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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10화 (210/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10화

    세상 최후의 악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희나를 노려봤다.

    “뭐라고? 여기 내가 멀쩡히 살아 있구먼 무슨 소리야? 무엇보다 나는 ‘세상 최후의 악마’. 지상과 지하의 모든 생명체가 스러지기 전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는 몸이라고.”

    “알았어. 넌 대단한 악마니까, 내 말 좀 들어 봐.”

    희나는 방정맞은 입술을 꾹 눌러 진정시키곤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악마는 희나의 현란한 설명에 빠져들었다. 잠시나마 막장 드라마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와. 내가 거길 빠져나간 게 이런 식으로까지 영향이 갔다고? 흥미로운걸.”

    그러면서 자기가 만약 던전에 다시 돌아가면 게이트가 사라지는 거냐는 의문을 제기했으나, 희나는 무시했다.

    “그건 절대로 안 돼. 네가 들어갔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아직 진현 씨가 못 나왔단 말이야…….”

    “허, 참. 내가 잊고 있었어. 여기도 참 절절한 사랑을 하는 인간이 있었지.”

    희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맞아! 나는 진현 씨를 아주아주 사랑해! 빨리 보고 싶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악마는 희나의 기억 대부분을 엿봤으니, 강진현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네 생각은 내가 이렇게 나온 걸로 던전이 클리어됐으니, 자연히 던전 브레이크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세상도 멸망하지 않을 거다……라는 거지?”

    “응.”

    “글쎄.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세계는 어떻게든 우그러지고 말 텐데.”

    악마는 조금 회의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희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네 말대로 임시방편일 수도 있지. 하지만 시간을 번 건 맞잖아? 그사이에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어.”

    이렇게 씩씩할 수 있는 건 희원이 세계수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수를 전부 키워 내면 세계 멸망을 저지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희원이 피똥 싸며 둥가둥가 육아한 덕일까? 세계수는 상당히 성장한 참이었다.

    다음 지령이 무엇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대로라면 문제없이 세계수를 키워 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시스템도 우릴 돕고 있잖아!’

    썩 믿음직스럽진 못한 백이긴 하지만, 일단 시스템도 협조적이었고.

    “어쨌든, 지금 상황은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해 준 거고……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텐데, 기본적인 생활 방식을 알려 줄게.”

    악마는 금세 표정을 휙 바꾸고 희나 곁으로 쿵쿵쿵 달려왔다.

    “그래? 저 TV란 것처럼 나머지 것들도 재미있으면 좋겠다.”

    이에 희나는 입매를 한일자로 굳히곤 악마의 발끝을 손가락질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거슬렸던 게 있었다.

    “……우선 네가 배워야 할 건 공동생활 매너일 것 같네. 쿵쿵거리면서 걸으면 안 돼. 아랫집에 실례야.”

    “아, 시작부터 잔소리라고?”

    악마는 투덜거렸다.

    * * *

    악마에게 기본적인 생활 상식을 가르치고 섬으로 돌아오니 밤늦은 시간이 되었다.

    ‘나중에 상황 좀 정리되면 서울 관광도 좀 시켜 줘야지. 살살 달래 가면서 데리고 있어야겠어.’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문을 열었다.

    숙소 안은 몹시 캄캄했다. 하지만 익숙한 장소였으므로 희나는 별 어려움 없이 조명을 켤 수 있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고 이내 희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누군가가 침대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소름이 쭈뼛 돋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희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침대에 앉은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진현 씨!”

    희나는 자신이 보는 게 환영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강진현을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야. 진짜 진현 씨야.’

    그리고 그에게선 막 씻은 듯한 물 냄새가 났다. 그리운 향기였다. 희나는 꽉 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씻었어요?”

    “예. 전신이 먼지투성이라 그 상태로는 도저히 희나 씨 숙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마치 어제 본 사이인 양 평소와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흐으으…….”

    목소리를 듣자 그를 끌어안은 팔이 가늘게 떨렸다. 강진현 또한 이를 느꼈는지 희나를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들었습니다.”

    “……곰이 사람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걱정 많이 했어요.”

    “기다려 주어서 고맙습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아까 희원 앞에서 엉엉 울었던 게 도움이 됐던 걸까? 눈물이 펑펑 흐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의연한 목소리가 나왔다.

    “진현 씨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죠?”

    강진현이 천천히 대답했다.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살이 많이 내렸어요.”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희나의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이렇게까지 뼈가 드러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섬세한 손길에 온몸의 솜털이 죄다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어 귓불이 절로 붉어졌다.

    “아,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고…….”

