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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08화 (208/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08화

    희나는 식물형 몬스터인 바둑이를 떠올렸다.

    ‘오색아! 우리 홈 스위트 홈 요정 달팽이야! 제발 저 악마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라…….’

    희나는 시스템을 향해 간절히 빌며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가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그래?”

    “으응?”

    “아까 결국 너희 부모님이랑 인사 못 하고 왔잖아. 뭐, 예전 기억을 보는 것뿐이지만…… 넌 죽은 부모를 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희나는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악마가 이렇게 섬세할 수도 있는 건가? 아냐, 나야말로 악마는 섬세하지 못할 거라는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건가?’

    소름 끼치는 말들을 툭툭 내뱉던 악마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희나의 속내를 읽어 내기라도 했는지, 악마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 불만이라도 있어?”

    “아, 아니. 그런 것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라서. 그나저나 난 정말 괜찮아.”

    생생한 모습으로 만난 부모님은 그립고도 반가웠다.

    “엄마랑 아빠한테는 마음속으로 인사했으니, 됐어.”

    기억은 언제든 추억할 수 있고, 아쉬워해봤자 남는 건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뿐이다.

    “그래도 덕분에 부모님은 실컷 본 것 같네. 너야 날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희나의 덤덤한 감사 인사에 악마가 히죽 웃었다.

    “크흠, 그래? 근데 어디로 가야 한다고?”

    “저기로 쭉 가면 돼.”

    희나는 던전 지도를 보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악마가 마법으로 공간을 구불구불 뒤섞어 놓지 않았으므로, 지도가 멀쩡히 보였다.

    “어휴. 이대로라면 며칠은 걸어야겠다. 넌 계속 그 아기 모습으로 있을 거야? 걷는 속도가 너무 느린데.”

    희나가 투덜거리는 순간, 옆에 있던 자그마한 형체가 불쑥 솟았다.

    “까, 깜짝이야!”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악마는 어느새 커다란 남자 모습으로 변신한 채 낄낄거렸다.

    “왜? 커진 모습이 더 빨라서 좋을 거라면서?”

    그리고 악마는 순식간에 희나를 어깨에 턱, 걸쳐 들었다.

    “내가 너를 들고 뛸 테니까, 손가락만 잘 치켜들고 있으라고!”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으아아악!”

    끔찍한 속도감에 희나는 한참 동안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희나는 어깨에 눌려 얼얼한 배를 문지르며 헛구역질했다.

    “우웁.”

    SSS 던전의 레전더리급 보스 몬스터의 승차감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어때? 금방 왔지?”

    “그, 그래…….”

    희나는 잠시 승천했던 정신을 지상으로 끌고 내려왔다.

    “여기…… 여기로 쭉 들어오면 문이 보일 거야.”

    희나는 안전 구역 안으로 악마를 쭉 끌어당겼다.

    “오. 제법 감쪽같은데?”

    악마는 건들거리며 안전지대의 붉은 선을 구경했다.

    아까 어린아이였을 때는 뭘 하든 앙큼하고 귀여워 보였는데, 지금은 우락부락하게 몸이 바뀌어서 그런지 순 양아치 같았다.

    “저, 악마야?”

    “어어.”

    희나는 악마를 불러 현관문 앞에 세웠다. 그리고 조심스레 당부했다.

    “나랑 몇 가지 약속해 줄 수 있어?”

    “이곳에서 멀쩡히 나가 망가지지 않은 멀쩡한 세상을 구경할 수 있다면, 그래. 좋아.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악마는 다소 흥분한 듯 콧김을 흥흥 내뿜었다. 몇만 년 만의 바깥나들이냐, 하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중얼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제안했다.

    “마력을 걸고 맹세할까? 마력을 걸고 한 약속은 절대 못 깨거든.”

    “좋아!”

    “물론 제약이 나한테만 해당하는 건 아냐.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해. 지키지 않으면…….”

    악마는 희나의 귓가에 마력을 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속삭였다.

    “으…….”

    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석을 걸고 하는 맹세를 어겼을 때보다 대가가 더 끔찍했다.

    “어때? 완전 든든하지?”

    악마의 장담에 희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럼 이제부터 약속들을 정해 보도록 하자. 여길 나갔을 때 지켜야 할 것들 말이야.”

    “맘에 들어.”

    씨익 웃는 악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스쳤다.

    * * *

    “여기구나!”

    악마는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나도 그런 악마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홈 스위트 홈을 통해서 공간을 우회하면 던전 보스도 빼돌릴 수 있구나.’

    희나와 악마는 재빨리 ‘홈 스위트 홈’을 경유하여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 말이다.

    “여긴 어디야? 여기도 네 집인가?”

    악마는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이 신경 쓰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적하지는 못했다.

    “응. 여긴 현실 세계에 있는 내 집이야. 그나저나 바깥으로 나온 소감은 어때?”

    “평화롭고 조용하네. 울음소리나 비명이 들리지 않아서 좋아.”

    “계약한 대로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고 지낸다면 앞으로도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거야.”

    희나는 혹시 심심해져서 악마가 세상을 멸망이라도 시킬까 봐, 재빨리 TV를 틀었다. 네모난 화면 위로 화려한 영상이 떴다.

    다행스럽게도 악마는 텔레비전 화면에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

    “오. 이게 바로 그 TV구나!”

    “알고 있네?”

    “그럼. 네 기억 속에서 많이 봤으니까. 그러니까…… 영상 마법이 걸려 있는 판때기 같은 거지?”

