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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13화 (21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13화

    에필로그. 던전 안의 살림꾼

    세상은 말 그대로 뒤집혔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그 메시지’를 생생히 목격했으니까.

    시스템 메시지 이후, 국제 던전 연구소에서는 공간 불안정도가 완전히 초기화되었음을 알렸다.

    아니, ‘초기화’라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공간 불안정도라는 용어가 없던 시절처럼, 관측되는 시그널이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 말인즉슨, 더는 던전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의미.

    “……거기다 원래 있던 던전들도 완전히 안정화됐지. 이제 한 번 토벌한 던전은 더 활성화되지 않는다네.”

    희나가 내놓은 간식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우민아가 설명했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는 1년 안에 모든 던전을 안정화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뭐, 말이야 그렇지 실제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왜, 알잖아? 제대로 된 자원 한 톨 없는 우리나라에선 몬스터 부산물이 꽤 쏠쏠한 자원이었던 거.”

    “아하…….”

    희나는 그제야 우민아의 설명을 이해했다.

    “몬스터가 사라져 버리면, 부산물도 얻을 수 없으니까 남은 던전을 완전히 안정화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네요.”

    “바로 그거야. 그래서 협회, 정부, 사기업…… 아무튼 되게 복잡해. 아마 다른 나라도 상황은 비슷할걸.”

    “어떻게든 잘 해결 보면 좋겠네요.”

    “맞아. 뭐…… 어떻게 되든 우리가 무직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네. 솔직히 던전 토벌이 없어지면 헌터들은 그냥 힘 좋은 일반인일 뿐이잖아.”

    “그래도 언니는 능력이 좋으니까 뭐든 잘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다.”

    우민아가 키득거리며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입안에 튕겨 넣었다.

    그때쯤일까, 희나의 사무실 문이 쾅! 열렸다.

    “희나 누나!”

    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새까만 머리의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우당탕, 희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는 발끝을 올려 책상 위를 확인하고는 실망한 표정을 했다.

    “히잉. 과자 없잖아.”

    울먹이는 아이의 등 뒤에서 한숨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른스럽게 이야기하라고 했지.”

    “히잉입니다. 과자가 없습니다.”

    “……제발 좀.”

    강진현이 참기 힘들다는 듯 마른세수했다. 희나는 하하 웃으며 새 과자를 담아 아이 앞에 대령했다.

    “너울아, 과자 여기 있으니까 진현 씨 괴롭히지 말고 얌전하게 있자. 응?”

    “응. 과자 줬으니까 히잉 안 할게.”

    너울이라고 불린 아이가 씨익 웃고는 과자를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는 강진현의 손등을 가만히 도닥여 주었다.

    남들이 보기에 너울이는 귀여운 남자아이에 불과했지만, 사실 너울은 수만 살은 먹은 악마였다.

    그런 악마가 ‘히잉입니다.’ 하며 귀여운 척 콧소리 내는 걸 보고 있는 게 얼마나 괴로울까? 강진현의 얼굴에 옅은 피로가 엿보였다.

    “오늘도 길드 구경 잘 시켜 주고 왔어요?”

    “예……. 목말 태우고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고생 많았겠네요.”

    “괜찮습니다. 우리 함께 책임져야 하는 아이니까요.”

    은근히 묘하게 들리는 대화였다.

    우민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기상으로 절대 그럴 리는 없는데…… 진짜 사고 쳐서 낳아 온 애는 아니겠지?’

    애 나이를 보면 절대 그럴 리는 없건만!

    하지만 청룡 헌터들 사이에서 ‘강진현이 어디서 애를 낳아 왔다’라는 소문이 도는 게 영 헛말만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의 강진현이 애를 업고 온 동네를 활보하는 팔불출 같은 면모를 보일 리가 없었다.

    ‘심지어 묘하게 닮았다고!’

    우민아는 희나와 강진현, 너울을 차례차례 살폈다.

    너울은 희나와도 닮았고, 강진현과도 닮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엄마, 아빠, 그리고 아기가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거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흐음.”

    우민아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더 생각해 봐야 답이 안 나오는 주제였다.

