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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93화 (19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93화

    * * *

    “으흠흠.”

    산더미처럼 유부 초밥을 만들었다. 커다란 통에 꾸역꾸역 쑤셔 넣으니 네 통 반이나 나올 정도였다.

    길드원들의 친절에 감동받아 평소보다 손이 훌쩍 커진 덕일 것이다…….

    청룡 길드 인트라넷 게시판에 공지도 하나 올려 두었다.

    [10층 회의실 1010호에 간식 먹으러 오세요!^^ (오늘의 메뉴: 유부 초밥!)]

    외부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10층 회의실을 빌려 유부 초밥을 나누어 주기로 했다.

    공지를 올린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삼삼오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인당 두 개씩만 나누어 주었는데도, 준비해 온 유부 초밥은 금세 동이 났다.

    “이잉……. 나도 먹고 싶었는데.”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요. 오늘은 이게 끝이네요.”

    희나는 숫제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구는 헌터들을 잘 도닥여 보내고는 짐을 정리했다.

    빈 통을 차곡차곡 쌓아 끌차에 싣고 끌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현 씨가…… 9층에 있다고 했던가?’

    사실 유부 초밥이 다 떨어졌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강진현 용으로 준비해 둔 특별 도시락 한 통이 남아 있었다.

    ‘연락도 안 되고. 많이 바쁜가 봐. 9층에도 없으면 사무실에서 진현 씨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콘퍼런스 룸에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강진현이 여기에 있나,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히익!”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점프할 뻔했다.

    쾅!

    희나는 쾅, 닫은 문을 등 뒤에 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바,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이었다.

    ‘내가 본 게 맞으면 길드에 연락을……, 아니, 112? 119? 어디부터 연락해야 하는 거지?’

    희나는 손을 발발 떨며 회의실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헉.’

    아까 봤던 게 정확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 사람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허둥지둥 쓰러진 사람에게 달려가 말을 걸었다.

    “저, 저기요! 괜찮아요? 살아는 있는 건가요?”

    다행스럽게도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아, 숨은 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정신이 드세요? 네?”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다 안 되겠다 싶어 휴대전화를 꺼내 들던 참이었다.

    “끄…… 끄으으.”

    테이블 위에 드러누운 남자가 괴상한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헉. 정신이 드세요?”

    “거긴 누구……?”

    “저는 청룡 길드 소속 직원이에요. 불편한 부분 있으신가요? 지금 당장 의무과 연락해 드릴게요. 아니면 응급차 부를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흐린 눈을 끔뻑였다. 이내 그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경악했다.

    “의무과? 응급실? 그건 왜…… 으허억? 이게 뭐야? 아니, 뭔 코피를 이렇게……!”

    그러면서 코를 꽉 막았다.

    자세히 살피니 코 주변이 유독 시뻘건 게, 정말 코피가 맞는 것 같긴 했다.

    ‘근데 인간이 코피를 저 정도까지 흘릴 수 있는 건가?’

    희나는 경악하면서도 착실히 상황을 파악하고, 친절히 말을 내뱉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물티슈라도 드릴까요?”

    “……커흑. 감사합니다.”

    남자는 코맹맹이 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의 양쪽 콧구멍에는 돌돌 만 휴지가 박혀 있었다.

    “의무실 안 가 봐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뭐 빈혈, 이런 거 오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자던 도중에 코피가 터져서 심해 보이는 거지 이 정도는 매사 자주 흐, 흘립니다. 하하!”

    “그, 그런가요?”

    “네! 코피 때문에 옷이 안 더러워진 게 천만다행이네요. 여분 옷은 더 안 들고 왔거든요.”

    남자는 물티슈로 얼굴을 박박 닦았다. 핏자국이 남아 벌겋던 민낯이 비로소 깨끗이 드러났다.

    ‘어쩜……. 사람이 이래?’

    희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코피를 잔뜩 흘린 사람답게 굉장히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저 정도면 거의 시체…….’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게 굉장히 병자 같아 보였고, 눈 밑은 시커먼 게 판다가 따로 없었다.

    심지어 볼은 움푹 파여 있는 데다가, 몸은 비쩍 말라서 비루먹은 당나귀 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건가요?”

    어찌 밥 한술 못 먹은 얼굴을 한 자가 희나의 구역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살림꾼으로서…… 아니, 그전에 밥심의 민족인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좀 앉아 있어 보세요.”

    희나는 부산스럽게 끌차에 매단 짐가방을 뒤졌다.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 하나가 나왔다.

    ‘이건 진현 씨 용으로 따로 싼 거긴 한데…….’

    잠시 고민스럽게 도시락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진현에게는 돌아가서 직접 따뜻한 밥을 먹여 주면 된다.

