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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12화 (21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12화

    “엉?”

    앞뒤 다 떼고 본론만 남은 듯,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너희 한 몸 바쳐 나를 잘 모시고 살 생각 있냐고. 평생은 아니고…… 한 500년쯤?”

    “500년이라니, 인간은 그걸 ‘평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아차차, 인간은 100년도 못 살지. 그럼 너희 나를 평생 부양할 생각은 있어? 이왕이면 대대로, 한 500년쯤?”

    “네 얘기 좀 들어 보고 결정할게.”

    악마는 물음표투성이가 된 인간들의 표정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한참을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전설급 마석이 필요하다…… 이 말인 거잖아?”

    “맞아.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안 가서 이 세계가 멸망하고?”

    “응.”

    “그리고 그 마석을 제공할 만한 건 나뿐이란 거고.”

    “어. 정확히 이해했어.”

    “그럼, 줄게. 전설급 마석.”

    “으응. 전설급 마석을 준……, 뭐라고? 전설급 마석을 준다고? 정말?”

    희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얼마나 커다랗게 떴던지, 뒤통수를 톡 치면 눈알이 데구르르 굴러 나올 것 같아 보였다.

    “어떻게? 마석은 몬스터를 쓰러뜨려야 나오는 거잖아? 인간을 위해서 희생이라도 해 주려는 거야? 그런데 너, 이름이 세상 최후의 악마인데…… 죽는 게 가능해? 아니면 산 채로 배를 가르기라도 하는 건가?”

    희나는 눈알 대신 질문을 와르르 쏟아 냈다. 그러자 악마가 정신 사납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난 이 세상이 마음에 들어. 망가지지 않고 멀쩡한 세상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

    악마는 황야를 떠올렸다. 모래 먼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음울한 공간.

    한때는 그곳에도 생명이 있었다.

    누군가가 터를 잡고 살아갔고, 사랑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오래전 이야기야.’

    오랜 옛날, 악마는 문을 열어 황야였던 곳에 당도했고, 늘 그렇듯 세상은 찢겨 나갔다.

    누군가는 악마를 ‘멸망의 사도’라 불렀다. 악마는 그게 썩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 내려온다는 건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는 뜻이니까.’

    악마에게 허락된 세상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상뿐.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고, 그다음에는 괴로웠으며, 종래에는 아비규환의 광경에 무감각해지다 못해 권태로워졌다.

    그렇게 지켜본 세상의 멸망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수만 년.

    악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하자마자 세상 망하는 꼴을 보는 건 사양이라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아니 그 이상의 확률을 넘어 만난 인간.

    희나는 악마에게 ‘아직 늦지 않은 세상’을 보여 주었다.

    세상은 생으로 가득했고, 역동적이었다. 죽음과 고요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악마의 감각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이 세계가 무너진다면 어마어마한 박탈감이 찾아오리라.

    그리고 악마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족속들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아직 기회가 있는 세상’을 살려 낼 것이다.

    ‘나는 이 행운, 결코 안 놓쳐.’

    악마는 품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이리 와서 봐 봐.”

    권유에 희나는 얼결에 다가가 목걸이를 요리조리 살폈다.

    목걸이에는 요사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보석이 달려 있었다. 보통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시스템 설명 창이 떴다.

    <마석(Legendary): ‘세상 최후의 악마’의 마력이 응축된 돌. 일반 마석과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희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마석!”

    전설급 마석이었다.

    “어, 어, 어떻게? 마석은 배 속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어?”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악마는 헛웃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담석도 아니고, 저런 돌이 내 몸 안에 왜 굴러다녀? 그럼 문제 있는 거지.”

    희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어음. 그런가?”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나저나 악마도 인간이랑 신체 구조가 비슷했던가?

    주변을 둘러보니 희원과 강진현도 악마의 대꾸에 어찌 답할지 모른 채 얼떨떨해 있었다.

    “어쨌든, 나한테는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전설급 마석이 있다…… 이 말이지.”

    악마는 손에 든 목걸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세 인간의 눈동자가 목걸이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에 강진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걸 내주는 대신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아까 말했잖아. 나 책임질 수 있냐고.”

