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83화
“헉.”
예상치 못한 설렘 공격에 희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 집 안에서 이러면 곤란해요.”
정확히 말하면 심장이 곤란했다.
“싫으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설레잖아요.”
“그럼 좋은 것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한데…….”
이런저런 핑크빛 갑론을박을 속닥거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부르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정보상 원덕삼이었다.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뭐 좀 알아냈어요?”
- 그럼요. 미국은 제 관할 밖이긴 하지만 던져 주신 키워드랑 줄 타고 알아봤는데요, 아무래도 파비안 앳킨슨 이 사람, 여러모로 미움을 많이 산 듯합니다.
유명세에는 반감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 교사까지 하진 않지.’
희나는 입매를 굳혔다.
‘대체 누가 파비안 앳킨스를 죽일 정도로 싫어하고 있는 걸까?’
파비안은 충분히 회복한 상태였지만, 그를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파비안도 이를 원하지 않았고 말이다.
‘아무래도 내 적들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돌아가는 편이 낫겠죠.’
그는 차분하게 자기를 싫어할 만한 세력들을 알려 주었다.
희나가 아는 정보상이라고는 미스터 원 하나뿐이었으므로 뒷조사는 자연히 원덕삼이 맡게 되었다.
그는 뜬금없는 의뢰에 의아해하면서도 늘 그렇듯 군말 없이 정보를 내놓았다.
- 다른 자잘한 원한은 제쳐 두고, 어디 보자. 이번 일의 배후 세력을 크게 하나 정도로 추리자면요…….
“배후 세력에 자잘한 원한까지?”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살면서 하나 사기도 어려운 원한을 수도 없이 사게 된 걸까?
희나는 파비안 앳킨스의 행적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이야.’
희나가 속으로 혀를 차건 말건, 원덕삼은 설명을 계속했다.
- 서부 지역 폭력 조직과 이 일이 연관 있는 것 같더군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폭력 조직에 얽혀들 수 있단 말인가?
“포, 폭력 조직이요?”
- 맞습니다. 폭력 조직이요. 쉽게 말해서 갱이죠, 갱.
“파비안 앳킨스,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이길래 갱이랑 얽혔어요? 아니면 미국 사람들은 원래 다 이렇게 위험하게 사는 건가?”
- 뭐, 그렇게 나쁜 일로 얽힌 건 아니고…… 차라리 선한 일을 하다가 운 나쁘게 얽혀 들었다는 쪽에 가깝죠.
“선한 일을 하다가요?”
- 얼마 전에 희나 아가씨가 자선 바자회 하지 않았습니까? 그쪽 마을을 지원하게 되면서 지역 갱들과 마찰이 생긴 모양입니다.
희나는 멈칫했다.
“자선 바자회랑 연관이 있다고요?”
- 그쪽 지역이 마약 커넥션이 있던 곳이라……. 파비안 앳킨스가 손대면서 사업에 차질이 많이 생겼나 봅니다.
“살인 교사에, 갱에, 마약까지…….”
미국 스케일이라 그런 걸까?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했다.
- 아무튼 자세한 사항은 서면으로 받아 보시고, 전말은 대충 이렇습니다. 정보 빼돌린 측근 명단도 첨부해 두었으니 그건 따로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원덕삼은 통화를 마무리하려다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 아차차.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 파비안 앳킨스가 팔콘 길드에 미움이라도 샀나 보지요?
익숙한 이름이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우릴 도와줬던 곳 아니야?’
희나에겐 팔콘 길드가 그리 나쁜 이미지가 아니었으므로, 더더욱 의외였다.
- 팔콘 길드 쪽에서 손쓴 흔적이 보입니다.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갱들을 부추긴 건 이쪽 아닐까 싶습니다.
원덕삼은 이 정보를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끊은 후, 희나는 원덕삼이 이메일을 통해 보낸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손님방에 반감금되어 있는 상태인 파비안 앳킨스를 불러왔다.
“뭔가 소식이 있었나 봐요?”
그가 테이블에 턱을 괴며 앉았다. 눈빛이 제법 서늘하게 번쩍였다.
“방 안에 혼자 누워 대체 누가 나를 배신했을까,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일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확인해 봐요.”
희나는 원덕삼에게서 도착한 보고서를 열어 보여 주었다.
하나는 국문으로, 하나는 영문 파일로 작성되어 있었으므로 파비안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 팔콘이 제대로 약이 올랐나 보군요.”
파비안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희나의 표정이 절로 진지해졌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도울 수 있는 한도 안에서는 도울게요.”
그 제안에 강진현이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이미 목숨 살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파비안 앳킨스 씨가 위험에 처한 건 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걸요.”
