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214화
* * *
세계수가 있는 온실을 탐험하던 악마, 너울이 소리쳤다.
“어라? 여기 문이 있어!”
“뭐? 희나야, 너 집안 구조 또 바꿨냐?”
“아니. 안 바꿨어. 그리고 온실에는 원래 문이 하나뿐…… 어머나, 정말이네. 문이 하나 더 생겼어!”
희나와 희원은 온실 한구석에 생긴 문 앞에 서서 머리를 맞대었다.
“저건 대체 뭐지?”
“문인데…… 어디로 통하는 걸까?”
“일단 열어 볼까?”
“그럴까? 설마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겠어? 우리 집인데?”
어울리지 않게도, 남매는 패기를 발휘하여 새롭게 생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사명을 완수한 필멸자들이여.」
머리통을 뻣뻣하게 들어올린 검은 달팽이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세계수가 있는 정원이 쌍둥이 차원을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는 거지?”
「큭,, 그러하다.」
“오. 그럼 이제 복잡한 절차 없이도 쌍둥이 집이랑 쌍둥이 던전에 갈 수 있다는 소리네?”
「……귀찮게 된 셈이지.」
검은 달팽이, 반휘의 대답에 희원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럼 이제 이 반대편 ‘홈 스위트 홈’도 우리가 쓸 수 있는 건가?”
「그렇다. 그러나 본좌는 누군가와 동거할 생각이 전혀 없다. 큭.」
「달팽이의 고독이란, 깨트릴 수 없는 것.」
「본좌를 방해하는 필멸자는 용서치 않으리.」
“그, 그래. 알았어.”
희원은 제풀에 질려 물러섰고, 희나는 반휘를 애써 안심시켰다.
“우리는 지금 사는 집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네 영역은 침범하지 않을게. 걱정마.”
「여아일언 중천금!」
“그래, 그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희나는 온실 문을 닫고 그 앞에 ‘함부로 방해하지 말 것’ 팻말을 붙였다. 검은 달팽이가 어둠과 고독을 행복하게 곱씹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는 되도록 열지 않기로 하자.”
“나도 동감.”
남매는 눈길을 교환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몇 년 후, 희원이 제 발로 먼저 ‘아무도 없는 건너편 던전에서 맘 편히 농사지을 테니, 앞으로 여기서 살겠다!’라며 귀농…… 아니, 귀던전(?)을 선언하고 던전 작물계의 큰손이 되리라곤, 지금의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 * *
일련의 사건으로 세상은 뒤집혔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별반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희나의 일상도 그랬다.
오늘은 헌터 휴게실에 간식을 전달해 주러 가는 날이었다.
‘오늘도 왕창 만들어 버렸네. 빌딩 전체에 돌려야겠다.’
희나는 어마어마하게 쌓인 샌드위치의 산을 바라보았다.
감자와 달걀, 양파, 양배추, 당근 등등을 잘게 썰어 섞은 샐러드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샐러드를 너무 많이 만든 탓에 부족한 빵을 사러 주변 빵집을 전부 털어야만 했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얼추 500개는 넘게 만든 것 같았다.
희나는 끄응, 신음했다.
“섬 다녀와서 손이 너무 커졌어.”
섬에서 수천 명분 음식 만드는 걸 도와 버릇했더니, 이젠 어지간한 양을 만들어선 뭘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
심지어 살림꾼 랭크도 S가 되어서 체력도 좋아지고, 손까지 무지막지하게 빨라졌으니…….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산은 넘쳐 났고, 음식은 함께 나눌수록 즐거웠다.
자기가 만든 음식으로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환영이었다.
“샌드위치다!”
“야호!”
“우유 준비했냐?”
“당연하지!”
헌터들은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샌드위치를 받아 갔다.
“와, 이 팀장님 없었을 땐 정말 죽을 맛이었다니까요! 이거 없이 반년을 어떻게 버텼냐……?”
“이 손맛, 이 손맛! 이 팀장님은 절대 퇴사하면 안 됩니다!”
“야야, 그 전에 너 잘릴 거나 걱정해, 새끼야.”
