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80화
희나는 미주알고주알 파비안 앳킨스의 뒷말을 풀어놓았다.
“물론 제 스킬로 가능한 일이긴 해요. 하지만 그걸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 감만 믿고 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 수 있는 걸까요?”
“실제로 감이 좋은 자긴 합니다. 투자 쪽에서도 꽤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하고…… 대중이 무얼 좋아할지, 어떻게 움직일지 반보 먼저 움직이는 재주가 있죠.”
의외의 호평에 희나는 고개를 들어 강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싫어할 줄 알았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그러자 강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희나는 다시 한번 절감했다.
‘진현 씨는 S급 마음씨를 가진 게 분명해!’
이 정도면 거의 성인, 아니, 천사가 아닐까?
희나는 두 손을 모아 감동하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제 생각에는 그 사람한테는 꽤 중요한 용무 같았어요. 어지간해서는 자기 속을 밝힐 것 같은 사람이 아닌데, 지난번 바에서 만났을 때는……”
“……방금 바,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술 마시는 바?”
“아, 지난번에 저 술 마시고 들어왔잖아요. 그때예요.”
강진현과 입을 맞춘 후,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가 술을 퍼마셨던 날이었다.
생각해 보니 꽤 민망한 일화라서 희나는 얼굴을 살풋 붉혔다.
“그날 우연히 파비안 앳킨스를 만났거든요.”
“……우연히, 만나셨군요.”
“네. 그때 그 사람이 자기 명함 주면서 소원 던전에 꼭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가벼운 관심 정도만 가진 척했는데 말이에요.”
“……술을, 마시고 명함까지 주었다고요?”
혹시 오해라도 할까, 허둥지둥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 각자 마시면서 얘기했고, 몇 분 안 돼서 금방 헤어졌어요. 명함은 버렸고요.”
그러자 강진현이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술에, 연락처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잘도 숨겼네요.”
“예?”
희나가 되묻는 순간, 콰드득,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었다.
“희나 씨, 무슨 문제라도?”
심지어 희나보다 몇만 배는 더 민감할 강진현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니, ‘내가 헛것을 들었나?’ 하고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아무튼, 그 사람하고 얽힌 일은 이 정도예요. 볼 때마다 은근슬쩍 던전 얘기만 꺼내고 자기 멋대로 사라져 버렸던 게 다예요.”
희나는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마쳤다.
그리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강진현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희나 씨 잘못은 없습니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도…… 내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요. 아까 잠깐 기분 상한 건 맞잖아요.”
실제로 파비안을 향해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살기를 뿜어냈지 않은가?
“그 사람 얘기를 미리 안 해 둬서 진현 씨가 많이 놀랐겠더라고요.”
손등을 토닥이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진현 씨도 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해 줘요. 저는 진현 씨처럼 속이 넓지 못해서 질투하고 화낼 수도 있어요.”
키득거리며 속삭이는데, 촉촉하고 뜨끈한 것이 볼에 닿아 왔다.
강진현의 입술이었다.
“어?”
깜짝 놀라 타조처럼 고개를 휙 뒤로 빼 버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 진현 씨! 누가 보면 어쩌려고!”
쩔쩔매며 눈치를 살피는 희나를 보고 강진현이 눈을 빙그레 휘었다.
“얼마든지 화내고 질투해 주십시오. 희나 씨가 해 주시는 건, 뭐든 환영입니다.”
“으……!”
주변이 어두워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들켜 버렸을 테니까.
* * *
아침 일찍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와중이었다.
“희나 씨! 희나 씨!”
마리안이 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작별 인사치곤 굉장히 시끄러운데요?”
씨익 웃자 마리안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가기 전에 대단한 소식 하나는 알고 가야지, 싶어서요!”
“대단한 소식이요?”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긴 했지만, 희나는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장미 독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소식이겠지? 어제 나랑 진현 씨가 가서 쓱싹해 버렸으니까.’
내심 으쓱하며 자신의 활약을 감상하려는 순간이었다.
“파비안 앳킨스라고 알아요? 셀러브리티 헌터 말이에요.”
마리안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알긴 아는데……. 그 사람이 왜요?”
“파비안 앳킨스가 앞으로 이 마을을 정기적으로 후원하겠다고 약속하고 갔어요! 방금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와서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다고요!”
마리안은 파비안 앳킨스의 후원 규모가 상상 이상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면 정기적인 정화 비용은 충당하고도 남아요. 아, 맞다! 던전 관리까지 해 주겠다는 조항도 있었다니까요!”
그러면서 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제 던전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기가 갑자기 옅어져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던전이 클리어된 모양이에요. 우리 측 추측으로는 파비안 앳킨스가 기동대를 비밀리에 보내 처리하지 않았나, 싶어요.”
‘뭐? 그건 내가 한 일인데!’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에 희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 사람이 기동대를 왜 보내요? 그것도 비밀리에?”
