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92화
권다혜가 입술을 내밀었다. 희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너무 사람 좋게 구는 게 문제였다.
‘물론 그런 점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사려 깊음, 다정함이 좋았다.
“강진현 헌터님은 청룡에서 꽤 높은 사람이잖아요.”
강진현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러니까 이거 좀 어떻게 해 줄 수 없어요?”
“네 말대로 조치가 필요할 것 같네.”
* * *
알람도 울리기 전, 새벽 일찍 눈을 반짝 떴다.
“아, 개운해!”
어제 의무실에서 내리 네 시간 넘게 잤는데도 밤잠은 또 어찌나 잘 오던지.
한편으론 저녁 늦게 자신이 깰 때까지 기다려 준 강진현을 생각하니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이참. 30분만 눈 감겠다고 했는데. 피곤해 보인다고 계속 재우다니.’
왜 그랬냐며 눈을 흘기긴 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건강을 챙기라며 촉촉한 눈빛 공격을 사정없이 퍼부으니, 없던 서운함마저도 싹 다 풀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진현 씨 덕분에 컨디션은 완전히 회복했네.”
어제 부어라 마셔라 했던 고등급 포션들 덕인지 몸 상태도 뻐근한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오늘 진짜…… 본때를 보여 줄 거야.”
희나는 주먹을 꽉 쥐고 전의를 다졌다.
마음 같아서는 미화팀 누구 말대로 사고뭉치 헌터들 엉덩이라도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환경 미화팀은 비각성자거나, 비전투계 각성자들만 모인 팀이었으니까.
‘그저 팀 이름처럼 엉망진창이 된 건물을 처리하는 수밖에…….’
……라고 생각했더랬다, 희나는.
미화팀 팀원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오늘은 이상하게 일이 없는데요?”
“그러게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사고 안 터지는 날은 드문데. 행사 날이 아니라 평소에도 두어 번은 난리 나잖아요.”
“호출기가 고장 났나?”
“할 일 없으면 평소대로 각자 구역 맡아서 정리하고 있지?”
김화순 미화팀장의 제안에 사람들이 끙차, 일어나 뿔뿔이 흩어졌다.
희나도 조금 아쉬워하며 해산했다.
‘에이. 집에서 청소 아이템도 준비해 왔는데. 오늘은 쓸 일이 없네.’
홈 스위트 홈 레벨 업을 하며 랜덤 뽑기로 얻게 된 청소 도구들까지 챙겨 온 차였다.
어제처럼 정신없이 바쁜 것보다야 한가한 게 훨씬 나았지만, 잔뜩 각오하고 왔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다소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오늘은 뭘 한담? 다혜는 오늘 보충 수업 때문에 늦는다고 했고, 진현 씨는 새벽부터 바쁜 일이 있다고 먼저 나섰고.”
졸지에 한량이 되어 버렸다.
희나는 어슬렁어슬렁 길드를 배회했다.
소란을 눈치챈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라? 무슨 일이지? 싸우나?’
그와 동시에 공기가 우웅, 울렸다. 기운이 격돌하는 게 피부로 직접 느껴질 정도였다.
‘싸우는구나.’
역시, 헌터들이 모인 곳이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이제 곧 벽이 부서지거나 바닥이 파이거나 둘 다가 되거나…… 아무튼 난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소란의 중심에 있는 건 두 헌터였다.
무어라 드잡이를 했는지, 둘 다 기색이 몹시 사나웠다.
그중 인상이 더 나빠 보이는 쪽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개새끼야, 꼬우면 덤벼.”
“너야말로 눈치 보지 말고. 선공은 이 형님이 양보하마.”
“뭐라고? 이……!”
침 뱉은 쪽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위기는 극도로 날카로워졌고, 두 헌터의 신형이 일그러지며 맞붙으려는 순간이었다.
퍽! 퍼억!
어디서 물주머니 두 개가 터지는 소리가 났고, 어느새 두 헌터는 나란히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다.
희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상황 파악을 못 한 건 두 헌터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 씨! 누구냐? 어떤 놈이 끼어들었어?”
“접니다.”
헌터는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이 새끼, 너도 아주 본때를 보여 주……울 생각은 없고요.”
순식간에 헌터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 까닭은…….
‘진현 씨다!’
이 싸움에 끼어든 게 바로 S급 헌터인 강진현이었기 때문이다.
두 헌터는 강진현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한다면 덤벼도 좋습니다.”
“아뇨. 전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강진현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두 헌터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제가.”
“넵!”