    “대충 비슷해. 마법은 아니고, 과학 기술로 만든 거야.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연극 같은 걸 보여 주나 보군.”

    “응.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어.”

    그러면서 리모컨을 사용하는 걸 보여 주자, 악마는 사용법을 금세 익혔다.

    “호오. 신기하군. 이걸 이렇게 하면…….”

    그가 눈을 반짝이며 화면에 집중하려는 찰나, 희나는 TV를 뚝 껐다.

    “왜!”

    악마는 버럭 짜증을 냈다. 그 얼굴이 조금 무서웠지만, 희나는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아까 나오기 전에 약속했던 거, 마저 해 줘야지. 그러면 텔레비전 보게 해 줄게.”

    “……쯧. 알았어.”

    악마는 손가락을 딱, 하고 맞부딪쳤다. 손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났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됐어.”

    “정말로?”

    “그래. 아까 약속했잖아. 인간들은 깨어났을 거야.”

    “어디에 있어?”

    “황야 어디든 있겠지.”

    “뭐어?”

    “걔네들 강하다며? 그 정도 앞가림은 알아서 하라고 해. 황야에는 모래바람 외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으니까, 굶어 죽는 것 빼곤 죽을 일도 없어.”

    그러면서 악마는 희나를 재촉했다.

    “저거 빨리 틀어 줘. 나는 이제부터 인간들의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볼 작정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눈앞의 재미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온갖 고민을 등에 이고 진 채, ‘홈 스위트 홈’ 현관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제대로 깨어난 게 맞을까? 보스 몬스터가 필드에서 사라졌는데 던전은 어떻게 되는 걸까?’

    희나는 곧바로 SSS급 던전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 먼 곳부터 달팽이 한 마리가 (달팽이의 기준에서) 가히 쏜살같은 속도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희나아아아악!!!!!!!!!!!!!」

    오색이는 텍스트적으로 아주 쩌렁쩌렁하게 희나를 불렀다.

    ‘어머나.’

    희나는 깜짝 놀랐다. 오색이가 희나를 ‘집주인’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당탕, 하며 희원과 바둑이가 튀어나왔다. 아까 악마와 함께 들렀을 때는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기라도 했던가.

    “희, 희나라고? 희나야?”

    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

    「끄흐그으흐그으흑흐으흐으윽」

    가족의 열렬한 환호에 희나는 어쩔 수 없이 모두를 한 번씩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대체 어떻게 돌아온 거야? 지도 보고 돌아왔니? 응?”

    희원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 밑이 몹시 퀭해져 있었다.

    “나는 아주 멀쩡해. 자세한 얘기는 조금 이따 설명해 줄게. 그나저나 내가 없어지고 나서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하루 조금 넘었어…….”

    “그래? 나는 최소 일주일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꿈속에서 경험했던 시간이 길어서일까? 사실 몇 달, 아니, 몇 년은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 고작 하루라니. 말 그대로 한밤의 꿈에 불과했단 말인가?

    별로 안 지났네, 하는 중얼거림에 희원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했다.

    “별로 안 지났다니, 나는 그동안 죽는 줄만 알았다고.”

    지난 하루 동안 그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보통 던전도 아닌 SSS급 던전이었다. 희나를 구하려면 외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가깝게 지내는 헌터들? 청룡 길드? 정부?

    성급하게 외부에 희나의 능력을 밝히기도 어려웠다. 그랬다가는 되려 희나가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희원은 일단 급한 대로 원덕삼에게 도움을 청해 놓은 후, 가진 돈을 싹싹 모아 온갖 아이템을 사 모았다.

    위급 시에 자기라도 희나를 찾아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청룡 길드에 알려야겠다고 막 결심했는데…… 네가 돌아왔네.”

    나름 타이밍 좋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걱정해 줘서 고마워.”

    희나는 마음고생 많았을 오빠를 다시 한번 포옹해 주었다.

    평소라면 소름이 끼칠 만한 행위였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죽을 위기를 거친 후라서 그런지 감동스럽다는 마음만 들었다.

    “……자. 이제 진정했지?”

    잠시 후, 희나는 오빠를 불쑥 밀어내곤 씩씩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희원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식겁했다.

    “뭘 하려…… 허억, 그 던전이잖아? 빨리 문 닫아! 또 끌려가!”

    「노오오오오오오오!」

    「0.01%!!!!!!!!!」

    오색이도 0.01%의 악몽을 떠올렸는지 안테나를 빳빳이 세웠다.

    희나는 안심하라는 듯 둘에게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괜찮아. 이제 이 던전에는 아무런 몬스터도 없거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내가 여기 있던 몬스터를 바깥세상에 옮겨 두고 왔으니까.”

    희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내 집은 어디에’ 스킬을 발동했다. 시급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내 예상대로여야 하는데.’

    희나는 심장을 졸이며 허공에 뜬 지도를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됐다! 됐어! 오빠! 끝났다고!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내 예상대로 됐어!”

    희나는 희원과 오색이, 바둑이를 부둥켜안고 제자리를 폴짝폴짝 뛰었다.

    뛰는 것뿐일까,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희원은 이제 다른 의미로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 희나야? 뭐가 됐다는 거야? 어? 왜 울고 그래!”

    “으허어엉……. 내가 해냈어……. 진짜로, 됐다고……! 게이트, 게이트가, 열렸어!”

    “지, 진정해, 뚝! 어허! 눈물 그쳐!”

    “으어어어어엉!”

    ……아무래도 희나가 진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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