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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82화 (182/228)

던전 안의 살림꾼 182화

포션을 단번에 들이켜자 몸이 한결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윽.”

늘 그렇듯 맛과 냄새는 끔찍했지만, 그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죽기 직전까지 갔던 것치곤 컨디션이 나쁘진 않은데.’

파비안은 주먹을 쥐고 펴길 반복하며 몸 상태를 살폈다.

꿰뚫렸던 어깨는 새살이 돋아 간질간질했고, 그 외 커다란 상처들도 거의 아물었다.

방금 먹은 포션 덕분인지 진탕이 되었던 내장도 상태를 완전히 회복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전투는 치를 수 있겠네.’

희나는 그런 파비안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얼굴이 멀쩡한지 알아본다며 거울을 요청하는 걸 보니 상태는 꽤 괜찮아진 게 분명했다.

‘하긴. 깜짝 놀라서 상급 포션을 엄청나게 부어 넣었지.’

강진현은 탐탁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희나에게 포션을 계속 내주었다.

‘정신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조금 있다가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무려 최상급 포션을 내주어 놓고선 얼마 하지 않는다며 값을 받지 않으려 할 게 분명했다.

금전적으로 감사를 표할 길이 없으니, 마음이라도 전해야겠다 싶었다.

‘좋아하는 라면도 잔뜩 끓여 줘야지.’

자주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라면은 몇 주에 한 번만 끓여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라면 창고의 빗장을 열어젖히리라.

라면을 먹으며 즐거워할 강진현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

“희나,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파비안 앳킨스의 질문에 희나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

요즘 뭘 하건 생각이 모두 강진현으로 흘러갔다.

‘……중증이네.’

자가 진단하며 희나는 최대한 차분한 척, 말문을 열었다.

“음. 간단히 상황 설명할게요.”

“부탁해요.”

“어쩌다 우연히 파비안 씨를 발견해서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리고 치료했고요. 의식을 잃었던 건 한나절 정도 됐어요.”

“……너무 축약한 것 아닙니까?”

간단히 설명한다고는 했지만, 심할 정도로 간단했다. 중간 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던전에 홀로 입장했고, 거기서 죽어 가고 있었는데요.”

누군가가 입장하면 던전은 게이트를 꽉 닫아 버린다.

던전 보스가 사라지거나, 입장객이 모두 전멸하기 전까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어떻게 나를 구한 거죠, 희나?”

“음, 그건.”

파비안의 질문에 희나가 기다렸다는 듯 반짝거리는 보석 하나를 꺼냈다.

크기로 보나, 순도로 보나 고등급의 마석이었다.

마석을 보자마자 파비안은 그가 꽤 대단한 비밀에 얽혀 버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역시나.

“설명하기 전에, 마석 맹세부터 할까요? 비밀 서약이요.”

희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희나 씨.”

파비안은 방 안에 난입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S급 헌터 강진현? 그가 왜 여기에?’

그에게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있는 파비안으로서는 썩 반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강진현은 형형한 눈빛으로 파비안 앳킨스를 위아래로 살폈다.

“허튼짓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노골적인 협박에 미간을 찡그리는데, 희나가 파비안의 손 위에 마석을 떨어뜨렸다.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네요, 파비안 씨.”

두 남녀에게서 쏟아지는 눈초리가 보통 따가운 게 아니었다.

특히 강진현에게서 나오는 기세란…… 여기서 비밀 서약을 하지 않는다면 살인멸구라도 할 생각인 듯했다.

‘겨우 살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할 테니까 그렇게 무섭게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강진현 헌터에게 말 좀 해 줄래요, 희나?”

이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비밀에 부치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파비안은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와우. 마석에다 목숨 걸고 맹세시킬 만한데요?”

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은 희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놀랍네요. 어느 던전이든 출입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파비안은 희나의 능력을 몇 번이고 작게 읊조리다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역시 내 감은 틀린 적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소원 던전.”

희나의 중얼거림에 파비안 앳킨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나도 희나에게 접근하면서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런 것치고는 엄청나게 확신에 차 있던데.”

파비안이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난 한번 정한 건 끝까지 밀고 나가거든요. 내 직감이 이렇게 시끄럽게 울린 건 처음이었고.”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아, 했다.

“그러고 보니 목숨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안 했네요. 고마워요, 희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감사 인사에 희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요.”

진짜 해야 할 일이었기에 했다는 어조였다.

파비안은 그런 희나를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지.’

만약 그였다면, 절대로 상대를 구하지 않았을 거다.

‘그것도 타국에서 몇 번 만나고 만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인생에서 썩 중요한 인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설마, 희나도 내 팬이 된 건가?’

