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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86화 (186/228)

던전 안의 살림꾼 186화

‘어머.’

데이트할 때 맛있는 거 먹여 주겠다는 말일 뿐인데, 왜 이리 가슴이 떨리는지.

맛난 음식에 심장이 벅차오른 건 아닐 테다.

‘밥해 달라고 붙잡던 사람이 이제는 밥 같은 건 별로 상관없다고 하네.’

그래. 이거였다.

온전한 연인 관계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진현 씨가 나를 그저 밥해 주는 사람으로 취급한 건 아니야. 절대로 아니지.’

그의 진심은 눈빛만 보아도 절절히 전해져 왔다.

이전에는 이걸 왜 몰랐을까, 내가 눈이라도 멀었던 걸까,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을 꺼내 짚어 주니 새삼스레 감동이 올라왔다.

“……입에 안 맞을 텐데 억지로 안 먹어도 돼요.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 줄게요.”

그러자 강진현은 방금 희나가 집어 먹었던 가니시 한 조각을 따라 입에 넣으며 빙긋이 웃었다.

분명히 그의 입에는 과하게 짜거나, 밍밍하거나, 자극적이거나, 조화롭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정말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희나 씨가 맛있으면, 저도 맛있습니다.”

절절한 사랑 고백도 아니건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둘은 천천히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밝았던 하늘이 뉘엿뉘엿 어두워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희나는 야경을 구경하다 휴대전화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꽤 늦었다.

“오빠는 돌아왔으려나?”

희원은 옛 동창들을 보겠다며 오래간만에 주말 외출을 나섰다.

강진현이 배짱 좋게 집 안에서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집에 도착했으면 너 어디 갔냐고 연락했을 텐데. 오빠도 오늘 늦게 들어오려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강진현이 이래저래 맞장구를 잘 쳐 줘서 희나는 신이 나 종알종알 떠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색이를 못 봤네요?”

“어제 피곤하다고 했는데, 종일 자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요? 하긴. 달팽이도 피곤할 때가 있겠지. 매번 힘이 넘치긴 힘들죠.”

“맞는 말씀입니다.”

“근데 바둑이도 본 기억이 없네요. 그것참 이상하네.”

주먹만 한 달팽이인 오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2m짜리 거대한 식물형 몬스터인 바둑이를 못 보고 지나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바둑이, 반나절에 한 번은 우다다 하는 앤데……. 뭔가 문제 생긴 건 아니겠죠?”

괜스레 걱정이 되어 중얼거리자 강진현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희원 형님이 텃밭에 풀어놓고 외출하셨습니다. 심심할 테니 밖에서 뛰놀라고요.”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희나는 금세 납득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세상에 강진현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 말을 믿겠는가?

희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좋았어요.”

교제를 시작한 후,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안 보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가 봐도 ‘데이트’ 같은 데이트는 처음이었다.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을 때다.

여기에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대화, 멋진 풍경까지 곁들였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진현 씨가 먼저 데이트 신청했으니까, 다음번엔 제가 신청할게요.”

호기로운 예고에 강진현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그땐 제가 정한 코스로 데이트해요.”

“설레네요.”

“으음. 벌써 설레면 곤란한데……. 그래도 진현 씨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뭐든 좋습니다. 희나 씨와 함께하는 것이라면 뭐든 즐거울 게 분명합니다.”

희나가 깔깔 웃었다.

“진현 씨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니깐!”

“하지만 진심입니다.”

둘은 오순도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깜깜하네.’

아직 희원은 약속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집 안은 어두웠다.

더듬더듬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어 가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 시커먼 형체가 스쳤다. 섬뜩했다.

“꺅!”

희나는 몹시 놀라 손바닥을 휘둘렀다.

늘 그렇듯 주먹은 생각보다 빨랐다.

자연스럽게 해충 박멸 스킬도 시전했다.

희나의 손바닥이 부웅, 공기를 갈랐고 철썩! 무엇인가 가격당해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재빨리 적을 처리한 희나는 스위치를 탁 올렸다. 실내가 번쩍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희나야 늦었지만 생일 축하…… 으억! 바둑아!”

고깔모자를 쓴 희원이 미니 축포를 뻥 터뜨리려다 식겁했다.

“아이고, 바둑아!”

희원은 손에 든 걸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동그라진 바둑이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쓰러진 바둑이의 잎사귀에는 희나의 손바닥 자국이 선연히 새겨져 있었다.

「☎삐용삐용☎」

「☎긴급사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오색이가 안테나를 쯧쯧 저었다.

