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2화
예전이었다면 끔찍할 정도로 자극적으로 느꼈을 음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싱싱한 생고기가 부드럽게 씹혔고, 상큼한 소스와 함께 캐비어 알이 톡톡 튀며 짭짤하게 퍼졌다.
“희나 씨도 마저 드십시오. 맛있는 음식은 함께 먹어야 더 맛있다고 희나 씨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강진현의 권유에 희나도 제 앞에 놓인 음식을 씹었다. 역시 맛있었다.
강진현은 음식을 열심히 씹어 삼키는 희나를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희나 씨와 같은 맛을 공유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도요! 매번 저만 호강하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에요.”
둘은 간혹 이런 미식 데이트를 즐겼는데, 이건 순 희나를 위한 이벤트였다.
물론 강진현은 ‘데이트의 필수 코스이니 이 기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라며 그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적어도 희나가 느끼기엔 그랬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나만 즐기고! 그런 건 영 마음이 안 좋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발견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전 그 장미꽃차가 아무 쓸모가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정말 유용한데요?”
“그러게요. 희나 씨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탄하는데, 이젠 그 맛에 공감할 수 있게 되어서 좋습니다.”
‘나 혼자만 맛있는 걸 먹는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홀가분해진 희나의 표정도 보기 좋았다.
서로 즐겁게 떠들고 있는 사이, 다음 음식이 들어왔다. 다음으로 함께 즐길 음식이 기대되었다.
* * *
즐거운 데이트는 그 이후로도 주욱 이어졌다. 다 희나가 만든 장미꽃차 덕분이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맛집을 찾아다녔고, 함께 놀이동산도 갔다. 남들이 하는 거라면 뭐든 신나게 따라 했다.
물론 강진현의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귀걸이를 착용한 채였다.
예전에 파비안 앳킨스가 사용하던 선글라스와 비슷한 종류의 물건이었다. 참고로 아이템의 출처 또한 파비안 앳킨스였다.
파비안은 몇 달 전, 10년 가까이 식물인간 상태였던 여동생을 마침내 깨워 냈다.
희나와 강진현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미 몇 번 미국에 몰래 방문한 이력이 있었다. 그때 여동생인 릴리 앳킨스와도 안면을 트기도 했고.
파비안은 희나가 병문안을 올 때마다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잔뜩 안겨 주었는데, 그중에 섞여 있던 게 바로 이 귀걸이다.
유명인과 교제하려면 많은 걸 조심해야 하죠. 이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라는 코멘트도 함께였다.
‘덕분에 진현 씨랑 편하게 데이트할 수 있어서 좋다.’
희나는 키득거리며 팔짱 낀 채로 옆을 올려다보았다. 강진현과 함께 번화가를 함께 걷고 있다니, 꿈만 같았다.
연인은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같이 걷는 게 좋았다.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차였다. 희나가 새된 목소리로 강진현에게 속삭였다.
“앗! 진현 씨, 저기! 고양이가 있어요.”
“그렇군요. 길고양이라기엔 통통한데, 주인 잃은 고양이인 걸까요?”
“그런가? 아…… 저 카페에서 밥 챙겨 주나 봐요. 가게 앞에 밥그릇이랑 물그릇이 있네요.”
“좋은 사람이 있나 보군요.”
“우리 저기 들어가 볼까요?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음료도 마시고 고양이도 구경해요.”
“좋습니다.”
둘은 손을 꼭 깍지 끼어 잡고 여느 연인들처럼 카페 문을 열었다.
* * *
오가는 곳이라곤 던전, 청룡 길드, 집뿐일 정도로 일밖에 모르던 강진현은 이제 사라졌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체감하는 건 바로 강진형의 친형인 인사팀장 강목현이었다.
강목현은 길드 꼭대기 층 하늘 정원에서 제 동생을 찾아냈다.
그는……
“강 헌터, 여기 있었군요. 이번 달 스케줄 잡혀서 한번 확인받으려고 하는데.”
……까지 얘기하다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본의 아니게 동생의 휴대전화 화면을 보아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뭘 본 거지?’
강목현은 두 눈을 비볐다. 동생이 알록달록한 꽃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살피고 있었다.
표정이 몹시 진지했기에 괴리감은 더 컸다.
‘저건…… 최소 한반도 평화를 위해 고심하는 표정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떠도 페이지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강진현이 꽃말이 적힌 사이트를 살피며 신나게 월급을 루팡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강진현은 뛰어난 헌터답게 강목현의 존재를 금세 알아챘다.
“인사팀장님. 아니, 형.”
“……길드 안에서는 형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면서?”
“개인적인 용무로 물어볼 게 있어서.”