    이 불쌍해 보이는 남자에게 밥을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희나는 남자가 흘렸던 코피의 양을 떠올렸다.

    ‘청룡 길드 안에서 살인 사건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이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는 사람에게 무엇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욕구가 펄펄 날뛰었다.

    “여기, 이거 드세요. 물도 챙겨 왔으니까 이거 마시면서 천천히…….”

    자기 앞에 척척 차려지는 반듯한 도시락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런 걸 제가 먹어도 되는 겁니까?”

    누가 보아도 정성 가득 들여 만든 특별한 도시락이었기 때문이다.

    “네. 드세요.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뭐라도 빨리 먹어서 기력 보충을 해야죠.”

    “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아…….”

    남자는 젓가락을 들어 홀린 듯 유부 초밥을 집어 들었다.

    참고로 강진현의 유부 초밥에는 특별히 참치 마요가 듬뿍 올라가 있었으므로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

    음식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그도 잠시, 남자는 게 눈 감추듯 커다란 도시락 한 통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크허, 배부르다!”

    그는 마지막 한 입을 완전히 씹어 삼키고는 책상 위에 축 늘어졌다.

    “목은 안 메어요? 물도 좀 드시지.”

    손수 끓인 미지근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네자 남자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물을 덥석 받아 마셨다.

    “……어떻게 물맛까지 완벽할 수 있지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닌데. 내 꿈이라면 삼각 김밥이나 컵라면을 먹고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말하니 그가 한층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안쓰러움을 담아 찬찬히 설명했다.

    “꿈 아니에요. 현실이에요. 방금 거의 빈사 상태 수준으로 코피를 흘리다가 일어나셔서 제가 싸 온 도시락 드신 거예요.”

    “아……. 꿈이 아니군요. 너무 꿈같은 일이 벌어져서 제가 헛소리를.”

    남자는 자기 머리를 툭, 치고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이고, 제 이름은 한우섭입니다! 제가 염치가 없었네요.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도 못 차리고…….”

    한우섭은 옷매무시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 아니었으면 진짜 시체로 오인해 신고당할 뻔했네요. 밥도 너무 맛있게 얻어먹었고요.”

    “괜찮아요. 지금은 아까보다 나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좀비 같았던 한우섭이 이제 좀 사람처럼 보였다.

    “제 이름은 이희나예요. 청룡 길드 소속이고요. 제가 얼굴 모르는 걸 봐선 다른 길드 소속인 것 같은데…… 혹시 소속이 어떻게 되시는지?”

    조심스럽게 묻자, 한우섭이 정장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한국 던전학회에서 나왔습니다.”

    흰 명함 위에는 ‘한국 던전학회 차석 연구원 한우섭’이라고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아. 던전학회 분이시구나…….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데 쓰러져 계시게 됐나요?”

    아무래도 다른 사업장 회의실에 드러누워 코피를 흘리는 건 보통 사람이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한우섭이 민망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게…….”

    한우섭은 오늘 행사 세미나를 진행하기 위해 파견된 연구원이었다.

    그는 아주 ‘약간의’ 과로기와 ‘약간의’ 무대 공포증이 있었으므로 세미나 직전에 인적 드문 회의실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자 했다.

    “……그러다 긴장이 풀려서 잠들게 됐는데, 제가 또 코피도 자주 흘리는 체질이라서요. 자는 사이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을 줄은.”

    자주 있는 일인 듯, 익숙하게 코 밑을 훔치는 모습이 이상하게 안쓰러워 보였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시간이……. 아이고! 30분 후에 세미나 시작이네요.”

    한우섭이 허둥지둥 여기저기 널린 짐을 챙겼다.

    “어째 도움만 잔뜩 받아 두고 염치없이 떠나는 것 같은데……. 번호라도 주시면 나중에 사례하겠습니다.”

    그는 부득불 희나의 번호를 얻어 몇 번이고 허리를 굽신굽신 굽히며 떠났다.

    “세미나 잘하시고요.”

    희나는 그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었다.

    한우섭이 자리를 뜨자마자, 휴대전화가 우우웅 진동했다.

    “앗. 진현 씨네.”

    어쩌다 보니 강진현에게 주려던 도시락을 남에게 주어 버린 상태였으므로 뜨끔하여 연락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현이 회의실에 도착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다, 멈칫했다.

    “피 냄새가 나는데요. 희나 씨,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이크. 설마 한우섭 씨 코피 냄새 맡은 거야?’

    그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닌가? 진현 씨가 느낄 정도로 한우섭 씨가 코피를 철철 흘려서 그런 걸지도.’

    뭐, 사실 어느 쪽이 되었건 상관없었다.

    낯선 피 냄새 때문에 염려하는 강진현을 도닥여 주는 일이 더 먼저였다.

    “저 괜찮아요. 피 냄새는…… 제 피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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