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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07화 (20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07화

    연달아 시스템 설명이 떠올랐고, 어린아이답게 순진했던 눈망울이 순간 깊어졌다.

    “…….”

    아이는 사과를 먹느라 희나에게 무엇인가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 이것도 먹어.”

    희나는 몇 입 먹다 남은 사과를 여자아이에게 양보해 주었다. 아이는 눈알을 굴리다, 군말 없이 희나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이가 커다란 사과를 다 먹어 치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때, 맛있지?”

    “으응…….”

    아이는 입맛을 다시며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어떻게?”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사과는 원래 맛있는 건데, 꼭 처음 먹어 본 사람처럼.”

    “처음이야.”

    “사과, 안 먹어 봤어?”

    “응.”

    “왜? 난 사과 좋아해서 자주 먹었을 텐데…… 슬쩍 먹어 볼 기회는 많았을 거 아니야?”

    “그야 기억 속 음식에선 아무 맛도 안 나니까…….”

    “그렇구나. 너희 던전에서는 사과가 안 나는구나?”

    “거긴 없는 것 천지…….”

    아이는 여기까지 대답하다, 흠칫하며 고개를 팩 돌렸다.

    희나는 아이, 아니 ‘보스 몬스터’와 눈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역시, 너구나.”

    아이는 입을 쩍 벌렸다.

    “너, 너! 뭐야? 어떻게 알았어?”

    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상대가 정말 ‘사람처럼 보인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띄운 ‘내 집은 어디에’ 스킬에 따르면, 희나의 바로 앞에 있는 건 바로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다.

    지도가 이리저리 일렁이는 와중에, 희나를 뜻하는 점과 보스 몬스터를 뜻하는 점이 거의 겹쳐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의 기억을 들쑤시며 호기심이나 채우고, 관광 다니는 모습은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저 보스 몬스터의 수작에 휘둘려 기억에서 이리저리 튕겨 다니던 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면마다 원래 기억에는 없던 사람들이 하나씩 꼭 끼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저…… 보스 몬스터고.’

    지금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희나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사이, 보스 몬스터 또한 몹시 당혹하여 주절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냐니까? 그래. 운이나 감이 엄청나게 좋다거나, 정신력이 뛰어나서 위화감을 느낄 순 있다고 쳐. 가끔 그런 인간들이 있거든.”

    “그래? 운이 좋아도 위화감을 잘 느낄 수 있는 거구나.”

    친절한 설명 덕분에 희나는 다시 한번 자기의 행운치가 상상 이상으로 굉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몬스터는 계속 끙끙거렸다.

    “하지만 그건 위화감까지만이지! 완전히 의식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몇천 년 동안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어!”

    “몇천 년? 던전 보스를 그렇게나 오래 해 왔던 거야? 진짜 SSS급 보스답네. ……아무튼, 오늘 그런 케이스가 한 번 생긴 거로 치자.”

    희나는 벤치에서 내려와 보스 몬스터 앞에 씩씩하게 섰다. 둘 다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그러자 적당히 시선이 맞았다.

    그제야 시스템 정보가 떴다.

    <세상 최후의 악마(Legendary): 마신에게 심장을 바쳐 스스로 악마가 된 이. 최고의 마법사. 멸망한 세상의 최후에 남게 될 존재.>

    긴 설명을 뒤로하고 희나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레전더리’라고 쓰여 있는 글자였다.

    “SSS급이 아니라 전설……급이라고?”

    “내 등급이 대단하긴 하지? 뭐, 내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보는 사람마다 굉장히 놀라더라고.”

    희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SSS급이 아니라 전설급 보스가 있는 던전이라니……. 뚫지 못한 건 당연한 건가.”

    던전의 급수와 보스 랭크가 다른 건…… 예상 밖이었지만, 아예 없던 일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 희나와 권다혜 일행이 빠졌던 네크로맨서 좀비 던전도 그랬지 않았던가?

    ‘거기다 세상 최후에 남게 될 존재라니. 심상치 않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뜻처럼 들리기도 해.’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절로 걱정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은 거야? ……아니면, 나한테 했던 것처럼 이렇게 기억을 빼먹고 놀다가 버릴 예정이라든가?”

    “제법 똑똑한데? 칭찬해 줄게. 아직 인간들은 안 죽였어. 시간을 멈춰 놨어.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아껴 먹을 거거든.”

    아이, 아니 세상 최후의 악마는 인간을 마치 초콜릿처럼 표현했다.

    껍질을 까듯이 머릿속을 헤쳐서, 천천히, 살살 기억을 녹여 먹는 것이다…….

    희나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왜…… 왜, 그런 짓을 해?”

    “그런 짓이라니.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몇천 년씩 지내야 한다면 너도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을걸.”

    나는 인간이 일종의 ‘TV’ 같은 오락 매체인 셈이라고.

    악마가 투덜거렸다.

    “상대가 강하기라도 하면 싸우는 맛이라도 있을 텐데, 다들 약해 빠져 가지곤…….”

    하지만 이내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인간들이 내 구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건 조금만 더 있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거든. 그때부턴 잠깐이지만 즐길 거리가 좀 생긴다고 봐야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라니. 아마 던전 브레이크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희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네가 던전 밖으로 나온다고? 그럼 우리 세상은 어떻게 되는데?”

    “보통은 며칠 안에 부서지더라고.”

    “부서져?”

