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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06화 (206/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06화

    * * *

    눈앞이 번쩍, 하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리고 허공에 사무적인 글자들이 떠올랐다. 과포화 상태인 머리는 줄글의 뜻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성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놀랍게 느껴지지 않지?’

    허공에 나타난 시스템 문자도, 각성이란 단어도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희나의 입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 각성?”

    권 과장이 퍼드득 놀라 소리쳤다.

    “뭐? 뭐라고? 클라이언트가 또 뭐라고 했다고?”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끔찍한 일은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고……. 그럼 무슨 일이야, 희나 씨?”

    “갑자기 눈앞에 뭐가 떠서 저더러 각성했다고 하는데…….”

    권 과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 가는데, 누군가가 툭 끼어들었다.

    “아직 클래스는 안 떴어?”

    “어, 아직이요. 시간 좀 걸린다고 뜨네요.”

    “그래? 궁금했는데…… 좀 이른 타이밍이었네, 여기는.”

    “뭐가 일러요?”

    “그런 게 있어.”

    대답하며 희나는 끼어든 남자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낯선데 이상하게 익숙했다.

    ‘옆 부서 직원인가?’

    남자의 존재감은 유독 이질적이었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이내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근 때문에 정신이 없긴 한가 봐. 별생각을 다 하네…….’

    순간이었다.

    “여긴 일만 해서 볼 게 없네. 다음 장면.”

    남자가 대뜸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확 뒤집혔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순간, 눈앞에 흩어진 문자열이 뜨며 현재 상황에 대한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그도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

    희나의 의식은 곧바로 새로운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그걸 시작으로 희나는 수많은 기억 사이를 부유했다.

    청룡 길드 입사, 살림꾼 각성, 공간의 조각을 처음 주웠던 일, 미국 감정 학회 방문, 강진현과의 만남…….

    온갖 기억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희나는 그 안에서 마치 역할극을 하듯 당시의 기억을 재연했다.

    옛 기억을 되풀이하고 할수록, 머릿속 한구석이 몽롱해졌다. 무엇인가가 계속 마모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종래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희나는 변덕스러운 파도에 몸을 맡기듯 기억의 흐름에 정신을 맡겼다.

    간혹 기억은 아주 그리운 추억을 보여 주기도 했으니까…….

    * * *

    “희나야, 사람 많으니까, 엄마랑 오빠 손 꼭 잡고 있어야 해!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가 솜사탕 사 올게.”

    “알았어요!”

    “씩씩하네, 우리 딸.”

    “노란색 솜사탕으로 가져와야 해요!”

    “그야 당연하지.”

    희나의 아빠는 눈을 찡긋하고는 솜사탕을 사러 떠났다.

    놀이동산에 온 아이들 모두 솜사탕을 먹고 싶어 해서일까, 줄이 길어서 꽤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희나와 희원, 엄마도 사람들 틈에 끼어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화려한 치마를 입은 채 빙글빙글 도는 댄서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희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이상했다.

    모양이 맞아서 퍼즐을 맞췄는데, 그림이 맞지 않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인가 이질적인 게 끼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거랑 달라.’

    여기까지 생각한 희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기억은 예전에 해 보았던 일을 떠올릴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희나가 퍼레이드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달리 기억할 거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퍼레이드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희나는 키 작은 여자애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그 여자애가 갑자기 눈에 띈 것도 신기했다.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툭 튀었다고 해야 하나?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다가 희나는 애써 이유 하나를 만들어 냈다.

    ‘주변에 어른이 없잖아? 부모님을 잃어버렸나 봐.’

    묘하게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희나는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 저 다리 아파요. 저기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을게요.”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가 우리를 못 찾을까 봐 걱정돼? 괜찮아. 조금 있다가 저기 뒤에 있는 벤치에서 만나기로 했어.”

    묘하게 대답이 어긋나 있었지만, 희나는 홀로 있는 여자아이에게 반쯤 정신이 팔려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저기 뒤에 있을게요.”

    희나는 엄마에게 마저 속닥이고는 여자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엄마는 희나를 붙잡지 않았다.

    “저기. 너 혼자야?”

    대뜸 손을 붙잡고 묻자, 여자애는 다소 놀란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내가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먼저 다가온다고?”

    “갑자기 손 붙잡아서 기분 나빴어? 미안. 하지만 옆에 어른이 없는 게 신경 쓰여서.”

    희나는 그 애의 손을 붙잡고 사람들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엄마에게 미리 말해 놓은 벤치에 앉았다.