「몹시아픔주의♨」

「큰공감ㅠ」

「랭크↑ 타격 데미지↑」

「ㅉㅉㅉㅉ」

동그란 머리통 위에 앙증맞은 고깔모자를 쓴 오색이는 이 와중에도 아주 귀여웠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희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은 알록달록 종이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알파벳 모양 풍선이 매달려 있었는데, 천천히 따라 읽어 보니 다음과 같았다.

“Happy Birthday……?”

……그러니까 이건 생일 축하 깜짝 파티였다.

“바둑아, 괜찮아?”

희나는 걱정스럽게 바둑이를 살폈다.

바둑이는 괜찮다는 듯 잎사귀 하나를 척 올려 경례했다. 씩씩했다.

「Oh……!」

「바둑 = 대인배」

앙심을 품고 집 안 인테리어를 끔찍하게 바꾸어 버린 누구와는 굉장히 달랐기 때문일까?

오색이는 그 모습에 크게 감탄했다.

희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티용 고깔을 쓴 희원과 오색이, 바둑이.

그리고 다소 당황한 듯한 강진현까지.

“모두 한패였구나? 진현 씨는 나 데리고 나가서 정신 쏙 빼놓고, 그동안 오빠랑 오색이, 바둑이는 몰래 준비하고.”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뒤에서 뭔가 나쁜 일 작당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희원이 슬쩍 테이블 위의 케이크를 가리켰다.

“생일 축하해 주려고 한 거거든!”

“내 생일은 한참 전에 지났는걸.”

희나 생일은 9월 21일이었고, 지금은 10월이었다.

희나의 지적에 강진현이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인 후 내밀었다.

“제 저주 때문에 지나쳤지 않습니까. 날짜를 놓쳤다고 그대로 넘기긴 싫었습니다.”

“그래. 아직 시간 많이 안 지났어. 그러니까 축하할 건 축하해야지.”

「옳소! 옳소!」

바둑이도 찬성한다는 듯 넝쿨을 길게 뻗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놀란 마음은 놀란 마음이고,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었는데 그걸 모른 척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어쨌든 모두 고마워요.”

“빨리 초 불어. 케이크에 촛농 떨어질라!”

익살스러운 재촉에 희나는 후, 하고 초를 껐다.

촛불을 끄자마자 모두 와아, 하고 박수와 함께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내 세 사람과 달팽이 하나, 식물 하나는 케이크를 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자자, 먹자. 먹어.”

희원이 한 조각씩 케이크를 배분했다.

오색이 앞에는 케이크 대신 오색이가 좋아하는 배춧잎이 놓였다.

“맛있다.”

방금까지 특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훌륭한 식사를 마치고 왔는데도, 케이크는 맛있었다.

보송보송한 케이크 시트와 우유 맛 진한 생크림, 상큼한 딸기의 조합이 실패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희나는 포크를 입에 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진현 씨가 막바지에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더라니…… 오빠한테 연락하느라 그런 거였나 봐요?”

“……많이 티 났습니까?”

“휴대전화 화면 볼 때마다 표정이 진지해져서 길드장님한테 호출이라도 온 줄 알았지 뭐예요.”

희나는 깔깔 웃었다. 비밀 임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실상은 희나의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던 거였다니.

한편, 희원은 팔짱을 끼고 희나와 강진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오늘 둘이 뭐 했냐? 어째 둘 다 모습이 좀 낯설다?”

지금 둘은 누가 보아도 ‘특별한 곳에 다녀왔어요!’ 하고 주장하는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길드 다녀온 게 아닌데?’

강진현이 희나를 데리고 나가 길드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희원은 재료를 사고, 집 안을 꾸미기로 했다.

바둑이와 오색이도 희원을 도와 이곳저곳을 장식했다.

‘그런데 예정보다 늦게 들어오기까지 하고.’

희원은 강진현이 보냈던 텍스트 메시지를 떠올렸다.

[희원 형님. 예정보다 한 시간 반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때야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수상했다.

‘뭐야, 강진현 이 자식! 머리까지 슬쩍 넘겼네?’

거기다 신경 안 쓴 듯, 엄청나게 신경 쓴 머리 스타일까지.

의심스러웠다.

그것도 엄청나게!

심지어 성격 담백한 동생까지 눈알을 빙글빙글 굴리며,

“그냥 뭐, 적당히 있다 왔지.”

……이런 소리를 한다면, 없던 의심마저 피어날 것이다.

‘흠.’

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물었다.

“야. 너네, 둘. 무슨 일 있었지?”

“어? 어어?”

달그락, 희나가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앗, 갑자기 턱에 힘이 빠지네……. 오늘 피곤했나 봐. 아, 졸려라. 그, 그만 방에 들어가서 쉴까?”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워섬기지 않는가?

덕분에 희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 사귀냐?”

“…….”

묻자마자 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므로, 희원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못 느꼈다.

‘아. 얘, 연애하는 거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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