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89화
강진현은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많이 부족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꼭 하고 다녀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보석이 달린 보통 액세서리보다는 쓰임새가 있으니, 언젠가는 쓸모가…….”
강진현은 방금까지만 해도 태연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뻣뻣하게 긴장하여 허둥지둥 자기 선물의 장점을 피력했다.
물리력 방어 기능도 있고, 약간의 체온 조절 기능도 있다고 했다.
비상 호출 기능도 있어, 약간의 마력을 주입하면 강진현에게 위치를 알릴 수 있었다.
어딜 가든 이런저런 사건 사고에 잘 휘말리는 희나에게 꼭 필요한 기능들이었다.
“사실 반지로 하고 싶었는데, 희나 씨는 손을 자주 씻는 일을 하시니 다른 게 낫겠다 싶어서 목걸이로 정했습니다.”
“아.”
희나는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노란 보석이 세심하게 커팅되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거기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평소 입는 옷들과 잘 어울릴 만한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희나의 취향에 맞추어 만들었다는 게 딱 보였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날 멋진 곳에서 데이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런 선물까지 준비해 두었을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어요.”
“그럼 받아 주시는 것이지요?”
“네. 사실 너무 좋은 선물이라서 무서울 정도긴 한데…… 저 생각하면서 준비한 거잖아요.”
강진현의 은은한 고집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준비한 정성을 거절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제야 강진현은 안심한 낯을 했다.
“그럼 목걸이, 걸어 드려도 됩니까?”
“네! 당연히 해 봐야죠.”
희나는 머리채를 한쪽으로 그러모아 쥐었고, 강진현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자연스레 숨이 섞일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희나는 얼굴을 붉혔다.
‘코끝, 닿겠다.’
한편, 강진현은 목걸이를 다 걸어 주고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희나의 눈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입안이 말랐다.
“……목걸이 건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 돌아온 건 동문서답이었다.
“입 맞춰도 될까요?”
눈빛이 어찌나 애절한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마침내 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안 물어보고 해도 돼요.”
대답하자마자 따끈한 것이 입술에 붙어 왔다. 몹시도 조심스럽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좋아.’
희나는 살풋 눈 감은 채 그 감각을 음미했다.
15. 사고뭉치들과 살림꾼
희나의 사무실에 들른 우민아가 희나의 낯빛을 보고 감탄했다.
“어째 요즘 신수가 훤하다?”
그 소리에 희나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아부해도 오늘은 더 줄 게 없어요, 언니.”
오늘은 사무실 부엌 냉장고 털이를 한 터라, 내줄 만한 게 시판 비스킷과 믹스 커피밖에 없었다.
“나를 대체 뭐로 보고!”
우민아가 억울하다는 듯 팔자 눈썹을 했다.
희나는 빙그레 웃었다.
“슬쩍슬쩍 칭찬 날리면서 잿밥 노리는 헌터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언니도 그런가 싶어서요.”
“잿밥을 노린다고? 야, 애들 억울해서 복장 터지겠다.”
우민아는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가슴을 탁탁 쳤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서 목숨 걸고 접근했는데, 또 이런 식으로 철벽 치면 눈물 나지…….”
대체 누구에게 감정 이입을 한 건지, 희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우민아는 한참 동안 구시렁대다가 희나의 어깨를 탁탁 쳤다.
“아무튼, 빈말 아니고 요즘 진짜 좋아 보여서 그래.”
“그래요? 요즘 좋은 일만 있어서 그런가?”
슬쩍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반사광 때문일까? 유독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무슨 일 있어? 좋은 일 있으면 소식 공유 좀 하자.”
“으음. 요즘 인테리어 다시 하고 있는데, 그게 또 재밌더라고요.”
“고작 집 꾸미기 때문에?”
“왜요? 엄청 재미있는데!”
희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실제로 커진 집을 새로 꾸미는 게 재미있어서 매일매일이 즐겁기도 했으니까.
방이 많아지니 이래저래 쓸 일 없었던 인테리어 테마 슬롯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벽지나 가구 분위기를 저장해 두고 그때그때 적용해 바꿔 쓸 수 있으니 기분 전환이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요즘 희나를 즐겁게 하는 건…….
‘연애! 연애 좋아!’
바로 연애였다.
무얼 해도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연애 초창기 아닌가!
길드 건물에서 바쁜 강진현을 스쳐보는 것도 좋았고, 둘만 아는 눈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강진현을 볼 생각에 매일 아침 눈이 번쩍번쩍 떠졌다.
대체 이걸 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살았지?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짜릿했다.
연애를 하면 예뻐진다는 낭설이 있다는데,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이야. 얼굴에서 아주 광채가 나네.”
우민아가 감탄하는 걸 보니, 그랬다.
둘은 이런저런 근황을 도란도란 나눴다.
연말이 되어 가서 그럴까? 길드 분위기가 부쩍 소란하다는 이야기를 하니 우민아가 아, 하고 말문을 뗐다.