    악마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이건 내가 몇천 년간 모은 마력의 응집체야. 이걸 너희한테 주면 나는 마력적인 거렁뱅이 꼴이 난다, 이 말이지. 그럼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주 취약한 상태가 되는데, 그런 나를 책임질 수 있겠냐는 말이야.”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뻥이었다.

    마석에 마력의 ‘대부분’이 담겨 있는 건 맞았지만, 힘을 완전히 잃는 건 아니었다.

    ‘물론 힘을 쓰는 게 복잡해지긴 하지만.’

    악마는 그게 그거 아니겠냐고 생각하며 마석을 내밀었다.

    “너희가 나를 지켜 주고, 나를 재워 주고, 먹여 주고, 돌봐 줘. 그리고 무너지지 않은 세상을 구경시켜 줘.”

    당당한 요구에 희나와 희원, 강진현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의견은 만장일치였다.

    L급 마석과 몇십 년 치 하숙권에 즐거운 지구 여행권 교환이라니, 이건 남아도 너무 남는 장사였다.

    “당연히 가능하지!”

    “계약 콜이야!”

    그렇게 희나는 S급 헌터에 이어, L급 악마를 하수인으로 부리게…… 아니, 하숙인으로 두게 되었다.

    특별한 집에 어울리는 특별한 하숙인이었다.

    희나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대가로 L급 마석을 받았다.

    일행은 마석을 건네받자마자 곧바로 세계수 앞으로 직행했다.

    그다음은 어려울 것 없이 진행되었다.

    세계수의 뿌리는 마석을 집어삼켰고, 이내 온 잎사귀가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오색 빛깔로 반짝이는 나뭇잎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이어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희나와 희원, 강진현의 눈에만 보이는 글자가 아니었다. 시스템 문구는 지상의 모든 존재의 눈앞에 떠올랐다.

    정중한 시스템 문구와 함께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던 밝은 빛도 사그라들었다.

    “와…….”

    희나는 이유 모를 여운에 젖어 한참 동안 커다란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기이한 감동도 잠시.

    눈앞에 문구가 떠올라 반짝거렸다.

    세계수 키우기 퀘스트 성공 알림과 함께 랭크 업 알림이 띠롱띠롱 울렸다.

    희나는 ‘홈 스위트 홈’ 스킬 레벨 업이니, 뭐니 해서 눈앞에 정신 사납게 떠다니는 창을 모두 치워 버렸다.

    중요한 건 랭크 따위가 아니었다.

    “……끝난 거예요?”

    “그런가 봅니다.”

    천하의 강진현조차 얼떨떨한 낯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들이 맞이한 건 던전 게이트 시대의 종말이었다.

    희나와 희원의 부모님을,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간 미지의 존재들. 그리고 그것을 무섭게 뱉어 내던 던전이라는 공간…….

    희원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걸까?”

    “이렇게라니?”

    “허무하게……? 아니면…… 음, 몹시 평화롭게……? 보통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세상을 구원해 내잖아.”

    희원의 말에 희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가 겪은 건 고난과 역경 아니야? 오빠는 세계수를 키우느라 살이 쪽 빠졌고, 나는 몇 달 동안 진현 씨만 찾아 헤맸고, 머리 빠지게 고민해서 악마까지 구해 냈는데?”

    애당초 희나와 희원은 너무 평범해서 특별해져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마주한 아주 특별한 역경들…….

    하나같이 노력과 끈기, 선함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지 않았더라면 절대 해결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어쩌면 시스템은 세상의 평화는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희나와 희원 같은 평범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까지 생각하다, 희나는 슬쩍 뺨을 붉혔다.

    ‘과잉 해석인가?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방금 좀, 오글거리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계의 멸망을 저지한 순간에, 이 정도 감상에 빠지는 건 괜찮지 않을까?

    희나는 오빠의 어깨를 팡팡 치며 결론 내렸다.

    “이건…… 우리같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만 해결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퀘스트였다고 생각하자!”

    희나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하게 우뚝 서 있는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잎사귀에 시린 눈을 비비자, 비로소 ‘이게 꿈이 아니라 사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희나는 발랄하게 외쳤다.

    “이렇게 좋은 날에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오늘은 잔칫날이니까 무조건 수육이야! 가요, 우리!”

    희나의 선포에 모두 환호성을 지으며 온실을 우르르 떠났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자리 위로 글자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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