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211화
남매가 눈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편, 강진현은 기세를 날카롭게 벼렸다.
언제든 튀어 나가 공격할 수 있도록 전신의 근육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상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보통이 아닌 존재였다.
‘위험하다.’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강진현의 기감에 걸리지 않은 데다, 풍기는 분위기 또한 기묘했다.
뛰어난 헌터인 강진현은 악마가 풍기는 묘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읽어 냈다.
악마는 강진현의 눈빛에 서린 적대감을 모른 척,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진현? 무작정 다정한 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은 꽤 까칠한 구석이 있구나? 나처럼 귀여운 어린아이에게 이런 살기를 뿌린다고?”
“넌 누구지? 희나 씨와 희원 형님의 손님으로 보이는데…… 평범한 존재는 아닌 듯하군.”
“나? 난 악마. 네가 들어갔던 던전의 주인이지.”
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 이걸 다짜고짜 이렇게 밝힌다고?’
언젠가의 복수를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착각일까……?
희나는 둘 사이에 재빨리 끼어들어 양팔을 휘휘 저었다.
“지, 지, 진현 씨!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스톱!”
다행스럽게도 강진현은 큰 동요 없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희나에게 그간의 일을 상세히 전해 들은 덕이었다.
세 인간과 한 악마는 거실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하지만 악마를 집 안에 들여놓은 건 위험했습니다, 희원 형님.”
“아하하, 내가 너무 바빠 가지고…….”
희원은 땀을 삐질 흘리며 변명하다 눈앞에 뜬 시스템 창에 악! 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호들갑스러운 호출이었다.
……아니, 예전에는 이보다는 더 교양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됐다! 나는 쟤가 불러서 이만! 싸우지 말고! 인사 잘하고 있어라!”
희원은 온실을 향해 후다닥 뛰어 사라졌다. 저 멀리 반쯤 시든 모양으로 늘어져 있던 바둑이도 엉금엉금 기어 온실로 들어갔다.
희원이 사라지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악마가 뻔뻔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런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여기 살면 안 되냐? 응? 혼자 사는 것보단 같이 사는 게 더 재미있겠더라고.”
……정말로 뻔뻔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먹어 봤는데, 희나 네가 한 밥이 제일 맛있더라. 거기다가 날 곁에 두면 사고 치는지, 안 치는지도 감시할 수 있잖아. 이게 바로 일석이조라는 거 아니냐!”
악마 아니랄까 봐 혀끝에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웠다.
솔직히 악마의 말이 솔깃하긴 했다.
‘어디 밖에서 사고 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보단 눈앞에 두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희나는 진현의 눈치를 살폈다.
“진현 씨는 어때요? 솔직히 말해서 저 말이 그럴싸하긴 해서…….”
“적은 가까이 두고 살펴야 한다는 말 말입니까?”
“어……. 표현하자면 그렇죠? 그리고 집 구조 좀 바꾸면 손님방 하나 더 들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강진현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
악마가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이곳은 집입니다. 희나 씨가 마음 놓고 휴식해야 할 집 말입니다.”
그의 대답은 꽤나 회의적이었고, 희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하긴. 진현 씨처럼 예민한 사람은 위험한 존재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경이 쓰일 수도 있어.’
한편, 악마는 강진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엄지를 뒤집으며 야유했다.
“우우우……. 규탄한다!”
전설 등급을 가진 보스 몬스터라기에는 굉장히 격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희나의 마음은 또다시 기우뚱했다.
‘저렇게 유치한데, 혼자 둬도 괜찮을까?’
어떻게 이렇게 미덥지 못할 수 있을까!
상반된 의견 사이에서 끙끙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엄청난 시각 효과와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희나는 호들갑스럽게 말을 걸었다.
“진현 씨, 진현 씨 눈에도 보여요?”
“뭔데, 뭔데?”
악마도 덩달아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 어린 낯을 했다.
하지만 희나나, 강진현이나 둘 다 악마를 상대해 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예. 보입니다.”
“둘이서만 뭘 보고 있는 거야? 어?”
“오빠가 해냈어요!”
“궁금하잖아! 너네 오빠가 뭘 해냈는데!”
“퀘스트 다음 항목이 열린 듯한데, 온실에 가서 함께 확인해 볼까요?”
“뭐야! 퀘스트는 뭐고!”
“좋아요, 진현 씨!”
“나 정말 소외감 든다, 진짜!”
악마는 반쯤 울상 지으며 온실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연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나도! 나도! 본 달팽이 이동 요청!」
“……어쩌다 달팽이한테까지 우습게 보이는 몸이 된 건지.”
악마는 있는 힘껏 투덜거리면서도 오색이를 순순히 안아 들었다.
“야, 나중에 집주인한테 말 잘해 주기다? 내가 이렇게 잘한다고.”
물론, 달팽이에게 슬쩍 뒷공작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온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희원이었다.
“끄흐윽. 내가 해냈어, 해냈다고!”
