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201화
가장 먼저 갑갑하게 닫혀 있던 창문부터 죄다 열었다. 다음으론 실내의 테이블과 의자를 한쪽으로 다 몰아넣었다.
힘이 꽤 드는 일이었지만, 파비안과 제이, 몇몇 처음 보는 헌터들이 도와주었으므로 금세 끝낼 수 있었다.
‘내가 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그들은 자기가 왜 초면의 자그마한 여자가 시키는 대로 테이블과 의자를 나르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몸을 움직였다.
‘전투 중에 지휘관 명령 듣는 것 같은 느낌인데.’
청소를 지휘하는 희나의 목소리에는 묘한 카리스마가 어려 있었다. 심지어 A급 이상의 상급 헌터들까지 말려들어 갈 정도로!
희나는 사람들을 시켜 커다란 폐기물들을 내다 버리게 했다.
헌터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쓰레기를 가져다 버리는 사이, 희나는 가히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휴게실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청소 도구는 인벤토리에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꺼내어 몸만 움직이면 됐다.
‘자잘한 건 나중에 하면 되니까, 우선 급한 천장이랑 바닥부터 처리하자.’
먼지떨이로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털어 내고, 빗자루와 대걸레로 바닥을 쓸고 닦았다.
D급 살림꾼인 이희나였다면 한참이 걸렸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희나는 D급이 아닌 A급 살림꾼이었으므로 이 정도 일은 비교적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희나의 지휘대로 대형 폐기물들을 버리고 온 헌터들은, 휴게실 구석구석에 모여 청소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오……. 걸레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 색깔이 변해.”
“광이 나는군.”
“여기가 이렇게 밝은 공간이었던가?”
그들은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는 휴게실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묘한 쾌감까지 느껴졌다.
희나는 반쯤 넋 놓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계속 구경하고 계실 거면, 힘 좀 빌려주실래요? 저거 책상이랑 의자 좀 다시 배치해 주세요. 바닥 청소 대충 다 끝났으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헌터들은 우르르 몰려가 한쪽에 몰아 둔 가구들을 제자리에 옮겨 두었다.
“심심하면 테이블이랑 의자도 좀 닦아 주실래요?”
“어어? 네, 네에.”
거기다 희나에게 물티슈도 받아 더러운 가구를 박박 닦았다.
“남은 분들은 창틀도 좀.”
“아, 알겠습니다.”
손이 빈 사람들은 창틀 청소를 배정받았다.
요령은 없었지만 다들 힘이 좋아서 그런지 찌든 때 하나는 정말 잘 벗겨 냈다.
마침내 희나는 손뼉을 짝짝 치며 ‘청소 끝!’ 사인을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해 주신 덕분에 아주 깨끗해졌네요!”
헌터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휴게실을 두리번거렸다.
“그 더럽던 곳이 이렇게 변했단 말이야?”
“못 알아보겠는데?”
“이상하게 개운한 기분이 들어…….”
주된 청소야 희나가 다 했지만, 다들 조금씩 손을 얹었기 때문인지 굉장히 뿌듯해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제멋대로인 헌터들이 이렇게까지 협조해 줄 줄은 몰랐다.
희나는 고마움에 꾸벅꾸벅 인사와 악수를 나누다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들 수고하셨는데, 뭐라도 드려야겠어요.”
희나는 사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숙소에 다녀왔다.
다시 휴게실에 들어온 희나는 손에 노란색 커피 믹스 다발을 잔뜩 쥐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차인가? 아니네. 커피라고 쓰여 있네.”
제이는 희나 옆에서 믹스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관찰했다.
희나는 휴게실 한구석에 비치된 종이컵에 커피 믹스를 탁, 털어 넣고는 뜨거운 정수기 물을 부었다.
다년간의 탕비실 생활을 통해 희나는 어느 컵이든 커피 믹스 물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희나는 믹스 커피를 스무 잔 가까이 야물딱지게 타서 사람들에게 돌렸다.
“수고했으니까 한 잔씩 드세요. 원래 일하고 나서는 달달한 걸 먹어야 제맛이래요. 참고로 이상한 거 아니에요. 단 커피예요.”
사람들은 ‘이게 무엇인가’ 하는 표정으로 희나가 준 음료를 내려다보다, 한 모금 맛봤다.
그리고…….
“오.”
“맛있어!”
“맛 밸런스가 환상적인데!”
이내 다들 반짝이는 눈을 하고 따끈한 음료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희나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믹스 커피 싫어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지. 그것도 청소 후에 먹는 믹스 커피는…… 크! 최고!’