“아, 너는 아직 모르겠구나. 오늘 공문 돌 거긴 한데 미리 얘기해 줄게. 열흘 후에 우리 길드에서 헌협 정기 회동이 있거든. 그것 때문에 좀 정신없는 감이 있지.”
참고로 헌협이란 ‘한국 헌터 협회’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길드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로, 정부만큼이나 대단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대형 길드에서 매해 돌아가면서 치르는데, 이번에는 우리 청룡 차례거든. 어휴. 귀찮게 됐어.”
우민아는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희나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식이었다.
“그럼 우리 청룡 길드 말고도 다른 길드 소속 헌터들도 많이 오겠네요?”
“그럼. 길드 하나당 한 명씩은 파견하니까…… 최소 200은 오지.”
“건물이 복작복작하겠네요.”
“아주 화약 창고가 따로 없다, 야.”
우민아는 같은 길드 소속 헌터 너덧만 모여도 휴게실 하나 터져 나가는 건 일도 아닌데, 서로 다른 길드에서 파견된 헌터 수백 명이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열흘 후.
희나는 우민아가 말한 ‘화약 창고’라는 표현에 절절히 공감하게 된다.
* * *
희나는 김화순 환경 미화 팀장에게 에너지 음료를 건넸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김화순은 희나가 건넨 에너지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은 못 하겠네요.”
김화순 팀장의 눈 밑이 검었다.
헌터 협회 정기 회동을 시작한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4시간.
어지간한 사건 사고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청룡 길드 환경 미화팀 팀장 김화순의 얼굴이 반쪽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힘드네요.”
“설마, 시작부터 일이 터질 줄이야…….”
희나는 엉망이 되어 파헤쳐진 길드 앞마당을 떠올렸다.
나무는 뽑힌 채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고, 세련된 조각상들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원래 다른 헌터들은…… 만나면 그렇게 다짜고짜 주먹부터 갈겨요?”
“글쎄요. 청룡 헌터들만 해도 굉장한 사고뭉치들이니까요.”
그리고 사고뭉치들끼리 뭉치면 몇 배의 시너지 효과가 난다.
김화순 팀장이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우르릉, 하고 바닥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 어딘가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Rrrr…….
얼마 지나지 않아 김화순 팀장 허리의 호출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상황 수습이 끝났으니, 환경 미화팀이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김화순 팀장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만 가 볼게요. 희나 씨, 아니, 이 팀장, 음료수 고마워요. 잘 마시고 가요.”
돌아서는 뒷모습이 몹시 고단해 보였다.
청룡 길드에 입사했던 초창기부터 희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김화순 팀장이었다.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손 놓고 있고 싶지 않았다. 희나는 의리를 아는 여자였다!
마침내, 희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팀장님! 저도 도울게요!”
김화순 팀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희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래의 그녀였더라면 ‘괜찮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을 테지만 지금은 환경 미화팀 기준으로는 긴급 전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애 손 하나라도 보탤 수 있다면 고마운 수준인데, 청소에는 일가견이 있는 살림꾼 희나라니.
환경 미화팀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희나는 환경 미화팀 팀복으로 갈아입고 앞치마, 머릿수건을 질끈 동여맸다.
착장 버프가 오른다는 시스템 알림이 띠롱띠롱 울렸다.
살림꾼 랭크가 B로 올라서 그런지 착장 버프가 예전보다 훨씬 많이 올랐다.
‘힘이 불끈 난다! 나는 할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대체 여기서 뭘 했길래 이 꼴이?”
바닥에 천장까지 초록색 점액투성이다.
특수 처리한 장갑을 끼고 만져 보니, 끈적끈적했다. 거기다가 점액이 묻었던 자리에는 이상한 기름때 같은 것이 껴서 번들거리는 시퍼런 얼룩이 남았다.
“윽, 냄새.”
거기다 냄새는 또 어떤지.
마스크를 꼈는데도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기가 아주 감미로웠다.
썩은 달걀 냄새가 났는데, 지옥불에서 구운 듯한 퀴퀴한 스모크향이 섞여 있었다.
“이 정도면 우리 선에서 처리할 수는 있겠네요. 다행입니다.”
이 와중에 김화순 팀장은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진 않다며 안도했다.
“……대체 어디가 다행인 거죠?”
의아한 물음에 미화팀원 하나가 전투 의지를 다지며 대답해 주었다.
“적어도 건물 벽이 부식하거나 무너진 건 아니잖아요. 이건 청소만 하면 되니까.”
“아.”
환경 미화팀원들은 생각 이상으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갑시다! 열심히 일해서 인센티브 받자고요!”
인센티브라는 단어에 시체 같던 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가자! 며칠만 버티면 된다!”
다들 적장의 목을 따러 가는 장수처럼 청소 도구를 꼬나들고 현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희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우와아, 하고 점액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