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215화 (외전) (21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1화

    외전 1. 그 장미의 꽃말

    희나는 발치에 놓인 커다란 장미꽃을 주의 깊게 살폈다.

    강진현의 저주를 풀기 위해 미국에 갔을 때 얻은 포이즌드 로즈였다.

    ‘물론 정화해서 이제 더는 독장미가 아니지만.’

    강진현은 ‘예쁘다’라고 말하는 희나의 말 몇 마디에 호쾌하게 적장의 목을 따다 주…… 아니, 포이즌드 로즈를 꺾어 선물해 주었다.

    ‘그때 시간이 급해서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두고 홀라당 잊어먹고 있었지.’

    그리고 오늘, 인벤토리 정리를 하게 되어서야 이 장미의 존재를 다시 기억해 낸 것이다.

    “우와아.”

    한 던전의 보스였던 존재답게 장미는 정말 커다랬다.

    얼마나 크냐면,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를 태우고 나타났던 연꽃이 이 정도 크기였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예쁘게 말려 집 안에 장식해 두기에는 터무니없이 커다랗다는 뜻이기도 했다.

    끙, 신음이 절로 나왔다.

    “이걸 어찌한다?”

    추억이니 인벤토리 한구석에 처박아 두는 것보다야 잘 보이는 곳에 정리해 두고 싶었다.

    희나는 거의 1년이 지났음에도 싱싱한 장미 꽃잎을 어루만졌다. 고급 천처럼 보들보들했다.

    이내 설명 창이 떴다.

    <정화된 포이즌드 로즈(A): 보기만 해도 로맨틱한 기운이 솟는 커다란 장미. 완전히 정화해 품질이 아주 좋아졌다. 섭취 가능하도록 가공 시, 특별한 효능이 발동한다.

    ※ 섭취 시 효능: ????>

    희나는 설명 창을 읽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섭취 가능하도록 가공 시 특별한 효능이 발동한다, 라고? 꽃잎으로 음식이라도 만들란 소린가?”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예쁘게 말려서 장미차로 만들어도 좋을 듯했다.

    ‘아니면 설탕을 잔뜩 넣은 장미청?’

    꽃잎 샐러드, 꽃잎전 따위의 음식들도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되도록 보존성 높은 메뉴가 좋을 것 같아.’

    결정하자마자 희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여자 대장부 된바,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해 보자고!”

    희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장미를 향해 돌진했다.

    * * *

    장미차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썩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낸 다음, 세척한 후 얌전히 말리면 됐다.

    장미청 또한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깨끗이 소독한 공병에 세척한 장미 꽃잎과 설탕을 켜켜이 쌓았다.

    “……됐다!”

    일주일 후. 희나는 완성한 말린 장미 찻잎과 장미청을 흐뭇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장미가 워낙 커서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왔다. 강진현과의 추억을 굉장히 오래 되새길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이 정도면 꽤 성공적으로 가공한 거겠지? 어디, 효능을 살펴볼까?”

    희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장미 찻잎과 장미청을 들여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면서…….

    ‘사랑의 묘약, 이런 거 아니야?’

    S급 살림꾼인 희나의 정성 어린 손길을 받아서인지 등급은 S로 상승해 있었고, 물음표로 되어 있던 섭취 시 효능 부분이 해금되어 있었다.

    <※ 섭취 시 효능: 사랑에 빠지면 세상에서 붕 뜬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 들죠. 섭취 시, 특정 감각을 둔화시킬 수 있습니다.>

    희나의 낯에 실망감이 스쳤다.

    “감각 둔화라니…… 그 반대도 아니고, 이걸 대체 어디다 써?”

    설명 창 아래로 이어진 효능 부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쓰임새가 애매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붉은 꽃잎들로 가득 찬 유리병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인기척을 냈다.

    “이게 다 뭐야? 며칠 동안 바쁘더니, 이것 때문이었어?”

    이제는 ‘이너울’이라는 정식 신분이 생긴 세상 최후의 악마였다. 늘 그렇듯 작은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응. 예전에 진현 씨가 준 꽃으로 만든 것들이야. 결과 자체는 맘에 드는데 섭취 효과가 별로 신통치 않네…….”

    “효과가 어떻길래?”

    “특정 감각을 둔화시킬 수 있대. 딱 그거 하나뿐이야.”

    희나는 작은 악마를 붙잡아 두고 구구절절 하소연했다.

    “세상에 감각 둔화가 필요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 반대면 모를까. 사실 내가 만드는 음식은 대체로 좋은 효과를 내는 편이거든. 그래서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 같아. 거기다가 진현 씨와의 추억이 담긴 꽃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예쁘게 말려서 온실에 전시라도 해 둘걸.”

    너울은 의외로 희나의 푸념을 귀담아 주었다. 이 악마는 생각보다 사려 깊은……

    “와, 인간들은 정말 별일 아닌 일에 근심 걱정을 보이는구나. 이것도 나름 흥미진진한데? 계속 얘기해 봐.”