원래도 달달한 맛으로 중독성 있는데, 희나의 ‘손맛’ 스킬까지 들어갔으니 맛 하나는 보장할 수 있었다. 까다로운 헌터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대체 이 단맛은 뭐야? 혀에 착착 감기는데?”
“크……. 맛있다.”
“일반 공산품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거지?”
커피 믹스 한 잔을 다 마시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들 아쉬운 듯 입맛을 짭짭 다시며 빈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혀끝에 남은 여운을 즐기는 듯 잠시 침묵이 스쳤고, 이내 누군가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이거 이름이 뭡니까?”
이를 시작으로 다들 앞다투어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하나 더 먹고 싶은데…… 더 없어요? 돈은 드릴 수 있는데.”
“청소하면 또 주는 거예요? 여기 위층도 청소할까요?”
반응이 상상 이상으로 후끈했다. 희나는 커다란 헌터들을 살살 진정시켰다.
“오늘은 이게 끝이고, 나중에 기회 되면 한 잔씩 더 타 드릴게요. 저도 그렇게 많이 가져온 게 아니라서요.”
헌터들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희나에 대한 호기심은 가라앉지 않았는지, 툭툭 질문을 던졌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난 살면서 청소를 그렇게 시원하게 하는 건 처음 봤어요. 거기다 헌터들을 손끝으로 부리는 비전투계 각성자도 처음 봤고.”
“아……. 저는 한국에서 온 이희나고, 헌터 관리 차원에서 따라왔어요. 청소나 요리 같은 살림 관련 스킬이 있거든요.”
“그럼 방금 마셨던 커피도 그쪽 스킬 때문에 맛있었던 겁니까?”
“그 영향도 좀 있긴 있을 거예요.”
“신기하네. 클래스가 뭔지 물어봐도 돼요?”
“살림꾼이에요. 나름 히든 클래스랍니다.”
희나는 키득거리며 자기 클래스를 밝혔다.
예전에는 별 볼일 없이 우습기만 한 클래스라고 생각해서 밝히기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자랑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의 질문에 하나둘 대답해 주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배가 고파 오기도 했고, 슬슬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파비안과 제이가 숙소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희나는 홀로 걸으며 오늘 만났던 이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재미있었어. 우리 청룡 길드원들만큼이나 순하고 착한 사람들인 것 같아. 강하고, 믿음직해 보이기도 했고.’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앞으로 여기서 지낼 3개월은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따라오길 잘했어. 한국에 남아 있었으면 불안해서 발만 동동 굴렀을 거야.’
조금 충동적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훨씬 안심이 됐으니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희나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엄마얏!”
……그리고 거의 매번 그래 왔듯, 희나는 놀라면 주먹부터 나가는 타입이었다.
휘익! 손바닥이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상대는 아주 익숙하게 희나의 일격을 피해 냈다.
“제가 또 놀라게 했나 보군요.”
강진현이었다.
희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그를 흘겼다.
“기척 좀 내고 다녀 주세요! 진현 씨는 너무 조용하게 불쑥불쑥 나타나요!”
덕분에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상대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계속 들키게 되지 않는가!
희나는 진짜 속내는 꿀꺽 삼키며 물었다.
“아까 민아 언니는 관리자 회의 있다고 나갔는데. 진현 씨도 회의 다녀왔어요?”
“예. 방금 끝났습니다.”
“무슨 얘기 들었어요? 이런 건 기밀인가?”
“딱히 기밀이랄 건 없고…… 사고 치지 말라는 말들을 길게 늘여서 하더군요.”
“하하. 헌터들이 꽤 사고뭉치긴 하죠.”
희나와 강진현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현은 파비안을 만났다는 이야기에 이마를 찌푸렸고, 휴게실에 갔다가 저도 모르게 청소를 해 버렸다는 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 청소를 도와준 헌터들에게 커피를 타 주었다는 말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따라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요?”
희나의 은근한 물음에 강진현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한 일 때문에 희나 씨가 번거롭게 되겠구나…… 싶어서 그렇습니다.”
“번거로웠구나, 도 아니고 번거롭게 되겠구나, 는 뭔가요?”
“그야 사람들이 희나 씨의 가치를 알아보았으니 사탕에 붙은 개미 떼처럼 달라붙으려 할 텐……”
강진현이 줄줄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기에, 희나는 머리를 크게 휘저었다.
“아니에요! 진현 씨는 괜한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제 걱정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강경한 답변에 희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말릴 수가 없어요, 정말.”
하지만 강진현의 쓸데없어 보였던 걱정이 정말 사실이 될 줄은, 희나는 정말로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