헌터들이 한마디씩 내뱉으며 낄낄거리자, 휴게실은 금세 소란해졌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예전에 우민아가 지나가듯 말한 것처럼, 헌터야말로 이번 사건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직군이다.
이제 주기적으로 클리어할 던전이 없어졌으니, 앞으로 슬슬 일거리가 줄어 갈 테다.
하지만 청룡 길드의 헌터들은 별걱정이 없어 보였다.
“뭐, 길드장님이 어떻게든 일 잘 따오겠지.”
“우리 길드는 규모가 꽤 돼서 해외로 파견 나가도 되고, 별로 걱정 없어요.”
다들 말이야 잘린다, 잘린다 하지, 일자리 걱정은 없어 보였다.
희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어디 가도 안 빠지는 사람들이니까.’
……어째 능력이 좋아질수록 철이 없어지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사이 대화 주제는 어느새 저 멀리 넘어갔다.
“맞아. 아, 이번에 우리 S급 꼬마 버퍼가 큰일 하나 쳤다면서? 세계 연맹으로 아예 날라 버렸다던데.”
“길드장님 열 받았겠다?”
“별로. 요새 기분 좋아 보이시더라.”
“계약 파기하는 대신 세계 연맹에서 위약금 조로 뭘 엄청나게 뜯어 왔나 봐.”
“하긴. 그 꼬맹이도 생각이 있겠지. 가족들이 다 청룡에 남아 있는데, 문제 남기고 가면 그것도 골치니까.”
얼마 전에 ‘더 큰물에서 놀겠다’라는 선포를 하고 청룡을 떠난 권다혜 이야기였다.
“희나 팀장님은 어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속으로 돌보던 S급 헌터 하나가 떠난 거잖아요. 정 꽤 들었을 것 같은데.”
다들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기에, 희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뭐,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제일 행복한 거잖아요? 다혜도 그런 거겠죠.”
음식을 만들어 모두와 함께 나누고, 어딘가를 반짝반짝 쓸고 닦는 일이 가장 즐거운 희나처럼 말이다.
* * *
주말이었다.
희나는 주말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데이트 날!’
오래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웃음이 실실 나왔다.
희나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 너무 좋아!’
연애를 하다 보면 권태기라는 것이 온다는데, 희나에게는 절대 그런 게 올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강진현의 얼굴부터가 권태기가 입장했다가도 곧바로 인사하고 나가게 생기지 않았는가!
‘이건 누가 와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걸.’
물론 희나가 좋아하는 건 강진현의 잘난 얼굴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착하고, 자상하고, 섬세하고, 다정하고 또…….’
강진현의 장점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희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장도 평소보다 신경 써서 했다.
매일같이 집 안에서 맨얼굴로 마주하는 사이긴 했지만, 이건 데이트였으니까.
현관에 내려오자 강진현이 먼저 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멋지네요!”
희나는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연한 색 면바지에 얇은 티셔츠를 갖춰 입었을 뿐인데, 오늘의 강진현은 그야말로 화보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희나 씨, 여기.”
내미는 것을 받아 드니, 노란 튤립 꽃다발이었다.
“아침에 꽃까지 준비했어요? 고마워요.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저는 희나 씨가 있으니 됐습니다.”
“어머.”
천연덕스러운 플러팅에 희나는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올라 손부채질을 했다.
한편, 지나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오색이가 동그란 머리통을 절레절레 저었다.
「……모닝염병」
작은 달팽이가 무어라 말하는지도 모르고, 한 쌍의 커플은 기쁘게 염병을 떨었다.
“이제 갈까요?”
희나는 강진현의 손을 붙잡고 씩씩하게 나섰다.
오늘의 데이트 장소는 던전이었다.
이름하여 ‘던전 피크닉’!
강진현이 유명인인 탓에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둘은 던전으로 자주 쏘다녔다.
강진현은 더 근사한 장소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가면 되지.’
몇 주간 강진현이 바빠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그 탓에 이번에는 던전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기분이랄까.
“여기, 자리가 좋네요. 여기서 브런치 먹어요!”