희나에게 잘 보이려고 마을 후원을 했다가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다던가…….
거기다 그 배후에 팔콘 길드까지 있다고 하니 마음이 더더욱 편치 않았다.
‘아마 소원 던전 때문에 파비안이 팔콘 길드를 도발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듯한데…….’
그 덕분에 크나큰 수혜를 입었으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파비안 씨 덕분에 우리가 얻은 게 있는데, 그 일 때문에 그쪽이 뭘 잃는 일은 없어야죠.”
희나가 약간의 가책을 느끼는 걸 눈치챘는지, 파비안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럼 희나, 뭐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 목숨 구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만…….”
“……소원 던전, 얘기하려고 하는 거 맞죠?”
희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눈을 빛낼 때부터 알아봤다.
“대체 소원 던전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던전 타령만 했잖아요.”
“음. 그래요. 희나가 내게 중요한 비밀을 오픈했으니, 나도 하나 알려 주는 게 맞겠죠.”
파비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희나의 심금을 절절히 울렸다.
남들 시선이라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파비안이 단 하나,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이었다.
그 또한 10년 전의 ‘그날’에 막내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었다.
아니, 여동생 또한 멀쩡하게 살아남지는 못했다.
“머리를 잘못 다쳐 식물인간이 되었으니까요.”
“저런…….”
애당초 파비안이 일을 시작한 것도 동생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유명세를 얻게 되었죠.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만큼 동생도 위험해졌어요.”
단 하나뿐인 가족을 두고 협박을 일삼으니, 파비안 앳킨스는 동생의 존재를 깊이 숨길 수밖에 없었다.
“가족과 관련한 정보는 다른 가십으로 전부 덮어 버렸고, 동생은 요양 병원에 맡겨 뒀죠.”
파비안은 동생을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1년에 한 번조차 동생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게 된 현실이 우습다며 자조했다.
“혹시나 깨울 수 있을까 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어요. S급 엘릭서도 먹여 봤는데, 효과는 없더군요.”
이에 강진현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엘릭서는 각성자 상태 이상에만 도움이 되는 물약이니까요.”
“맞아요. 헛짓거리였단 건 나도 압니다. 그래도 어쨌든 덕분에 팔콘 길드가 S급 엘릭서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니, 완전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죠.”
그러던 도중, 팔콘 길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됐다고 했다.
바로 소원의 샘이 있는 소원 던전.
“소원 던전이라고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건 아니에요.”
실제로 강진현의 소원 또한 굉장히 우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희나의 지적에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하나라도 있다면, 시도해 봐야죠.”
그의 대답에 희나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다시 닫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라도 그럴 것 같아.’
그 마음이 절절히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어 봤기에, 남은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았다.
“아무튼…… 사정 얘기했으면 진작 도와줬을 텐데요.”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지금이야 위험한 상황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할 수 있는 말이고요.”
여기까지 털어놓은 파비안이 의자에 깊이 기대앉았다.
“다 얘기했어요. 이렇게까지 다 까발려 말한 건 처음이에요. 내 패는 전부 다 이야기했으니까, 제발 도와줘요. 난 어떻게 해서든 동생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요.”
절절한 진심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희나는…….
“좋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다는데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소원의 샘에만 접근하면 되는 거죠?”
이미 강진현 일행에 의해 던전은 클리어해 둔 상태였다.
그 정도면 어렵지 않았다.
“진현 씨, 지금 시간 괜찮아요?”
“예. 던전 지리를 알고 있으니 하루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진현은 선뜻 희나의 청을 수락했다.
“……고마워요, 희나!”
파비안의 두 눈이 희망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 *
강진현은 희나를 안은 채 쉬지 않고 뛰었고, 소원의 샘에 금세 다다랐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네요.”
희나가 강진현의 귀에 속닥였다.
소원의 샘은 그 위명과는 달리, 무척 작고 아담했다.
굳이 묘사하자면 한 아름쯤 되는 물웅덩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소원을 빌며 손을 씻고, 얼굴을 비추면 가장 절실한 소원에 대한 답을 내려 줍니다.”
“신기하네요.”
“희나 씨부터 해 보시겠습니까?”
제안에 희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어서……. 딱히 빌 만한 소원이 없네요. 진현 씨는요? 다시 왔는데 뭐 빌고 싶은 거 없어요?”
“빌 소원이 없습니다.”
강진현은 딱 잘라 이야기했다.
“희나 씨가 곁에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 삶은 완벽한데요.”
“부, 부끄럽게!”
오늘 치 설렘 한도 초과다. 희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