파비안은 잠시 나르시스트적인 가설을 세웠다가 금세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건 절대 아니지.’

그도 희나가 자신에게 큰 호감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순전히 선의로 사람을 살려 주었다는 건데…….’

흔치 않은 인간상이었다.

적어도 파비안의 주변에서는 말이다.

파비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희나는 정말 선한 사람이군요.”

낯부끄러운 칭찬에 희나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파비안 씨를 살린 건 진현 씨나 마찬가지예요. 응급조치도 해 주었고, 포션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었거든요.”

희나는 그를 살리겠다는 결심만 했을 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한 건 모두 강진현이었다.

“감사 인사를 들어야 할 건 진현 씨예요.”

하지만 파비안은 그 의견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희나 시선이 미치지 않을 때마다 날 저렇게 노려보고 있는데?’

강진현의 이글이글한 시선에 얼굴이 따갑다 못해 뚫릴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짜 은인’이 이렇게 사람 좋게 웃고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강진현 헌터.”

“별말씀을.”

두 남자는 마음에 전혀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고, 희나는 그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을 돕는 건 좋은 일이야.’

마음이 훈훈하게 달아오르려던 참이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커다랗고 작은 두 형체가 요란하게 굴러들어 왔다.

그중 작은 것은 데굴데굴 굴러 희나의 발치까지 당도했다.

챠르륵! 챠챠챱!

그중 큰 것, 그러니까 바둑이는 바닥에 엎어지자마자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후다닥 덩굴을 뻗어 작은 것, 오색이를 수습했다.

희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둑이와 오색이를 바라보았다.

“둘이 뭐 해? 손님 있는 동안은 없는 척하면서 얌전히 지내기로 했잖아.”

특히 바둑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누가 봐도 식물형 몬스터처럼 보이는 생물을 집 안에서 키우고 있다니…… 그렇지 않아도 이상해 보일 집 안이 더 수상해 보일 게 틀림없었으니까.

“약속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나랑 손가락까지 걸었잖아!”

희나가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자 바둑이가 깨갱, 하고 뒤로 슬쩍 물러섰다.

이 와중에 오색이는 스리슬쩍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금기는 어길 수밖에 없는 것;」

결국 하지 말라니까 더 궁금했다는 소리였다.

「금단의 사과는 달콤……! 도움! 도움! 어지러움! 꽥!」

그러다 결국 오색이는 눈치 좋은 바둑이에 의해 응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희나, 저것들은 뭐예요?”

바둑이와 오색이를 보아 버린 파비안 앳킨스의 기억만은 무를 수 없었다.

희나는 반려 달팽이 하나와 반려식물 하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얘네들도…… 파비안 씨가 지켜야 할 제 비밀 중 하나예요. 기억하죠, 아까 그 맹세? 여기서 본 건 전부 비밀에 부치겠다고 한 거.”

그러자 파비안이 감탄했다.

“와. 희나, 비밀 많은 여자였군요. 어쩐지 매력이 느껴지더라니.”

기어코 그는 강진현의 심기를 건드리고야 말았다.

강진현이 조용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기까지 봤는데 그냥 처리해 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희나 씨?”

희나는 질겁했다.

“으악, 진현 씨! 주먹의 그 기운! 기운 넣어 둬요!”

“그러면 딱 한 대만 치겠습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침구에 피는 안 튀게 할 테니…….”

“진정, 진정해요!”

희나는 대단하게만 보였던 강진현의 인내가 질투 앞에선 굉장히 얄팍해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배웠다.

지난 몇 개월간 희나만 몰랐던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 * *

파비안이 미국에서 희나에게 집적거리던 장면을 보았기 때문일까?

강진현은 파비안을 유독 못 견뎠다.

그런 의미에서 파비안의 회복과 귀가를 누구보다도 원하는 사람 또한 강진현이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진현은 파비안을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자면, 다소 거친 방식으로) 치워 버리고 싶어 했지만…… 희나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한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으니.

희나는 강진현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진현 씨, 조금만 더 참아요.”

시무룩한 낯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껴안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인 희원이 있는 집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진현 씨와의 관계도 못 밝혔는데.’

희원은 강진현에게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으니, 둘 사이를 딱히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한테 소개라니. 꼭 결혼 허락받는 것 같잖아.’

자기 연애 사정을 혈육에게 알리는 것도 ‘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콧잔등을 찌푸리고 있으니, 강진현이 주름진 콧잔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희나는 민망해져서 헤헤 웃었다.

“방금 얼굴 되게 이상했죠?”

“아뇨.”

“그럼 왜 그랬어요?”

“귀여워서 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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