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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00화 (200/228)

던전 안의 살림꾼 200화

희나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온 건 신문지 뭉치였다. 주먹 두 개만 한 무엇인가가 신문지에 둘둘 말려 있었다.

“이런 건 넣은 적이 없는데…….”

의아해 포장을 풀어 보니, 먹음직스러운 사과 한 알과 함께 포스트잇이 탁 붙어 있었다.

-얼마 전 사과나무에 첫 열매가 열려서 넣는다. 물론 사과할 일은 없으니 사과한다는 뜻은 아님.

(사과해야 하는 건 희나 너야! 의논도 없이 혼자 그런 일을 결정해?)

아무튼…… 위험한 일 생기면 앞뒤 상관하지 말고 능력 써서 집으로 도망 올 것. 등 뒤에 벽 두고 다녀라.

희원의 글씨체였다.

희나는 피식 웃으며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먼 곳에 가는데 화해하지 못한 걸 신경 쓰는 건 희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치, 난 언제든 집에 들를 수 있는데.”

‘홈 스위트 홈’ 스킬이 있으니 언제든 만나 서운한 걸 풀어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화해를 먼저 청해 준 게 고마웠다.

‘사실 내가 억지를 부리긴 했지.’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희나는 희원의 사과를 재빨리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누구세요?”

“나예요, 희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익숙했다. 희나는 깜짝 놀라 문을 벌컥 열었다. 잘생긴 금발 머리 남자가 씨익 웃고 있었다.

“파비안 앳킨스? 그쪽도 파견 온 거예요? 아니, 그보다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아까 하선하는 걸 봤어요. 사실 희나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이기에 찾아왔죠.”

“오래간만이네요. 나도 반가워요.”

“그나저나 희나, 이 밖에서 같이 산책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계속 이렇게 숙녀들 방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보기에 썩 좋을 것 같진 않아서.”

희나는 주둔지를 소개해 주겠다는 파비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예전에야 그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겼지만, 사정을 완전히 알고 난 지금은 처음처럼 파비안이 불편하지 않았다.

“요즘 그……분은 어때요?”

목소리를 낮추어 동생의 안부를 묻자,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나빠지지도 않았어요.”

“다, 다행이네요.”

“그렇죠. 마석을 다 모을 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파비안은 식물인간 동생을 위해 A급 보스 마석 500개를 모으고 있었다.

“마석은 많이 모았어요?”

“꽤 많이 모았죠. 있는 돈, 없는 돈 다 처분해서 싹싹 끌어모았으니까요.”

파비안은 이제 자기는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희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SNS만 보더라도 파비안 앳킨스 때문에 A급 보스 마석이 씨가 말랐다며 우는소리가 자자했다.

“그래도 이번 토벌전만 끝내면 500개, 다 모으게 돼요.”

그는 정부에서 부족한 마석을 지급받는 대신 이번 SSS급 던전 토벌에 참여했다고 했다. 한국은 반 징집이나 다름없었는데, 미국은 또 상황이 달랐나 보다.

“축하해요.”

“물론 전투에서 살아 나와야 동생을 볼 수 있겠지만요.”

킬킬거리며 살벌한 농담을 하기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이번엔 진현 씨도 전투 참가한단 말이에욧!”

“어이쿠. 무서워라.”

파비안은 익살을 부리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어째 더 얄미웠다.

“당연히 살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여기 참가했죠. 희나의 달링도 무사할 거예요.”

“다, 달링이라니…….”

예상치 못한 공격에 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진현과 연인이 된 지도 거의 반년이 다 되어 갔지만, 이렇게 닭살 돋는 호칭을 떠올린 건 처음이었다.

파비안은 눈치 좋게도 희나의 표정을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설마, 아직 서로 희나 씨, 진현 씨, 하고 부르고 있는 거예요? 말도 안 돼.”

“그럴 수도 있죠! 이름만 불러도 애정은 추, 충분히 전달되거든요!”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지만, 파비안은 빙글빙글 웃으며 놀려 댔다.

“세상에. 허니, 달링, 쿠키, 젤리…… 이렇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많은데.”

“쉬, 쉿. 조용히 하세요. 우리 사귀는 거 비밀이란 말이에요.”

파비안은 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터지기 직전이 되고 나서야 놀림을 멈췄다.

“알았어요. 그래도 언제 한 번쯤은 스위트하게 불러 봐요. 처음에야 민망하지, 무지 좋아할걸요.”

둘은 이러니저러니 말을 주고받으며 주둔지를 한 바퀴 돌았다. 숙소동, 관리동, 훈련동, 연구동 등이 나누어져 있었다.

“여기가 다는 아니고, 다른 곳도 있는데 거기도 여기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급하게 지은 곳이라 별로 볼 건 없더라고요.”

파비안은 별 볼일 없다고 평가했지만, 희나에게는 모든 게 신기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헤이! 파비안 앳킨스! 파브!”

