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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84화 (184/228)

던전 안의 살림꾼 184화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희나 씨.”

별 의도 없이 이런 멘트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거라면, 강진현은 유죄였다.

희나의 심장을 쥐락펴락했다는 점에서!

‘아니. 이건 의도가 있어도 유죄야!’

깨소금 철철 넘치는 분위기에 희나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헉, 허억……. 헉.”

파비안 앳킨스가 소원의 샘에 도착했다.

“허억. 헉. 정말로, 속도, 한 번, 늦춰 주질, 헉, 않는군요.”

S급 헌터가 전속력으로 달리니, 그 속도를 쉽게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파비안은 몇 번이고 속도를 늦춰 달라고 요청했지만, 강진현은 그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내일 희나 씨 출근해야 하니 빨리 다녀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헉, 허억. 어쨌든, 제가 도움을 받는 쪽이니 뭐라고 할 만한 입장은 아니긴 하죠.”

파비안은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 마침내 ‘소원의 샘’ 앞에 섰다.

그는 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희나는 숨죽인 채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파비안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손을 닦았다.

소원을 빌고 있는지 입가가 작게 달싹거렸다.

“제발.”

그는 간절히 읊조리며 깨끗해진 손을 샘 안에서 빼냈다.

고개를 숙여 수면을 바라보자, 일렁이던 샘에 가벼운 파동이 일었다.

“…….”

파비안 앳킨스는 한참 동안 샘을 들여다보았다.

희나는 잔뜩 긴장한 손길로 강진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뭔가 보이고는 있는 걸까?’

적어도 희나가 보기에는 수면이 한 번 일렁인 것 외에는 별일이 벌어진 것 같지 않았다.

‘과연 이 샘이 파비안 씨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정답을 가르쳐 줄까?’

식물인간이 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이다.

그런 이를 깨울 만한 방법이 있다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테다.

마침내 파비안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는 수통을 꺼내 조심스레 샘물을 담았다.

“방법이 있대요?”

침을 꼴깍 삼키며 물으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원의 샘물과 A급 이상 던전 보스의 정순한 마석 500개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희나는 입을 쩍 벌렸다.

“마석 500개…….”

그것도 A급 이상 던전의 보스 마석이었다.

심지어 ‘정순한’이라는 조건까지 붙어 있었으니, 그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게 분명하다.

‘개인이 그만한 마석을 모을 수 있긴 한 걸까?’

희나는 다소 회의적이었지만, 파비안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는 개운하게 웃었다.

“혹시나 방법이 없다는 답을 받을까 봐 두려웠는데, 아니었네요. 시간과 돈의 문제지,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에요.”

몹시 긍정적이었다.

하긴, 식물인간이 멀쩡히 깨어나는 일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파비안 앳킨스는 소원을 빌었고, 샘은 희망을 주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앞으로 열 배는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군요.”

그의 웃음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 * *

사건의 배후도 대강 확인했겠다, 동생의 치료 방법도 확인했겠다, 이제는 정말로 파비안 앳킨스가 떠나야 할 때였다.

“다들 내가 언제 죽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멀쩡히 살아서 나오면 크루들 표정이 아주 볼만하겠네요.”

파비안이 성격 나쁜 표정을 지으며 킬킬거렸다.

자신을 배반한 팀원들을 어찌 처리할지 계획까지 모두 세워 두었다고 했다.

희나에게라면 그 계획을 모두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신 건강에 영 좋지 않은 이야기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강진현이 무뚝뚝한 낯으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출발하지.”

그는 파비안을 뒤로 슬쩍 밀치며 검은 안대를 건넸다.

던전을 오가는 방식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소원 던전에 들어갈 때 한 번 써 본 적이 있었으므로 파비안은 순순히 안대를 받아 착용했다.

“갈까요?”

희나는 파비안을 부축하여 현관으로 이끌려 했으나, 그보단 강진현이 먼저였다.

그는 파비안의 팔을 움켜쥐고 반쯤 연행하듯 끌고 나갔다.

“악! 팔 아픕니다!”

“보기보다 엄살이 심한 편인가 보군요.”

그 장면을 보며 희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꽤 친해진 편이 아닐까?’

현관문을 열자마자 흰 설원이 펼쳐졌다.

겨울옷을 껴입은 희나가 강진현을 향해 까치발을 했다.

그런데도 키 차이가 많이 났으므로 강진현은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굽혀 주었다.

“무슨 일인가요?”

“진현 씨, 제가 준 지도 챙겼죠?”

“예. 챙겼습니다.”

어젯밤 희나는 ‘내 집을 찾아서’ 스킬을 사용해 설원 던전의 지도를 그려 강진현에게 넘겼다.

지도에는 보스 몬스터, 게이트, 현관문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원체 스킬이 조악하다 보니 축척이 제대로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방향 정도는 알고 가는 게 좋을 듯했다.

“제가 같이 가는 편이 좋겠지만…… 그렇게는 못 하는 게 아쉽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다닐 수 있습니다. 땅콩도 많이 챙겨 두었으니 식량도 걱정 없습니다.”