희원의 환희 어린 절규가 거대한 세계수보다 더한 존재감을 뿜어낸다는 점에서, 그가 겪었을 고충이 짐작되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바둑이도 반쯤 시들시들해진 이파리로 힘껏 손뼉을 치고 있었다. 어찌나 기뻐하던지, 박수 소리가 끝이 안 났다.
“둘 다 수고했어. 정말 고생 많았지?”
희나는 반년 동안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느라 반쪽이 된 인간 하나와 식물 하나를 한참 동안 위로했다.
“……됐어. 이제 마지막 한 단계만 남았어. 세계수 이놈이 뭘 원하는지 보자고.”
희원이 감동의 눈물을 쓰윽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가히 세계수를 키워 낸 S급 농사꾼다워서, 희나는 조금 감탄했다.
‘오! 연륜이 붙은 느낌.’
일행은 동시에 퀘스트 창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세계수 키우기(Legendary): 세계수는 어긋나고 뒤틀린 공간을 보수하며, 모든 공간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세계수는 산산조각 났고 세상에 혼란이 도래했습니다. 세계수를 원상 복구하여 세계 평화를 되찾아 보는 건 어떨까요?>
오래간만에 보는 퀘스트 설명 문구는 여전했다. 희나의 눈은 그 아래로 향했다.
<……
▶ 필수 퀘스트 (2/3)
- 세계수의 씨앗 조립하기 (완료!)
- 세계수 키우기 (완료!)
- 세계수 활성화
① Legendary급 마석을 바쳐 세계수를 활성화합니다.
② 활성화한 세계수가 무너져 가는 공간을 보수하면, 세계 평화가 도래합니다.
……>
활성화한 세계수가 무너져 가는 공간을 보수하면 세계 평화가 도래한다니, 그것참 마음 따스해지는 결말……
‘……일 리가 없잖아!’
희나는 ‘세계수 활성화’ 파트의 ①번 항목을 읽고는 그대로 뒤로 쓰러질 뻔했다.
“뭐어? 전설급 마석? 이걸 얻는 게 가능하긴 해? 시스템 미친 거 아니야?”
역시 남매는 남매. 희원이 희나의 생각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그 소리가 아니잖아!”
전설급 마석을 얻으려면 그 등급에 준하는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이 아는 레전더리급 몬스터는 딱 하나뿐이었다.
세상 최후의 악마.
SSS급 던전에서 나온 보스 몬스터.
세상에서 제일 강한 마법사이자, 현재 인류의 힘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존재.
그리고 희나의 집에서 무전취식 중인 날백수…….
희나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어떻게 해서든 악마를 물리쳐야 했던 거야?’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시스템이 원하는 게 정말로 세상 최후의 악마를 물리치는 것이라면, 그들은 사활을 건 전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한테 궁금한 게 있어. 만약 우리가 세계수를 활성화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강진현이 침음을 내뱉었다.
“47개월…….”
“시간이 4년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그사이 새로운 던전이 열리고, 우리가 공략할 만한 L급 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떤 이변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예견된 상급 게이트 소식은 없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상황을 헤쳐 나갈 방도를 의논하는데, 누군가가 그들 한가운데로 돌멩이 하나를 톡 집어 던졌다.
“저기. 내가 있는 거, 진짜로 잊어버린 건 아니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세상 최후의 악마가 온실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은 채 셋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마의 품에는 오색이가 안겨 있었다.
“나 빼고 내 얘기를 막 하네, 이 인간들은.”
투덜거리기에, 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따라온 거야?”
“아까.”
“그럼…… 들었어?”
“당연히 들었지. 나도 귀가 있다고.”
“얼마나 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아, 망했다.
희나는 끙,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모한 계획이었는데, 계획이 들통나면서 성공 확률이 완전히 제로에 수렴하게 됐다.
“우리가 그나마 이길 방법은 뒤통수치는 것밖에 없었는데, 젠장.”
희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아주 죽상이었다.
“너희, 생각보다 비열한 인간들이었구나?”
“인류애가 넘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줘.”
대꾸하며 희나는 악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이왕 이야기 훔쳐 들은 김에, 너는 어떻게 생각해?”
희나 일행의 힘으로 악마를 이길 방법은 전무했다.
이렇게 된 거, 수천 년, 아니 어쩌면 수만 년을 살아왔을지 모르는 강력한 마법사의 조언을 얻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희나는 퀘스트의 내용과 퀘스트를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흠.”
악마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턱을 괴었다. 빵빵한 볼살이 자그마한 손가락에 터질 듯 밀리는 게 귀여웠……
‘……아니, 이게 아니라. 귀여움에 현혹되면 안 돼!’
희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악마를 주시했다.
악마는 깊이 생각에 빠진 듯,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치며 무엇인가를 계산하고, 궁리했다.
“으으으음…….”
저 조그만 악마에게 인류, 아니, 이 우주의 존망이 걸려 있었다.
희나는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악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악마가 입을 열었다.
“너희, 나 책임질 수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