누군가가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파비안을 불렀다.

“아, 제이. 오래간만이야.”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성이 훌쩍 다가와 파비안과 하이파이브했다.

“너 요즘 마석 모은다며? 값 잘 쳐준다고 들었는데.”

“아. 그거.”

“괜찮은 거 하나 생겼는데, 어때?”

“이제 필요 없어.”

“뭐? 그런 게 어딨어?”

“내 맘이야. 질렸거든.”

파비안은 더는 관심 없다는 듯 깔끔하게 양손을 탈탈 털어 보였다.

제이라고 불린 여자는 아쉽게 구시렁거리다 희나를 턱짓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여긴 누구야? 한동안 조용하더니, 새 애인?”

물음에 희나는 벌컥 소리쳤다.

“절대 아니에요!”

파비안 앳킨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절대 싫었다!

‘파비안 앳킨스 여자 친구 리스트에 등재된다니, 최악이야!’

희나는 조신하고 다정한 남자가 좋았다. 예를 들어 강진현 같은 남자 말이다.

“파비안 씨랑은 어쩌다 알게 된 사이일 뿐이에요. 절대, 절대, 절대, 말하신 것 같은 관계는 아니고요. 거기다 저는 애, 애, 애인도 있다고요.”

“그래? 아니면 말고.”

제이는 순순히 의심을 거두었다. 첫 질문이 좀 무례하긴 했지만, 별뜻은 없었던 것 같았다.

“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닌가?”

그저 옆에 있던 파비안만이 희나의 반응에 조금 상처받았을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나는 손을 내밀어 제이와 악수했다.

“제 이름은 이희나예요. 한국에서 왔고요, 헌터 상태 관리 겸 비전투계 보조 요원으로 왔어요.”

“반가워요. 나는 제이고, 미국 출신. 공격계 헌터예요. 여기 파브랑은 안 지 꽤 된 사이고요. 물론 나도 그렇고 그런 사이는 절대 아니랍니다.”

옆에서 파비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와, 천하의 파비안 앳킨스가 이렇게 홀대당하는 순간이라니. 가슴이 아프네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해서 희나는 속으로 웃음을 꾹 눌러 삼켜야 했다.

제이는 말도, 호기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희나가 소문의 SSS급 신문지의 주인이란 사실을 듣고 굉장히 재미있어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구경 다 끝났다고 했죠? 그럼 휴게실 가서 같이 얘기해요. 앞으로 석 달은 여기서 지낼 텐데, 다른 사람들도 소개해 줄게요.”

“좋아요!”

사람들 사귀는 걸 좋아하는 희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희나는 제이를 따라 커다란 건물에 도착했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주위 건물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건 예전부터 있던 건물이라서 그래요.”

예전 연구팀이 머물렀던 건물이었다고 했다. 희나는 건물을 이리저리 살피곤 평했다.

“좀…… 헐었네요.”

“휴게실이니까요.”

“아……. 휴게실이라서.”

이젠 희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사고뭉치 헌터들이 사용하는 휴게 공간이니, 언제든 무너져도 상관없는 공간을 배정했다는 뜻이었다.

‘하긴. 우리 길드도 한 달에 한 번은 뭐가 부서져 나가니까.’

희나가 온 후부터는 사고 횟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지만, 청룡 길드 헌터 휴게실도 꾸준히 리모델링을 거듭하고 있었다.

건물에 입장하니, 사람들 열댓 명 정도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광경이었고…….

“……뭐 이렇게 더러워요?”

실내는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잔뜩, 바닥에는 흙먼지가 굴러다녔다.

벽과 바닥에는 풀인지, 곰팡이인지, 얼룩인지 모를 시커먼 무엇인가가 고여 있었고, 의자와 테이블도 때가 꼬질꼬질 끼다 못해 회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말 그대로 ‘불결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런 데 있다가는 없던 병도 생기겠어!’

어느 정도였냐면, 희나의 첫 번째 ‘홈 스위트 홈’ 주거지였던 더러운 원룸만큼이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희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존재했다니. 안 돼. 이런 곳은 용납할 수 없어.”

살림꾼…… 아니, 살림꾼이기 이전에 인간 이희나로서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참상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좀 허름하긴 하지.”

“바깥이 더 나으려나?”

“하지만 햇빛이 너무 강한걸.”

파비안과 제이는 시시각각 변하는 희나의 표정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들도 최소한의 위생 관념은 있었으므로 여기가 썩 깨끗하지 못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던전 공략 중에는 이보다 더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지내기도 하므로, 이 정도는 적당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꼭 휴게실에서 얘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다른 곳으로 이동합시다.”

파비안의 제안에 희나는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며 허리 위에 주먹을 얹었다.

“이렇게 더러운 곳을 그대로 놔둘 순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요?”

순간, 파비안과 제이는 희나의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이글이글, 뜨거웠다.

“그야 치워서 깨끗하게 만들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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