“나중에 집 근처에 빨간 깃발을 세워 둘게요. 깃발을 기준으로 현관문을 찾아요.”

희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속닥거렸다.

위치를 알고 뒤져도 찾기 어려운 ‘홈 스위트 홈’이었다.

잘못하다가 강진현이 현관문을 찾지 못하고 미아가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마다 나와서 진현 씨 있는지 확인할 테니까요.”

“예.”

강진현은 미소 지었다.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요? 설마, 사실은 날 보내기 아쉬운 거라든가?”

한편, 안대를 낀 채 멀뚱히 서 있던 파비안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나는 바쁜 사람이니까요. 하하!”

강진현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파비안을 힐끗 보았다.

“……출발하겠습니다.”

“희나, 잘 알아 둬요. 내가 여길 나가면 아마 곧바로 사진이 뜰 텐데, 내 얼굴에 흠집이 있으면 그건 높은 확률로 강 헌터가 낸 상처일 거예요.”

희나는 피식 웃었다.

“농담도 참.”

강진현이 파비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긴 했지만, 그는 남에게 함부로 손을 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희나는 그렇게 믿었다.

이에 파비안이 작게 투덜거렸다.

“난 농담이 아닌데…….”

마침내 두 남자는 안전지대 마지막 선 앞에 섰다.

헤어짐을 예견한 듯, 파비안이 희나의 기척을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정말로 안녕이에요, 비밀 많은 아가씨.”

“조심히 잘 가요.”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요. 정말로 뭐든 도울 테니까.”

“말만으로도 충분해요.”

“난 진심이에요.”

그걸 마지막으로 둘은 안전지대의 붉은 선 밖으로 벗어났다.

희나는 설원 위 그들의 모습이 새까만 점이 될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 * *

이틀 후, 강진현은 무사히 귀가했다.

“던전이 넓지 않아 이동은 수월했습니다. A급치고 보스 몬스터도 무난한 편이었고요.”

그는 A급 던전을 대수롭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희나의 손 위에 반짝이는 은색 동전을 올려놓았다.

희나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어? 공간의 조각이네요!”

“예.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니 나오더군요. 마석은 그에게 주었습니다.”

“잘했어요. 동생 깨우려면 마석 많이 필요하니까요. 어쩜 진현 씨는 마음씨도 이렇게 고울까!”

강진현은 희나의 칭찬을 만끽하며 파비안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희나에게 미국 꼭 놀러 오라고, 그땐 재밌는 거 많이 보여 주겠다고 꼭 전해 줘요.’

‘……알았습니다.’

‘안 전해 줄 것 같은데.’

‘당신 알 바 아닙니다.’

‘희나가 당신 성격 안 좋은 거 알고 있어요?’

‘그 또한 알 바 아닙니다.’

‘뭐, 강진현 헌터도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해요. 연애 상담은 자신 있으니까.’

파비안 앳킨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던전 게이트 밖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연애 상담이라니.’

그것도 파비안 앳킨스에게 받는 연애 상담이라니. 영원히 필요할 일 없으리라.

강진현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파비안의 마지막 제안을 지워 냈다.

그리고 어리광 피우듯 희나에게 속삭였다.

“희나 씨, 라면 먹고 싶습니다.”

“라면이요?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잔뜩 끓여 주려고 했는데.”

“상 주시는 겁니까?”

“고생했잖아요. 추웠을 테니 특별히 더 팔팔 끓여 줄게요.”

강진현은 종종거리며 부엌으로 향하는 희나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청객 없이 평화로운 하루였다.

* * *

- 파브 아웃스타그램 본 사람?

- 챌린지 영상 말하는 거야? 그거 정말 귀여웠지 ;)

└ 챌린지 얘기면 대체 몇 달 전 얘기를 하는 거야? 그거 말고, 방금 올라온 거.

-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네?

- 방금 올라온 게시글 나도 봤어. 의미심장하지 않아?

- 사진으로 올라온 거 마석 맞지? 얼마짜릴까? 천만 달러?

- 셀리나 키이스랑 아직도 사귐?

- 이번엔 셀피가 없어서 아쉬웠어 :(

└ 매번 얼굴은 꼭 올려 줬는데,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 다친 건가?

└└└ 넘쳐나는 게 돈인데, 포션 썼겠지.

- 다들 본론에 집중해! ‘THANKS, MY FRIENDS’라니, 무슨 뜻인지 짐작 가는 사람?

- 셀리나 키스랑 헤어진 거 아님? 그동안 고마웠다는 뜻 아닐까?

└ 걔랑은 23일 전에 헤어졌어.

└ 으... 헤어진 일수를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고? 크리피해.

- 방금 기사 떴어. 프라이빗 매니저가 자살했대.

- 오 이런... 추모의 글이었구나. 안타까워. 그와 누구보다 가까웠을 사람인데, 가까운 지인을 잃은 파비안이 느낄 슬픔은 얼마나 클까.

- 그럼 my ‘friend’여야 하는 것 아니야? 왜 friends(친구들)이라고 썼지?

└ 사람이 죽었어. 사소한 건 따지지 말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라고.

└└ 추모글에 ‘thanks’라는 표현 쓰는 거, 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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