마침 안전지대 안에 좋은 공간이 있었다.
둘은 자리를 깐 후, 가지고 온 것들을 재빨리 늘어놓았다.
전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도시락이 소담하게 펼쳐졌다. 색색으로 심혈을 기울여 꾸민 티가 잔뜩 났다.
“근사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정말 맛있어 보입니다.”
칭찬에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데, 강진현이 바구니 구석에서 무엇인가를 주춤주춤 꺼냈다.
“그건 뭔가요?”
희나의 기억에 없는 통이었다.
“제, 제가 만든 음식입니다. 희나 씨 실력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저도 희나 씨에게 도시락을 싸 드리고 싶어서요.”
강진현이 고개를 숙인 채 희나에게 도시락 통을 건넸다.
정말로 부끄러운지, 그의 광대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덩달아 희나의 뺨도 붉어졌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이 남자는 도대체! 귀엽고, 멋지고, 잘생기고……!’
도시락 통을 열자, 오밀조밀 작게 뭉친 주먹밥들이 보였다. 대단한 기교가 들어간 건 아니지만, 정성이 담뿍 들어간 게 느껴졌다.
“와. 정말 맛있겠네요!”
냉큼 주먹밥 한 알을 들어 입안에 넣었다.
짭짜름한 소금 간, 고소한 김 가루의 맛, 향긋한 참기름의 향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근사해요!”
우물거리며 척, 엄지를 내밀자 강진현의 입매에 웃음이 서렸다. 볼우물이 파이는 짙은 웃음이었다.
데이트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날이 좋고, 나무가 예쁜 곳’을 상상하며 문을 열어서인지, 풍경도 날씨도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 데이트하는 상대가 상대다 보니,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었다.
잡담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있는데, 강진현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요? 주변에 뭐라도 있어요?”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인기척이요?”
강진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예.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 같군요.”
“아, 이런.”
……하필 데이트 장소로 고른 곳이 공략 중인 던전이었을 줄이야.
불쑥 솟아나는 짜증에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는데, 풀숲 한구석에서 사람 둘이 튀어나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번역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지 않아 그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위험하다, 도망가라, 아니다 너를 남기고 갈 수 없다……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검은 그림자가 와락 튀어나왔다. 코끼리만 한 곰 형태의 몬스터였다.
심지어 보통 몬스터도 아니었다. 희나의 지도 스킬에 따르면 저 몬스터는 이 던전의 보스였다.
두 헌터는 피를 흘리면서도 서로의 등을 지켰고, 거대한 곰은 쿠어어엉! 울부짖었다.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바닥이 지잉지잉 울렸다.
그리고 희나는…….
“……게 뭐야.”
“예? 희나 씨?”
“기대했던 데이트였는데, 이게 뭐야! 감히 곰 따위가 우리 데이트를 망쳐?”
희나는, 화가 났다. 아주 화가 났다!
“……용서 못 해!”
어느새 희나의 손에는 SSS급 쓸모 있는 신문지가 돌돌 말려 있었다.
그리고!
신문지 끝에서 가벼운 파동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샤아아아……!
달려들던 검은 곰이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미스터리한 현상에 헌터들은 두려워하며 자리를 떴고, 공간에는 다시 희나와 강진현만이 남았다.
희나는 인벤토리 창에서 상급 회복 포션을 꿀꺽꿀꺽 마시고, 강진현이 만든 주먹밥을 와구와구 삼켰다.
‘밥심’ 스킬로 쪽 빠졌던 힘이 다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희나 씨.”
“보스를 없애 버렸으니까 우리 데이트도 더 방해 못 할 거예요.”
“그, 그렇군요.”
희나는 개운한 표정으로 이마를 훔쳤다.
“어휴. 세상엔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네요. 그렇지 않아요, 진현 씨?”
“……예. 맞습니다.”
오늘도 희나는 살림꾼의 본분을 잊지 않고 던전을…… 아니, 집 앞마당을 깨끗이 치워 냈다.
앞으로도 희나의 던전 살림은 주욱 이어질 예정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完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