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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03화 (20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03화

    S급 헌터는 전 세계를 통틀어 100명이 채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손발을 맞출 일이 없었다.

    특히 같은 계열의 헌터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 명만 있어도 수십, 아니, 수백의 기량을 보여주었으니까.

    거기다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특출한 개성으로 똘똘 뭉친 터라, 이들을 통솔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해냈지.’

    아말은 지난 몇 개월간의 눈물 나는 기억을 의식 저편으로 던져 넘겼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는데…….’

    아무튼, 중요한 건 S급 헌터만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정예 팀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던전 입장 시 S급 헌터들은 역할에 맞게 각 부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SSS급 보스가 어떤 존재인지는 지금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S급 헌터들의 팀업은 다수의 협공보다 소수 엘리트의 날카로운 공격이 더 효과적으로 먹힐 경우를 대비한 플랜 중 하나였다.

    “연구팀 공지가 내려왔어. 게이트는 이틀에서 사흘 사이에 열릴 거라고 해. 이제 남은 시간은 각자 체력 정비하며 휴식하자고.”

    아말이 손을 휘저으며 해산 지시를 내렸다.

    “지긋지긋한 훈련도 이제 끝이다. 곧 실전이군.”

    헌터들은 굳은 몸을 풀어내며 킬킬거렸다. 긴장은 보이지 않았다. 다가올 전투에 대한 가벼운 흥분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강진현 또한 큰 동요 없이 훈련장을 나섰다. 누군가가 휘익, 휘파람을 불며 소리쳤다.

    “강, 너의 그녀에게 가는 길이야?”

    강진현은 놀림에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무시했다.

    희나는 둘 사이의 관계를 ‘비즈니스적으로’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섬 사람들 모두 S급 헌터와 A급 살림꾼 사이의 러브 라인을 진작 알아챈 지 오래였다.

    아무리 전속 관리사라고 해도 식사 때마다 단둘이 사라지는데,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이상했다.

    하지만 강진현의 눈치가 너무 노골적이었으므로, 희나 앞에서는 아무도 티를 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배짱 좋은 S급 헌터들이나 강진현을 놀려 댈 뿐.

    “참고로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는 거 알지? 찌질해 보이잖아.”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누군가가 툭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쟤를 이해해. 그 솜씨면 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하긴. 생판 남인 우리한테도 근사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데, 애인한테는 얼마나 환상적으로 맞춰 주겠어?”

    그 대화에 강진현의 기세가 순간 거칠어졌다. 옅은 살기까지 섞여 있는 명백한 위협이었다.

    “윽! 깜짝 놀랐잖아!”

    “이봐. 전투 직전에 싸움은 안 된다고. 정 붙고 싶거든 던전 클리어 이후에나 해.”

    한편, 강진현은 몸을 뒤로 돌려 투덜거리는 헌터들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입을 열었다.

    “아니니까, 말조심해.”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나는 희나 씨 능력 때문에 희나 씨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녀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는 거지.”

    그는 거의 짓씹듯 쏘아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데려오고 싶지도 않았어. 위험하니까.”

    베일 듯 사나운 기색에 두 헌터는 진정하라는 듯 워워, 손바닥을 내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는…….”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네가 무례했다.”

    단호한 대꾸에 헌터 하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안해. 생각해 보니 우리가 잘못했네. 교제하는 사인데, 상대를 이용하느니 마느니 했으니 기분이 상할 법도 하지.”

    옆에서 다른 헌터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가?”

    “그래, 이 눈치 없는 자식아.”

    “그럼 나도 사과하지, 뭐.”

    둘은 순순히 사과했다. 잘못도 잘못이거니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괜한 불화를 만드는 것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역시 남의 애정사에는 함부로 말 얹는 게 아니었다.’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강진현은 휙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희나 씨가 보고 싶다.’

    그는 거의 날듯이 뛰었다. 희나는 숙소 뒤편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강진현은 작게 인기척을 내며 희나의 등 뒤에 섰다.

    “희나 씨.”

    희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 왔어요? 오늘 일찍 끝났네요! 마지막 훈련 날이라서 그런가?”

    강진현은 그런 희나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눈높이가 맞아떨어졌다.

    돌발 행동에 놀란 듯, 희나가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었어요?”

    강진현은 고개를 저으며 희나의 손등에 제 이마를 문질렀다.

    “희나 씨, 좋아합니다.”

    대뜸 나온 고백에 희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저도 좋아해요, 진현 씨.”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희나 씨가 어떤 사람이었더라도 저는 당신을 사랑했을 겁니다.”

