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81화
찢어진 장갑 사이로 아린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한기가 스멀스멀 스며들어 왔고 사지가 점점 둔중해졌다.
몸을 숨길 곳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사방은 설원이었다.
눈밭 위의 희디흰 몬스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지닌 인간인 파비안은 눈에 띄어도 너무 띄었다.
거기다 그는 부상까지 입었다. 발 딛는 곳마다 붉은 혈흔이 남았다.
몬스터들이 그를 놀잇감 삼아 포위해 왔다.
파비안 앳킨스가 이를 갈았다.
“젠장, 천하의 파비안 앳킨스가 이따위 개죽음을 당한다고? 이대로 죽을 수 없어!”
그는 고함과 함께 수십 개의 얼음 창날을 만들어 뿌렸다.
캐액!
쌔애애액! 날카로운 한기에 몬스터들이 순간적으로 뒷걸음질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컹, 하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마력이 동났어.’
달아날 곳도 없었다. 등 뒤는 높은 설산……. 이미 퇴로가 완벽히 차단된 지 오래다.
실혈이 많은 탓일까, 시야마저 가물가물했다.
죽음을 앞두고서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없으면 그 애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의 계획에는 이런 상황 따위 없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고, 파비안은 죽음 앞에서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무엇인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에게 어깨를 붙잡혀 뒤로 데굴데굴 나자빠졌다.
‘으윽!’
순간 머리가 띵할 정도의 고통이 몰려왔다.
상처 입은 어깨 쪽으로 사정없이 쓰러진 탓이다.
“……!”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누군가가 다친 어깨를 붙잡고 포션을 뿌리는 걸 느꼈을 때였다.
“……누, 누구?”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묻자마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어요!”
귀에 익숙한 언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통역 아이템을 상시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포션 잘못 뿌리면 상처 어긋나게 붙어요. 살 틀어지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그나저나 진현 씨, 이 사람 상처 아물면 안으로 좀 옮겨 주세요.”
연이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외부인을 이런 식으로……”
“구해 버렸는데 죽게 둘 수는 없잖아요.”
“집 안에 들이는 건 반대입니다. 위험합니다.”
“저것 봐요. 손발이 덜덜 떨려요. 텐트랑 침낭 펴기 전에 설원에서 저체온증으로 죽겠어요.”
그 소리에 파비안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물가물한 시야로도 시체처럼 죽어 있는 피부를 분간할 수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추운 곳에서 피까지 많이 잃은 탓이다.
파비안은 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알록달록한 겨울옷을 입었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내가 환상을 보는 건가?’
이 설원에서 저런 차림새를 하고 있으면 몬스터에게 공격받기 십상일 텐데…….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너덜너덜해진 육체는 더는 정신을 지탱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는 의문과 함께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파비안 앳킨스는 흐린 눈을 끔뻑거리다 그대로 기절했고, 희나는 강진현을 재촉했다.
“악! 사람 죽어요! 진현 씨, 빨리요!”
“기절한 겁니다. A급 포션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파비안 앳킨스 정도면 꽤 실력 있는 각성자입니다. 이 정도론 안 죽습니다.”
“아니, 근데 이 사람 얼굴이 점점 새파래지는데요?”
희나의 지적대로 파비안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고집을 더 부릴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강진현은 한숨과 함께 파비안을 어깨에 둘러멨다. 피를 철철 흘리던 부상자를 옮긴다기엔 다소 무성의한 태도였다.
차라리 쌀 포대를 드는 게 더 성의 있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희나는 그런 그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따뜻한 데 두고, 포션 좀 더 먹이면 멀쩡히 깨어날 수 있겠지?’
그러면서 붉은 선 바깥, 그러니까 ‘홈 스위트 홈’ 안전지대 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크르르르!
쿠아아아앙!
흰 털을 가진 몬스터들이 코를 킁킁대며 붉은 핏자국이 남은 눈 더미를 뒤집어엎고 있었다.
방금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인간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질 만치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희나는 별로 겁먹지 않았다.
‘여긴 안전해.’
홈 스위트 홈 안전지대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를 알고 찾아도 인지 능력을 완전히 뒤틀어 버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홈 스위트 홈’의 존재를 모르는 몬스터 따위가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한편, 희나는 발밑의 핏자국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휴, 하마터면 코앞에서 사람 죽는 거 볼 뻔했잖아? 그것도 아는 사람!’
오늘 이 설원 던전에 나온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강진현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나올 일이 없었을 거였다.
희나는 강진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꼭 겨울엔 여름이 그립고, 여름엔 겨울이 그리워요. 계속 날이 더우니까 눈 보고 싶네요.’
‘그럼 눈 보러 갈까요?’
‘이 날씨에 어떻게 눈을 보러 가요?’