    괜한 부끄러움에 강진현을 밀어냈지만, 단단한 팔은 희나를 풀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평소 희나의 약한 힘에도 쉽게 물러나 주는 그인데, 오늘은 양보가 없었다.

    “이것 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그러자 강진현은 되려 희나를 고쳐 안았다.

    “……앗!”

    정신을 차렸을 땐 강진현의 무릎 위에 주저앉은 채였다. 굉장히 부끄러운 자세였으므로 얼굴이 절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게 뭐예요!”

    “희나 씨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이제야 눈을 마주쳐 주는군요.”

    무뚝뚝한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희나가 부끄러움도 잊고 순간적으로 넋을 놓을 정도로 다정한 웃음이었다.

    “찾아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번에도 희나 씨가 절 구한 것이군요.”

    희나는 뒤늦게 마주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도’라뇨? 제가 언제 진현 씨를 구한 적 있었다고.”

    “무척 많았죠.”

    강진현이 희나의 뒤통수를 가만히 눌렀다. 얼굴이 가까워졌고, 이마가 콩 닿았다.

    “당신이 저를 숨 쉬게 하니까요.”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아 왔으므로 반박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강진현의 목을 꽉 끌어안는 수밖에.

    서로를 그리워하던 연인이 마주했다. 더없이 행복한 밤이었다.

    * * *

    SSS급 던전을 클리어하자 꽉 막혀 있던 모든 일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헌터들은 보름에 걸쳐 전부 귀환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축배를 들 만한 일이었다.

    물론 던전 보스에 대한 의문은 미스터리로 남아 높은 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듯했지만…… 일단 희나 같은 어시스턴트나 일반 헌터들에게는 그런 문제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던전을 클리어했고,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장 끝! 드디어 집!”

    희나는 개운한 표정으로 ‘홈 스위트 홈’에 들어섰다.

    희원이 실실 웃으며 희나와 강진현을 반겼다.

    “희나 너는 집에 맨날 들락거려 놓고는…… 그래도 그렇게 좋냐?”

    “그럼, 당연하지. 섬에 있으면서 한국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를걸!”

    희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집 이곳저곳을 살폈다. 희원 말마따나 툭하면 들렀던 곳인데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희원과 강진현도 반갑게 인사했다.

    “저도 왔습니다, 희원 형님.”

    “진현아! 엄청나게 걱정했어! 너는 소식이 없다고 하지, 희나는 미쳐서 날뛰지…… 집안이 아주 흉흉…… 읍!”

    “그 말은 그만!”

    희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리는 오빠의 입을 손바닥으로 확 막아 버렸다. 희원은 질린 표정으로 희나를 휙 밀쳤다.

    “야! 더럽게 안 씻은 손으로 남의 입을 막아?”

    “그야 오빠가 쓰,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얘가 이래. 너 없을 때는 씻지도 않고 막 문만 열었다 닫았다……”

    “아악! 오빠!”

    “끄아아악! 그렇다고 사람을 쳐?”

    남매의 애정 어린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여전하구나.’

    강진현은 반가운 일상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희나와 희원의 투닥거림이 끝난 건, 불청객의 등장 때문이었다.

    “너 보기보다 폭력적인 인간이었구나?”

    악마가 방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악마는 볼 때마다 매번 모습을 바꾸었는데, 오늘은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귀여운 외모는 강진현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무기였다.

    “……누구냐?”

    그는 악마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박에 파악하고는 희나와 희원을 막아섰다.

    희나는 악마의 등장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희원을 바라보았다. 희원도 당혹한 듯 뺨을 긁적이고 있었다.

    남매는 눈으로 대화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밥 먹이고 잠깐 낮잠 자길래 내 방에 눕혀 놨을 뿐이야.’

    ‘아니, 다 괜찮은데 왜 진현 씨 있을 때 애를 들여?’

    ‘너희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어! 그리고 쟤가 저렇게 불쑥 튀어나올 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악마는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존재였지만, 미식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인간처럼 세끼 전부 꼬박꼬박 차려 먹고 있었는데, 희나가 섬에 있는 동안 악마에게 세끼를 차려 주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게 바로 희원이었다.

    더불어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은 악마의 말 상대도 해 줘야 했고.

    덕분에 최근 몇 달간 희원은 굉장히 바쁜…… 아니,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세계수 키우기랑 악마 챙기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면 둘을 한집 안에 둘 수밖에 없어!’

    희원이 억울하다는 듯 눈짓했다.

    ‘……그건 인정.’

    희나는 오빠의 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보채는 세계수와 물음표 살인마인 악마를 동시에 돌보는 건…… 몸이 두 개여도 힘들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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