황이라도 있나 보지. 진현 씨가 이렇게 타자를 칠 정도면 진짜로 정신없이 바빴나 봐.’

    그렇게 희나는 5분, 10분, 15분…… 20분…… 30분을 기다렸다.

    희나는 저 멀리 서 있는 웨이트리스와 시계를 번갈아 가며 살폈다.

    ‘진현 씨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오늘 오긴 하는 건가?’

    당혹감과 민망함이 불쑥 올라왔다. 텅 빈 가게 안을 홀로 지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진현 씨가 아무 말 없이 30분이나 늦을 리가 없어.’

    이쯤 되니 오지 않는 강진현이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전화라도 해야 하나?’

    불안해하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데,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빈 물잔을 채우고 식기를 세팅했다.

    “어? 일행 아직 안 왔는데…….”

    “손님, 요리가 방금 완성되어서, 셰프께서 음식을 바로 내오고 싶어 하세요.”

    “하지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웨이트리스가 희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빠르게 물러났다.

    희나는 몹시 당황하여 휴대전화를 붙잡았다. 강진현에게 ‘진현 씨 없이 다이닝이 시작될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정신없이 휴대전화 화면을 두들기고 있는데, 희나 앞에 흰 접시 하나가 놓였다. 아마 전채 요리인 듯했다.

    막무가내로 음식을 내오는 무례함에 화가 나서 희나는 다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일행 오면 식사 시작할게요. 지금은 안 먹어요. 물려 주세요.”

    “……그건 곤란한데요.”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던 희나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지, 지, 진현 씨? 이게 대체 무슨?”

    희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더듬었다.

    테이블 옆에, 흰 셰프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강진현이 서 있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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