‘던전이 있지 않습니까. 눈 오는 설원을 떠올리면서 이동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러게요!’
제법 그럴싸한 제안이었다.
희나와 강진현은 후다닥 겨울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눈 오는 장면을 생각하며 문을 여니, 역시나 상상과 가장 흡사한 던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이다! 여기 너무 예쁘네요!’
희나는 잔뜩 신이 나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퍼 담아 하늘에 뿌렸다. 나풀나풀 흩날리는 눈 아래에 서 있으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예. 아주 보기 좋습니다.’
강진현도 이곳이 마음에 드는 듯, 눈을 휘며 웃어 보였더랬다.
설원의 눈이 모두 녹아내릴 만큼 잘생긴 미소였다.
이런 사람을 애인으로 둔 사람은 정말 행복할 것…….
‘……아니, 아니. 이런 건 그만 생각하고!’
희나는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아무튼, 희나는 강진현과 함께 눈밭에서의 고즈넉한 시간을 즐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강진현은 많이 바빴다.
덕분에 이렇게 희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희나 씨.’
강진현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희나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에요?’
‘드릴 게 있…… 아니, 아닙니다.’
순식간에 강진현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핑크빛 분위기도 깨져 버렸다.
덩달아 희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진현 씨?’
‘무엇인가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몬스터 떼인가?’
‘글쎄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의 정체는 드러났다.
‘……사람?’
남자는 몬스터들에게 쫓긴 지 오래된 듯, 피투성이였고 잔뜩 지쳐 보였다.
그는 피를 흘리며 ‘홈 스위트 홈’의 안전지대 근처까지 접근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고, 희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파비안 앳킨스?’
아주 잘 알다 못해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파비안은 죽음을 앞두었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 형형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무리를 이룬 몬스터 떼가 달려들었고……!
오래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희나는 있는 힘껏 팔을 뻗어 파비안을 안전지대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강진현에게 포션을 받아 그를 치료하고 집 안으로 들였다.
‘진현 씨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겠지만…….’
물론 강진현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파비안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는 희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걱정했다.
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람 죽는 걸 어떻게 보고 있어?’
희나는 사람 죽는 걸 차갑게 외면할 수 있을 정도의 냉혈한은 아니었다.
‘그대로 밖에 두었다가는 얼어 죽어 버렸을 거라고!’
일단 살릴 수 있으면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할지는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희나는 신발 끝으로 눈밭을 툭툭 차올려 파비안 앳킨스가 흘린 핏자국을 덮었다.
그사이 닫혔던 현관문이 열리고, 잘생긴 얼굴이 빼꼼 나왔다.
“희나 씨, 춥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네! 알았어요!”
희나는 자신을 부르는 강진현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 * *
목이 타다 못해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으…… 으으.”
고통스레 신음하자, 챡챡챡 하는 차진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남자 목소리였다.
“아이고, 그래요. 우리 바둑이 똑똑하네! 사람 정신 차린 것도 알려 주고. 참 잘했어요! ……희나야! 사람 깼다!”
의미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건 맞는 듯했다.
“무, 물…….”
입을 간신히 움직여 단어를 말하자 이내 몸이 일으켜 세워지고 입술에 미지근한 것이 닿았다.
“마셔요.”
파비안은 천천히 물을 받아 마셨다. 마른 목구멍을 적시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덩달아 멍하니 굳어 있던 머리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깨끗한 방 안이었다.
‘병원은 아닌 것 같은데.’
소독약 냄새가 없었고, 생활감도 물씬 풍겼다.
“그쪽, 실혈이 많아서 그런지 꼬박 하루 동안 못 일어났어요.”
그제야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피비린내 나는 혈투와 지독한 추위…….
‘설원 던전에서 죽을 뻔했지.’
몬스터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누군가가 그를 끌어당겼다.
“……당신이 나를 살렸습니까?”
파비안은 고개를 들어 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러난 익숙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희, 희나?”
희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네. 저예요. 차마 죽는 걸 보고 있을 순 없어서…….”
희나는 한숨과 함께 이런저런 말을 주절거리다 아차, 하고 품에서 작은 물약 병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우선 포션부터 먹어요. 몇 병 먹여 두긴 했는데, 많이 흘려 가지고……. 직접 먹는 편이 낫겠죠.”
“이건…….”
파비안은 자신의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A급 포션?’
아니, 보통의 A급 포션이 아니었다. 준S급에 달하는 최상급 A급 포션이었다.
‘나는 분명히 던전에 홀로 입장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있지? 그리고 희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고, 그 전에 여기는 어디인 거지?’
파비안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입 밖에 꺼내는 대신 포션을 받아 마셨다.
일단 궁금증이고 나발이고 걸레짝이 되었던 몸 상태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