    ……별로 사려 깊지는 않고, 인간사에 관심이 많을 뿐이었던 걸로.

    “뭐어? 별일 아니라니! 진현 씨와의 추억이 담겨 있으니 그만큼 중요하단 소리잖아! 공감 능력 부족한 악마 같으니!”

    희나가 눈썹을 들썩거리면서 성질을 낼 기미를 보이자, 너울은 잔소리를 차단하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몇 달간의 하숙 생활 동안 잠자는 희나의 코털을 건드리면 얼마나 귀찮아지는지 알게 되었던 덕이다.

    너울은 화난 치와와 같은 희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희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대신, 한번 심사가 뒤틀리면 마음 돌리기가 은근히 어려웠다.

    너울은 희나를 달래는 대신 말을 슬쩍 돌렸다.

    “내 생각에 그 꽃차의 효능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들어 볼 생각은 없어?”

    희나의 귀가 쫑긋 솟았다. 너울은 이때다 싶어 혀를 나불나불 놀렸다.

    “네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강진현에겐 꽤 유용하지 않을까?”

    “어?”

    “걔는 너무 예민해서 문제라며? 저 꽃차가 일종의 진정제 역할을 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 그러게?”

    면피용으로 떠벌린 소리라기엔 상당히 그럴싸했다.

    너울의 전략은 완전히 성공했다. 희나의 짜증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와…… 너 정말 똑똑하구나? 한번 확인해 보러 가야겠어.”

    희나는 유리병을 들고 강진현이 있을 1층을 향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진현 씨!”

    순식간에 혼자가 된 너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와. 달팽이가 염병, 염병 하더니…… 이게 바로 그 염병이구나!”

    저도 모르는 사이 1일 1염병을 달성한 희나는 강진현을 불러 거실에 앉혔다. 그리고 꽃차 한 잔을 우려 내밀었다.

    “자, 이거요.”

    “이대로 마시면 됩니까?”

    강진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꽃차를 들이켜려 하기에, 급하게 말렸다.

    “아니, 이게 뭔지는 얘기를 들어 보셔야죠!”

    “희나 씨가 준 거니, 나쁜 건 아니겠지요.”

    희나는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이거 던전 산물이라서 특수 효과가 있어요. 시스템 창 띄워 보세요!”

    “알겠습니다.”

    설명 창을 읽는 듯, 강진현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S급 감각 둔화제군요.”

    “네! 너울이가 이게 진현 씨의 예민한 감각을 좀 진정시켜 줄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진현 씨는 제가 계속 케어할 테지만, 가끔 그게 안 될 때는 이걸 쓰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희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현 씨의 세상은 너무 좁아. 내가 만든 음식만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너무 번잡한 곳은 내심 정신 사나워하고…….’

    강진현이 이걸 먹고 조금 더 다채로운 세상을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강진현은 조금 회의적인 듯 보였다. 그는 손안에서 머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예전에도 마셔 보았습니다만…… 대단한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래도요. 이건 제가 만든 던전 산물 가공품이니까요. 진현 씨도 알잖아요? 저 솜씨 좋은 거.”

    자기도 이제 S급 살림꾼이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희나의 모습에 강진현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네요. 희나 씨 손을 거쳤으니, 보통 물건은 아니겠군요.”

    그 말과 함께 강진현은 차를 홀짝, 한 모금 마셨다. 고작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입안에 풍성한 장미 향이 가득 찼다.

    “아.”

    따끈한 찻물이 혀끝을 휘감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배 속부터 몸이 따끈해졌다.

    이내 강진현의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어때요? 뭐 뜨는 거 있어요?”

    “……예. 성공입니다.”

    희나의 물음에 강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각 둔화 부분에서 ‘미각’을 골랐다.

    시스템 창을 확인하자마자 강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나도 그를 따라 덩달아 일어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몹시 사랑스러워 강진현의 눈이 빙그레 접혔다.

    만약 오색이가 보았다면 또 「염병」이라고 2염병 콤보를 달성할 수 있었을 만한 눈빛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강진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오늘 데이트, 시간 됩니까?”

    * * *

    “진현 씨, 이거! 이것도 빨리 먹어 보세요!”

    희나는 흥분해 소리쳤다.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예. 먹겠습니다.”

    강진현은 그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제 앞에 놓인 음식을 입안에 떠 넣었다. 캐비어를 얹은 한우 타르타르였다.

    “어때요, 어때요? 정말 맛있지 않나요?”

    희나는 계속 물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플레이트를 강진현 앞으로 완전히 밀어 줄 기세였다.

    강진현은 새 모이만큼 나온 전식을 완전히 먹어 치우고는 빙그레 웃었다.

    “……맛있군요. 물론 저는 희나 씨의 음식을 더 좋아하지만, 이 음식도 상당히 맛이 좋습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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