    갑자기 이렇게까지 열렬한 사랑 고백을 듣게 될 줄이야. 희나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고마워요. 저도 그래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갑자기 이러니까 불안해지잖아요.”

    며칠 후면 게이트가 열리고, 그는 던전에 입장할 테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희나는 강진현의 고백을 그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꼭 마지막 인사 같잖아.’

    책이나 영화에서 보면, 꼭 이런 대화를 하고 난 후에 둘 중 한 명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강진현이 작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은 내려놓으십시오.”

    “마음처럼 그게 쉽게 되나요? ……근데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 맞아요?”

    끈질긴 추궁에 강진현이 잠시 머뭇거리다 방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전부는 아니고, 적당히 각색해서, 마치 대화가 아주 평화롭게 이루어졌던 것처럼.

    “……그래서 희나 씨가 혹시나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서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희나 씨를 좋아합니다.”

    목소리에 진솔함이 담뿍 담겨 있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당초 희나는 그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해 본 적조차 없었다!

    “알아요. 진현 씨를 보면 모를 수가 없는걸요.”

    희나를 바라보는 눈빛, 대하는 몸짓, 꺼내는 말씨 하나하나에 애정이 가득한데,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을 리가.

    그건 강진현의 애정에 대한 모독이었다!

    “참고로 저는 제가 살림꾼이라서 좋아요. 진현 씨에게 많은 걸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인정받고 싶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에요. 물론 일적으로 제가 진현 씨를 챙겨야 하는 사이는 맞지만…… 그거보단 그냥 좋아하는 상대니까 잘해 주고 싶은 거라고요.”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희나도 자기의 헌신이 의무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아, 그리고 누가 그 얘기 했는지 슬쩍 귀띔해 줄 수 있어요? 그 사람들 간식에 몰래 고춧가루라도 넣어 놔야겠어요.”

    슬쩍 너스레를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진현은 빼지 않고 귀엣말로 두 사람의 이름을 고자질했다.

    꼭 복수해 달라며 속닥거리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귀엽게 느껴져서, 그리고 귓가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서, 희나는 한참 동안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연인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두 손을 맞잡은 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색이가 보았다면 아마 「♡♥염병♥♡」이라고 평할 만한 광경이었다.

    * * *

    게이트가 열렸다.

    무려 SSS급 던전으로 통하는 게이트였다.

    엄청난 랭크의 던전인 만큼, 게이트의 크기도 거대했다.

    거대한 게이트 앞에 헌터들이 모였다.

    수많은 국가에서 모인 만큼 그 수도 어마어마했다.

    2000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이었다. 이 헌터들 모두 A급 이상으로, 내로라하는 실력자였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희나는 마음을 스스로 다잡았다.

    사상 최대 규모의 토벌대였다. 수적으로나, 무력으로나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다.

    사기를 북돋는 연설이나 함성 따위는 없었다.

    대신 어디선가에서 외친 “진입!” 소리와 함께 각 팀이 열을 맞추어 차례로 던전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희나는 저 멀리 서서 헌터들이 하나둘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던전에 입장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희나는 게이트 앞, 텅 빈 공터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이 가득했는데…….’

    그리고 이들은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기 전까지 던전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보스 몬스터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을 테니까.

    묘한 불안감에 휩싸여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손뼉을 크게 쳤다.

    “자, 배웅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합시다.”

    그제야 사람들은 마법이 풀린 듯,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휴, 시끄러운 사람들이 단박에 사라지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다들 별일 없이 돌아오겠지. 입만 산 인간들은 아니니까.”

    “빨리 끝내고 돌아오면 좋겠네. 이놈의 섬 생활도 지치고 질려.”

    다들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긴장을 털어 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게이트 밖을 지키며 떠난 이들이 무사 귀환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진현 씨는 금세 돌아올 거야. 강한 사람이니까.’

    희나 또한 마음속으로 연인의 안전을 간절히 기원했다.

    * * *

    쾅!

    희나는 문을 세게 밀어 닫았다. 현관이 흔들릴 정도로 거친 손길이었다.

    평소라면 튀어나와 「주택을 소중히 여깁시다!」하고 주택 사랑 캠페인을 벌였을 오색이는 그저 안테나를 불안하게 비비 꼬며 희나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여기도 아니야!”

    희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현관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트리플 S급 던전 클리어를 위해 토벌대가 떠난 지 벌써 두 달째였다.

    그러니까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 간 지가 벌써 두 달째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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