“선한 일은 원래 겉보기에 드러나게 하는 법이 아니잖아요. 크, 선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죠?”
“…….”
희나는 침묵했다.
파비안 앳킨스를 파악해도 이렇게 잘못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 착각을 가만히 들어 주고 있을 수밖에.
한편, 한참을 신나게 떠들던 마리안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을 멈칫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앞뒤가 안 맞긴 하네요.”
“뭐가요?”
“말없이 던전을 클리어해 준 사람치고는 은근 뽐내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특히 마을 후원 소식은 이곳저곳에 잔뜩 알려 달라고 부탁하던걸요.”
특히 자선 바자회 관계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퍼뜨려 달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누가 봐도 노린 것 같은 행동…….’
싱글벙글 웃는 파비안의 얼굴이 눈앞에 절로 떠올랐다.
“물론 그런 조건을 안 붙이더라도 이런 빅뉴스! 는 전할 수밖에 없었겠지만요.”
마리안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거기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한 거 알아요? 세상에. 천하의 파비안 앳킨스가 잘 보이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이 대체 누굴까요?”
이런 쓸데없는 소리까지 던져 놓은 걸 봐선, 정말로 노린 게 맞았다.
“하……. 하하…….”
허허 웃으며 파비안 앳킨스의 집념에 감탄하고 있는데, 저 먼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야! 강진현! 차 문짝을 뜯어 버리면 어떻게 해? 오늘 이거 타고 가야 하는데!”
“……다른 차를 구해 보도록 하죠.”
“어쭈? 사고 쳐 놓고 미안한 표정도 안 지어? 나한테 불만 있어?”
“없습니다.”
“그런데 눈빛이 왜 그래?”
“제 눈빛이 어떻습니까?”
“당장 누굴 쥐어박으러 가고 싶은 표정인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민아와 강진현이 떨어진 자동차 문짝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진현 씨, 힘 조절이 잘 안 되나 보네.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봐. 하긴. 그동안 제대로 챙겨 주질 못했으니…….’
희나는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강진현에게 먹일 보양식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생각에 빠진 희나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하하! 자동차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쪽에서 하나 수소문해서 구해 줄게요.”
어찌 되었건, 미국에서의 마지막 스케줄은 성황리에, 아니,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14. 슈퍼스타와 살림꾼
던전 안에서는 통신 기기만 먹통이 될 뿐, 영상 녹화 정도는 거뜬히 가능했다.
던전이나 헌터와 관련한 소재로 영상을 찍어 돈을 쓸어 담는 이도 많았다.
파비안 앳킨스, 그도 비슷했다.
물론 그의 목적은 돈이라기보다는 유명세에 가까웠지만, 명성은 막대한 돈을 끌고 오기도 하니 어찌 되었건 비슷한 맥락이기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오늘도 적당히 화제를 끌 만한 영상을 찍을 요량으로 이 던전에 입장했다.
동료는 없었다. 오늘도 언제나 그렇듯 솔로 플레이였다.
하지만…….
“젠장!”
파비안 앳킨스는 피 섞인 기침과 함께 거친 욕지거리를 뱉어 냈다.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 욕설을 거의 쓰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오늘 내가 좆 되게 생겼는데 촬영이고 뭐고!’
파비안 앳킨스는 치명상을 입은 채 던전을 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이번 던전 토벌 영상 기획한 새끼들 전부 죽여 버릴 테니까!”
그는 빠득, 이를 갈며 자신을 이 거지 같은 던전으로 밀어 넣은 누군가를 저주했다.
‘이건 처음부터 뭔가가 잘못됐어.’
그가 미리 받아 보았던 던전 정보와 맞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정글 형태의 B급 파충류 던전이라고 했는데, 설원에 늑대개, 백곰류 몬스터라니.’
파비안은 수계, 빙계 복합 능력자였다. 변온 동물인 파충류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설원에 사는 몬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들 빙속성에 대한 내성이 있으니 유효타가 거의 먹히지 않았다.
심지어 몬스터의 수준 또한 A급을 상회했다. 솔로 플레이로는 공략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누군가의 고약한 계책에 속아 넘어간 게 분명했다.
‘누구지? 아니, 어디에서 일을 사주한 거지?’
머릿속에 수십 명의 얼굴이 스쳤다.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크어어엉!
흰 곰이 울부짖으며 파비안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붉은 눈에 살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윽!”
그는 눈밭 위를 굴러 공격을 피했다. 늑대개의 이빨에 관통당한 어깨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포션도 다 떨어졌군.’
사람들은 파비안을 가볍고 나서기 좋아하는 관심 종자라고만 알고 있지만, 그 또한 헌터. 고통과 부상에는 익숙했다.
홀로 위험을 맞닥뜨린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상황이 절망적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