    ‘본인들이 아니라고, 그냥 희나 친척 동생이라고 우기는데 뭘 더 물어보겠어?’

    어쨌든 셋이 함께 있는 게 귀여우니 됐다.

    우민아는 대충 그런 결론을 내리고 턱을 괬다.

    “30분 후에 간부 회의 있는 거 알고 있지? 너랑 강진현 둘 다 필참이야. 애는 어디다 맡기려고?”

    “아……. 오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오, 그래?”

    우민아의 눈이 반짝였다.

    “이희원 씨, 오래간만이네.”

    “그러게요. 오빠랑 반년 넘게 못 봤죠?”

    “엉. 오래 못 봤다. 무슨 일은 없었고?”

    “오빠야 여전하죠. 좀 핼쑥해지긴 했는데…… 그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 봐요.”

    “대화 소재 감사.”

    희나는 우민아의 관심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신 말썽꾸러기 악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울아.”

    “웅?”

    악마는 있는 힘껏 콧소리를 냈고, 강진현은 희나 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 이따 오빠가 올 거야. 나랑 진현 씨는 회의 갈 거고.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았어요. 너울이는 희나 누나랑 진현이 형 씩씩하게 기다릴 수 있어요!”

    뻔뻔한 악마는 3인칭 화법을 쓰며 활짝 웃어 보였다.

    * * *

    간부 회의가 끝나자마자 희나와 강진현은 김규희 길드장에게 따로 호출을 받았다.

    “이 팀장, 앉아요. 강 헌터도.”

    길드장은 둘이 자리에 앉고 숨을 돌리기도 전에 용건을 꺼냈다.

    “어지간해서는 사적인 일은 들춰 보고 묻는 편은 아니지만…… 이건 꼭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넵!”

    “요즘 희나 씨 사촌 동생이라며 데리고 다니는 아이, 정체가 뭐지요?”

    “그, 그게…….”

    등에 진땀이 흘렀다.

    김규희 길드장은 사람의 눈을 보고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이 있는 상사를 둔 터라, 언젠가는 비밀을 들켜 털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던데.”

    길드장은 차분히 희나와 강진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지금, 속마음을 읽는 스킬을 사용하고 있을 거다.

    “맞아요. 이 팀장 생각대로 나는 지금 속마음을 읽고 있어요.”

    원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많아서일까?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필요한 것만 생각하자, 필요한 것만…….’

    끄응, 하며 미간을 모으고 있을 때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는 이 팀장이 공간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강 헌터와 연인 관계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어, 어떻게? 완전 철저하게 숨겼는데!”

    “전자는 가끔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모아 추측으로 알아냈고, 후자는……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것 같은데.”

    심지어 길드장은 희나가 가까운 길드원 몇을 모아 비밀스레 던전을 토벌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희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행복 회로를 돌렸다.

    ‘의심스러울 법도 한데 여태 추궁하지 않고 모른 척해 준 거잖아. 길드장님은 입이 무거워.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이야.’

    행복 사고 회로가 열심히 돌다 못해 시뻘겋게 타들어 갔다. 김규희 길드장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요. 나는 우리 길드 기밀만 발설하지 않으면 길드원들의 행동에는 제약을 두지 말자는 주의라서.”

    ‘부업으로 세계 평화 지키기 같은 걸 해도 터치를 안 한다고?’

    “희나 씨가 밤마다 쫄쫄이를 입고 다녀도 이해해 줄 생각인데.”

    “헉.”

    ……길드장은 생각보다 훨씬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길드 안에 정체 모를 위험한 존재를 들이는 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안 그래요?”

    “그, 그런 것 같네요.”

    희나는 고민하다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털릴 거, 이왕이면 다 이야기해 버리자 싶어 전부 이야기했다.

    SSS급 던전에, L급 보스인 악마, 그리고 악마를 데리고 있게 된 사연까지!

    “……그렇게 된 거예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놀랍게도 이 팀장과 강 헌터의 생각이 일치하네요. 사실이군요.”

    “네. 어차피 들킨 거, 감출 이유가 없어요.”

    “흐음…….”