    짧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너도 앉아. 다리 아프지 않아?”

    여자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희나 옆에 앉았다. 벤치가 키에 비해 높은지 올라오는 데 조금 끙끙댔는데,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사람들 많은 곳에 있으면 어른들이 널 찾기 더 힘들어질 거야. 여기에 앉아 있다가 우리 엄마랑 아빠 오면 미아 보호소에 가자.”

    희나는 유치원에서 배운 걸 또박또박 알려 주었다.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었던 걸 남에게 가르쳐 주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한편, 무릎에 턱을 괸 채 희나의 말을 듣던 여자아이가 허리를 폈다.

    그러면서 대뜸 하는 말이 이랬다.

    “넌 어릴 때부터 오지랖이 넓은 편이었구나?”

    “오지랖?”

    어린 희나에게는 조금 어려운 단어였다.

    “남들 일에 관심이 많다고.”

    “아하. 우리 엄마랑 아빠도 그랬어. 남들 도와주는 걸 좋아하니까 훌륭한 사람이 될 거래.”

    기분 좋게 대답하자, 여자아이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그런 뜻 아닌데…….”

    여자애는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했지만, 그보다는 희나가 더 잽쌌다.

    “배고프지 않아? 나는 배고파.”

    “……갑자기?”

    희나는 일곱 살이었고, 한참 대화 주제가 휙휙 바뀔 만한 나이였다.

    “아빠가 솜사탕 사 오기로 하긴 했는데, 그건 달콤하기만 하고 별로 배가 안 차니까……. 내 간식 나눠 줄게.”

    희나는 등 뒤에 맨 작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 동안 뒤적거렸다.

    머리끈, 작은 인형, 이름과 부모님 번호가 적힌 카드, 귀여운 동전 지갑 등등…….

    “그 쪼끄마한 가방에서 뭐가 그렇게 많이 나와?”

    여자아이는 신기하다는 듯 가방 속 내용물을 구경했다.

    “음. 먹을 거가 어딨더라?”

    마침내 희나는 무엇인가를 찾아 꺼냈다.

    “……여깄다!”

    찾아내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실한 사과였다.

    “그 가방 안에 저렇게 큰 사과가 들어갈 수 있다고?”

    “응. 방금 봤잖아. 내 사과야. 오빠가 줬어.”

    희나는 별생각 없이 빨간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언제 받았는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오빠가 희나에게 선물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옷소매로 사과를 반질반질하게 닦은 다음, 여자아이에게 사과를 건넸다.

    “나눠 먹자!”

    “이걸?”

    “응. 너 한 입, 나 한 입. 이렇게 나눠 먹자.”

    “윽. 더러워. 그건 싫어.”

    아이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는 사과를 받아 반으로 쪼갰다. 조그마한 손에서 어떻게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희나는 입을 쩍 벌렸다.

    “와. 너 힘 되게 세다.”

    “그래. 나 힘 엄청 세. 보통 인간들은 한 손가락으로 다 튕겨 낼 수 있지.”

    “응? 그건 무슨 뜻이야?”

    “……사과나 먹으라는 뜻이야.”

    “그래. 고마워.”

    희나는 사과 반쪽을 받아 아그작, 씹어 먹었다. 달콤한 과육이 텁텁하던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 주었다.

    ‘이거, 되게 맛있다!’

    어찌나 맛나던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반짝했다.

    ……그랬다. 헛것이 보일 정도로 사과가 맛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렇게 맛있는 걸, 먹지 않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뭐 해? 안 먹어?”

    “그냥. 너한테나 맛있지, 나는 먹어 봐야 아무 맛도 안 나고 별 의미 없어.”

    “먹는 거 앞에 두고 그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희나는 동그란 눈을 최대한 사납게 치켜떴다.

    그 시선이 얼마나 따갑던지, 아이는 한숨과 함께 사과를 입에 가져다 댔다.

    “어휴. 축제가 신기해서 기억 안 돌리고 봐주는 건 줄 알아.”

    끝까지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나는 오빠가 준 사과를 씹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조그만 앞니로 사과 단면을 조금 갉아 먹었다. 사각, 하고 과육 씹는 소리가 났고…….

    그리고 희나는 빙그레 웃었다.

    사과를 갉작이던 것도 잠시, 아이가 눈을 크게 뜬 채 사과를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사과는 맛있으니까!’

    누군가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늘 흐뭇했다.

    ‘특히 내가 만들어 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제일 기분 좋지…….’

    일곱 살 어린이가 할 수 없을 법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을 때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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