어찌 되었건, 이렇게 강진현이 먼저 다가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강목현은 반색했다.
“뭐든 물어봐.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모두 답해 줄 수 있으니까.”
“교제 1주년 이벤트를 하려는데, 뭘 하는 게 좋을까?”
“뭐?”
“몇 주 후면 희나 씨와 정식 교제를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야. 특별한 걸 하고 싶은데, 어지간한 건 거의 다 해 본 듯해서.”
강진현은 음, 하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비밀 유지를 하지 못하거나 놀리기만 할 것 같아서 그래. 아무래도 조언을 얻기엔 형이 가장 적합하더라고.”
로맨스에 푹 절어 있는 뇌로 생각해 냈다기엔 놀라울 정도로 냉철한 판단이었다.
강목현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이 팀장은 네가 뭘 해 주건 간에 기뻐할 텐데.”
“나도 알아.”
“아는데 왜……?”
“희나 씨가 뭐든 좋아할 것이라 해서 아무거나 해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기에 강목현은 군말 없이 이벤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커플 아이템을 맞춘다거나?”
“이미 있어.”
“좋은 레스토랑에 가는 건?”
“자주 해서 특별하지 않아.”
“100송이 꽃다발과 함께 선물을 건네는 건?”
“꽃은 방금도 보냈는데.”
“……방금 보고 있던 게 꽃 배달 페이지였구나.”
“응. 그리고? 다른 좋은 아이디어는?”
강진현은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며 강목현을 닦달했다.
하지만 강목현이 내는 아이디어는 족족 ‘해 봤다’, ‘식상하다’, ‘희나의 취향이 아니다’ 등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그래.”
‘그럼 대체 나한테 왜 묻는 거야?’라는 말이 입술 바로 앞까지 튀어나왔지만, 강목현은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꾹 눌러 참았다.
“그럼 교외에 좋은 별장을 하나 사 주는 건 어때?”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데…….”
강목현은 동생의 눈빛이 주춤하는 걸 보았다. 그의 의견이 내심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강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주년 기념일인데, 희나 씨가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
그것참 대단한 이유였다. 이러다간 제대로 된 선물, 이벤트 하나 못 정한 채 시간만 허비할 게 분명했다.
강목현은 질린 듯 중얼거렸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러면 뭐라도 직접 만들어서 주든지…….”
“응?”
“아니다. 솜씨 좋은 희나 씨한테 뭘 만들어 줘 봐야…….”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데, 강진현이 그의 어깨를 탁 붙잡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고마워. 역시 형에게 물어보길 잘했어.”
새까만 눈동자에 의지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S급 헌터가 내뿜는 투지에 순간적으로 온몸의 솜털이 벌떡 일어설 정도였다.
“그럼…… 그래. 그렇게 해야겠군.”
입안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자리를 훌쩍 떠나 버릴 기세라, 강목현은 가지고 왔던 서류를 급하게 내밀었다.
“잠깐만. 내달 스케줄 체크부터 하고 가. 괜찮으면 이대로 픽스할 테니까.”
강진현은 재빨리 서류철을 차라락 넘겨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들어 월간 일정표를 가리켰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일정 전부 취소해 줘.”
“그건 안 돼. 필참해야 하는 행사가 있어. 지난달에 뒤로 빼서 더는 미룰 수 없는 일도 있고.”
“그럼 중요한 일정은 참석할 테니, 나머지는 취소하거나 미뤄 줘. 이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인사팀장님?”
일 이야기에 강진현의 어조가 다시 딱딱하게 돌아왔다. 강목현은 내심 아쉬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습니다. 말해 놓은 주간 일정은 최대한 비워 놓는 것으로 하지요.”
“고맙습니다.”
강진현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이에 강목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생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쩔 수 있나? 그가 져 주는 수밖에.
“그럼 조금 이르지만, 성공적인 데이트 하길.”
“고마워, 형.”
* * *
희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데…….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수상해.”
「수상?」
「무엇?」
「집주인 근심 있을 유(有)?」
오색이의 물음에 희나는 진지한 표정을 했다.
“응. 나 근심이 있는 것 같아.”
「What?」
“진현 씨 문제로.”
작은 달팽이는 상상 이상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띠요오오오오옹@[email protected])!!!!!!!!」
「용납 불가! 용납 불가!」
「던전 불주먹 발사! 던전 불주먹 발사!」
……이러면서 당장이라도 강진현을 집에서 쫓아내자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숙인 퇴출! 하숙인 OUT!」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흥분하면 투지가 식어 버린다더니, 그게 사실이긴 한가 보다. 희나는 근심조차 잠깐 잊은 채 오색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