“제가, 오늘 아침에 한 번만 더 소란 피우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합니까?”
물음에 두 헌터는 사색이 되어 빠릿하게 대답했다.
“주,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진현의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 헌터 중 하나가 침 뱉은 자리였다.
“바닥에 쓰레기 버리거나 침 뱉으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는지도 기억합니까?”
“관절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는 사이, 강진현의 뒤에서 청룡 길드 헌터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마치 동네 양아치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아는 놈들이, 이 소란을 피워? 엉?”
“우리 구역에서 난리 치는 거, 안 봐준다고 했지? 어엉?”
짝짝 껌까지 씹는 게 보통 건달이 아니었다. 아주 날건달이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희나는 오늘 청룡 길드가 유독 조용했던 까닭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진현 씨랑 다른 헌터님들이 사고 단속을 하고 다녔구나.’
어제 희나와 환경 미화팀원들이 고생한 걸 알게 되었나 보다.
‘평소에 사고 치던 사람들이 사고 수습하러 다니는 거 보니까 어색하네.’
생각보다 의젓한 우리 애의 모습을 본 엄마의 마음이 이럴까……?
아니, 그렇다기에는 좀 살벌하긴 했지만 조금은 헛웃음 나는 광경이었다.
‘말만 저렇게 하고 싸움 말리러 와서 사람 때리지는 않겠지.’
희나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거친 헌터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어제만 해도 어깨만 치였는데 탁구공처럼 날아갔잖아.’
어제의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희나는 사건 현장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어머. 별일이 다 있네.”
희나의 목격담을 들은 환경 미화팀원이 헛웃음 쳤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이희나 팀장 덕분인 것 같네요.”
김화순도 피식 웃음을 지으며 희나를 눈짓했다.
팀원들도 너도나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희나 씨는 길드원들이랑 사이가 좋잖아요.”
“거기다 강 헌터랑도 사이가 아주 각별하고.”
희나는 제풀에 찔려 파드득 몸을 일으켰다.
“예? 강 헌터님이요? 그, 그건 왜?”
“그야 전속 담당이잖아요. 어제 전속인 권다혜 양도 희나 씨 많이 도와줬지 않나요?”
새삼스러운 걸 물어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 맞아요! 아무래도 전속 담당이라서 그런가, 다른 헌터님들보다는 좀 더 가까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거기다 강진현 헌터님 같은 경우에는 제 첫 담당이다 보니까…….”
지레 찔려서 변명 아닌 변명을 줄줄 늘어놓았다.
팀원들은 그런 희나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해 준다’라는 표정이었지만, 희나는 당황한 상태라 이를 채 눈치채지 못했다.
희나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허리를 푹 숙였다.
“그럼! 더 도와드릴 거 없으면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알았어요. 어제 정말 고마웠고, 오늘도 희나 팀장님 덕분이니까……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지네요.”
“에이, 아니에요. 옛정이 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그대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희나는 환경 미화팀 사무실을 벗어났다.
개인 사무실 문을 탁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들킬 뻔했네.”
괜한 걱정이었다.
‘역시 사내 비밀 연애는 쉽지 않구나.’
……진짜로 괜한 걱정이었다.
어쨌든 희나는 괜한(?) 걱정을 한데 치워 버리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흠. 시간이 비는데 간식이나 좀 만들어 볼까?”
잔뜩 일할 준비를 하고 왔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허전했다. 대신 뭐라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우리 길드 사람들이 힘써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행사 때문에 바쁠 텐데, 희나와 미화팀의 노고를 생각해 동분서주해 주는 헌터들의 모습은 가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희나는 그런 그들을 위해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기로 했다.
“흠……. 밥부터 안치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쌀을 박박 씻어 밥을 잔뜩 안쳤다.
밥 짓는 동안에는 고기와 채소를 잘게 썰어 볶고 단촛물을 만들었다.
따끈따끈한 밥이 지어지자마자 준비한 재료를 모두 쏟아 넣고 골고루 섞었다.
그리고 손을 다시 깨끗하게 씻고, 유부 안에 조물조물 밥을 뭉쳐 넣었다.
‘이렇게 하면…….’
끼니도, 간식도 될 수 있는 데다가 먹기도 간단한 유부 초밥이다.
“유부 초밥 맛있지.”
이제 여기부터는 유부 주머니 안에 밥을 꾹꾹 밀어 넣는 단순 노동의 반복이다.
그리고 꼬물꼬물 손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만드는 건 희나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집중력이 고조되며 신들린 듯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