    “내가 갇혀 있던 공간이 열렸다는 건 네 세상이 한계에 몰려 있다는 뜻이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한계에 몰리고, 우리 세상이 그걸 견딜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돼?”

    “공간이 갈기갈기 찢기고, 우그러져서 차원 바깥의 괴물들이 잔뜩 들어와. 하등하고 공격적인 놈들 말이야.”

    “아, 안 돼…….”

    끔찍한 예언에 희나의 눈이 흔들렸다.

    ‘저 악마를 처치하는 것 외에는 멸망을 피할 방법은 없는 거야? 뭐라도 가져와서 찔러 볼까? 아니, 찌른다고 찔려 줄까? 아까 자기가 엄청나게 강하다고 했는데, 나는 한 손가락감도 안 될 텐데.’

    희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악마는 조잘거렸다.

    “무서워? 너는 특별히 내가 데리고 있어 줄게. 아주 맛있는 사과를 주었으니까. 그나저나, 내게 사과 맛은 어떻게 느끼게 한 거야? 원래 기억 속 음식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사과가 정말 맛있긴 했나 보다. 악마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맛이 나는 음식을 먹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몰라. 내가 아까 말했지? 인간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고. 당연히 인간이 먹는 음식도 먹을 일이 없지.”

    거기다 악마는 말 그대로 풀 한 포기 없는 황야에 살았다. 황야에 있는 것이라곤 말라붙은 잡초와 거슬거슬한 모래뿐이었다.

    그런 악마에게 희나가 준 사과는 몹시 특별했다.

    “어…….”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희나는 악마의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마 그건 기억 속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였을 거야.”

    몇 달 전, SSS급 던전 토벌대를 따라올 때 오빠와 언쟁을 벌인 후 화해의 의미로 받은 사과였다.

    ‘인벤토리에 넣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런데 대체 그걸 어떻게 꺼냈는지 의문이긴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눈앞에 글자가 반짝거렸다.

    그제야 희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순간적으로 시스템이 관여했던 거구나.”

    “으음.”

    정말 고마워할 맛 안 나는 생색이었다…….

    ‘어쨌든 그 사과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 같아.’

    시스템 문구를 떠올려 보니, 사과는 섭취자의 인지 능력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덕분에 희나는 지금이 바로 ‘기억 속’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거고 말이다.

    희나는 알게 된 사실을 악마에게 설명했다.

    말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글쎄.

    당장 저 악마의 손에 적게는 수천 명 헌터, 많게는 인류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입술이 절로 움직일 수밖에.

    “아하. 그래서 맛이 느껴졌구나. 나한테는 특별한 효과가 없었던 것 같긴 하지만, 맛있었으니 됐다.”

    악마는 오래간만에 느낀 미각적 자극을 음미했다.

    그사이, 희나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내가 여기서 해결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자.’

    첫 번째. 이 가짜 기억 속에서 벗어나기.

    희나는 눈동자를 굴려 슬쩍 악마를 바라보았다.

    ‘이건 악마를 잘 구슬려 보면 어찌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둘째. 악마에게 잡힌 헌터들을 살릴 방법을 찾기.

    희나는 미간을 구겼다. 이것도 첫 번째 건과 비슷한 종류다. 악마와 거래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날 풀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들어 줄 테니, 사람들이랑 교환하자고 할까?’

    골똘히 궁리하던 것도 잠시, 희나는 마지막 문제를 떠올리곤 입술을 씹었다.

    ‘마지막,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어!’

    셋째.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사람들을 살려 보았자 세상이 망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대로 던전 브레이크가 벌어지면 세상이 망해버린다는 건데. 막을 방법이 없을까?’

    어려웠다.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무거운 문제였다.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상대라고는……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레전더리급 악마 하나뿐이었다. 도움이 안 됐다.

    희나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생각해 내자. 나는 꽤 대단한 사람이야. 그동안의 특혜도 그렇고, 시스템이 직접 나서서 나를 구한 덴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의지할 사람이 부재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두렵게 느껴질 줄이야.

    ‘우선 잡혀 있는 헌터들부터 해결한 후에 다음 대안을 찾아야겠어. 나 혼자로는 무리야. 내가 던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문을 열고 들락날락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순간이었다.

    희나는 뒤통수를 강타하는 깨달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뭐야, 왜 그래?”

    “악마야!”

    희나는 악마에게 덥석 달려들어, 조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이에 악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살려 달라고? 살려 보내 주고 싶어도 내가 널 여기서 못 내보낸다니까. 그리고 나라고 다른 세상 망하는 꼴 보는 게 좋은 줄 알아? 그냥 나갈 때가 되면 세상이 망해 버리는 걸 어떻게 해?”

    “아니야!”

    “뭐가 아니야?”

    희나는 악마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방법이 있어! 너랑 나랑 여길 ‘평화롭게’ 벗어날 방법!”

    “어, 어어?”

    악마는 필멸자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박력에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절대 쫄아서 그런 건 아니야.’

    아주 살짝 놀랐을 뿐이지.

    * * *

    세상 최후의 악마가 희나를 타박타박 따라 걸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능력을 이용하면, 여길 나갈 수 있다는 거지?”

    “응. 우리 집에 너랑 비슷한 케이스가 하나 있거든.”

    ‘홈 스위트 홈’ 현관문을 통할 수 있는 건 사람과 물건뿐만이 아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몬스터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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