    김규희 길드장은 한참 동안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이 팀장과 강 헌터 사이에 애가 있다는 소문에 진상을 알아볼까, 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대어를 낚았군요. 던전 안정화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될 줄이야.”

    희나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예? 저, 저, 저희 사이에 애가 이, 이, 있다고요? 설마 너울이?”

    “그런 소문이 파다하긴 하죠. 사실 두 사람 관계는 예전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기도 했고.”

    희나는 그대로 돌이 되었다.

    “대, 대체 언제부터?”

    “그건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 일단 그 악마 이야기부터 마저 끝내도록 할까요?”

    길드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어깨를 추욱 내렸다.

    “네에.”

    “그럼 결과적으로 악마는 마석을 빼앗겨서 지금 힘을 거의 쓸 수 없다, 이 말이군요.”

    “네! 하지만 너울이는 절대 내줄 수 없어요! 저희는 악마의 안전과 전설급 마석을 걸고 맹세했거든요.”

    무려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대가가 따랐다.

    “청룡의 S급 헌터를 잃고 싶지 않으면 이 건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강진현이 낮게 경고했다. 김규희 길드장이 픽 웃었다.

    “나도 이 팀장이나 이희원 씨 같은 인재를 잃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니 엄한 걱정은 때려치우도록 해, 강 헌터.”

    일은 허무하리만치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희나는 길드장실 문을 힐끔거리며 속닥였다.

    “와. 이제 우리 비밀 클럽에 길드장님도 끼게 되었네요.”

    길드장은 너울이의 신원 보증을 해 주고, 앞으로의 거취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물론 맨입으로 내준 호의는 아니었다.

    ‘앞으로 3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악마와 독대할 자리를 내 달라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악마의 허락이 있다면 승낙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아마 너울이는 하겠다고 하겠지.’

    희나는 반쯤 확신했다.

    악마는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걸 즐겼고, 호기심도 아주 많았다.

    거기다 보통 사람이 아닌 청룡 길드의 길드장을 만나게 해 준다면?

    ‘엄청나게 신나 할걸.’

    그렇지 않아도 길드장의 능력을 듣고 호기심을 보였던 악마 아니던가?

    악마와 길드장, 양측의 호기심을 해결할 만한 좋은 기회가 되리라.

    * * *

    “아, 내가 명성을 떨치기도 전에 대헌터 시대가 완전히 끝나 버리다니!”

    “……의외로 꿈이 원대했구나.”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실현 가능한 꿈이었어요.”

    희나는 하하 웃으며 권다혜 앞에 레모네이드를 내놓았다. 오늘의 손님은 어린 S급 버퍼, 권다혜였다.

    권다혜는 물 맺힌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맛 좋다!”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새침했던 듯한데, 어째 갈수록 행동이 거침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게시판에 붙은 거 봤어요? 세계 연맹 차원에서 뛰어난 헌터를 모집한다더라고요. 저, 거기 지원해 보려고요. 나이 제한이 딱히 없어 보였거든요. 실력만 보는 것 같았어요.”

    세계 연맹에서는 제3세계 국가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자체적으로 내부 게이트를 모두 닫을 만한 능력을 가진 국가는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긴 했지만, 유명무실했다. 그 까닭을 묻는다면…… 다들 남 돕기는커녕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처리하느라 바빴다고 할까?

    “거기에서 제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요.”

    씩씩한 모습에 희나는 어쩔 줄 모르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은 뭐래?”

    “제가 이겼어요.”

    하긴, 권다혜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런 상대에게 건넬 말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넌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대신 몸조심하고.”

    “덕담 고마워요!”

    그 이후로 권다혜는 한 시간가량 잡담을 이어 가다가, 이만 집에 돌아가 봐야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아, 엄마가 언제 집에 한번 초대해 달래요. 비밀 결사 모임이 끝나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다나? 던전 공기라도 쐬고 싶다는데요.”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한번 초대하려고 했는데, 날짜 정해지면 부를게.”

    “네. 그럼 다음에 봐요!”

    권다혜는 탁구공처럼 통통 튀어 나갔다. 꿈이 있는 사람은 발걸음부터 남들과는 달랐다. 힘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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