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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79화 (17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79화

    희나의 물음에 먼저 반응한 건, 파비안 앳킨스가 아닌 강진현이었다.

    순간적으로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살기가 피어 나왔다.

    “지, 진현 씨?”

    희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강진현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 미안합니다. 놀라셨습니까?”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굉장히 곤두선 상태가 분명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빙그레 휘어 있던 눈이 날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변해 파비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파비안은 주춤하는가 싶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

    “오. 데이트 중이었나 봐요? 내가 방해한 건가?”

    ……정말로 얄미웠다.

    만약 희나가 강진현이었다면 주먹부터 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역시 진현 씨는 참을성이 좋아.’

    희나는 강진현의 곱디고운 인성에 감동하며 등 뒤에 숨긴 손을 꽉 마주 잡아 주었다.

    “…….”

    그러자 강진현의 기색이 한결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파비안 또한 그를 느꼈는지 작게 혼잣말했다.

    “내 말이 진짜였나 보네.”

    “그나저나 여기는 대체 왜 왔어요? 나 따라온 거예요?”

    “자선 파티에 무얼 하러 왔겠어요? 후원금 내러 왔지.”

    슬쩍 보니 옷을 빼입은 게, 누가 봐도 파티 참가자의 모습이었다.

    “나 같은 유명 인사는 어디든 초대받고, 어딜 가든 환영받아요.”

    그것참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럼 이상한 선물은 왜 보냈고요?”

    “이상한 선물이라니, 서운한데요. 나름 안목에는 자신 있는데…….”

    “그러고 보니 내 숙소는 어떻게 알았어요? 어라? 생각해 보니 내 옷 치수는 또 어떻게 알았고?”

    진짜 변태 보는 눈길로 째려보니, 파비안 대신 애먼 강진현이 찔끔하며 변명했다.

    “희나 씨, 저는 길드에 요청해서 정보를 받았습니다. 이상한 방법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어요.”

    “아니 거긴 찔릴 필요가 없는데…….”

    옆구리를 툭 치자 강진현이 턱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강진현을 조용히 시킨 후, 희나는 마저 따져 물었다.

    “아무튼, 파비안 씨. 별 사이도 아닌 이성한테 옷을 선물로 보내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요.”

    파비안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관심 좀 얻어 보려고 보낸 건데, 내가 영 헛짚었나 보네요.”

    “당연하죠! 사람의 호의는 이런 방법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흠. 그렇다면 반성할게요.”

    별로 반성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파비안 앳킨스라는 사람의 입에서 이 정도 말이 나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무어라 한마디 던지려고 하는데, 때맞춰 희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Rrrr…….

    담당인 마리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 어디 있어요? 특별 게스트 없이 모금 행사를 시작할 수는 없죠!

    “미안해요, 마리안. 나 지금 파티 홀 안에 있기는 한데……. 단상 쪽으로 가면 될까요?”

    - 네! 빨리 오세요! 사람들이 말 걸어도 적당히 무시하고요.

    행사 준비가 바쁜지, 마리안은 그 몇 마디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눈치 빠른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국 떠나기 전 마지막 행사라고 해서 특별히 신경 쓴 거였는데. 뭐, 그럼 호감 살 만한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무엇보다 희나에게 더 치근대다가는 옆에 선 남자, 강진현에게 갈기갈기 찢기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비밀 데이트는 잘 마무리하시고.”

    파비안은 언제나 그래 왔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폭풍 같은 남자였다.

    희나는 슬쩍 강진현의 눈치를 보았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지?’

    희나도 역지사지란 것을 할 줄 알았다.

    강진현과 둘이 있는데 모르는 여자가 와서 강진현에게 친한 척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호감이 있는 걸 표현한다면…….

    ‘그럼 기분 엄청 나쁘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진현 씨한테 빨리 해명을…….’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희나 씨, 시간이 급한 것 같은데 빨리 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진현이 몹시 다정스러운 어조로 희나를 재촉했다.

    그러면서 손수 희나를 단상 앞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하니, 도중에 무어라 입을 열 기회가 없었다.

    아니, 묘한 분위기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쪽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하, 한마디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무섭지?’

    그다지 덥지도 않은데, 괜히 식은땀이 맺힐 정도였다.

    강진현은 희나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보고 있을 테니, 자선 행사 무사히 끝마치고 오십시오.”

    “지, 진현 씨, 아까 일은……”

    “괜찮습니다. 나중에 마저 이야기해요. 희나 씨, 저 화 안 났으니까 그렇게 당황한 표정 짓지 말고요.”

    “……네에.”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다녀올게요.”

    그저 손을 흔들고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자선 행사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묘한 표정을 짓던 강진현의 모습이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희나는 최대한 열심히 자선 행사에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후원금을 기부했고, 그때마다 마리안의 입꼬리는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행사가 조금만 더 길어졌거나, 모금액이 좀 더 모였더라면 마리안은 희나에게 입맞춤을 마구 날렸을지도 몰랐다.

    “최고예요! 역대 최고 금액을 찍었어요!”

    “다행이네요. 마을 사람들 돕기엔 충분한 금액이에요?”

    “그럼요! 사설 정화팀 몇 번은 부를 수 있을 정도예요.”

    “몇 번……밖에 안 돼요?”

    마리안의 대답에 희나는 내심 실망했다.

    장기간 독기에 노출되어 있었던 마을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아서, 고작 정화 작업 몇 번으로는 제대로 회복하기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은 내가 던전을 클리어해 뒀으니까 괜찮다고 치더라도…… 리셋되면 원상 복귀되는 거 아니야?’

    좋은 마음으로 참여한 행사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안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희나를 위로했다.

    “이 일이 다 그렇죠. 단번에 일이 뿅, 하고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 될 걸 아니까 계속 이런 행사를 열고, 사람을 돕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좀 더 나아지겠죠. 지치면 안 돼요, 희나 씨.”

    “……그러네요. 좋은 말 해 줘서 고마워요, 마리안.”

    “별말씀을요. 오늘이 미국 일정 마지막이라고 했죠? 더 화려한 일들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고생해 줘서 우리야말로 고맙죠. 희나 씨 아니었으면 이번 프로젝트는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희나와 마리안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럼 오늘 수고했어요.”

    숙소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마리안의 휴대전화가 웅웅 울렸다.

    “잠시만요, 희나 씨. 이건 비상시에만 쓰는 번호인데…….”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은 마리안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물으니, 마리안이 끙 하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습격이 있었다네요.”

    무시무시한 단어 선택에 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 습격이요?”

    “오늘 우리 자선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 유명인이 꽤 있었거든요. 그중 한 명이 극성팬에게 공격을 받았나 봐요.”

    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그 사람은 괜찮대요? 범인은 잡았고요?”

    공격받은 사람의 안위도 문제였고, 혹여나 그 사람이 이 행사의 보안 문제를 꼬투리 잡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뭐든 마지막 마무리가 가장 중요한 법인데, 이런 사건이 생겨 버리다니.

    “상급 헌터라 찰과상 정도만 입고 끝났고, 우리 측에 딱히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고 했대요.”

    “……다행이네요.”

    “그렇죠?”

    “미국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잔뜩 일어나는 나라네요.”

    “그럼요. 미국인걸요.”

    마리안이 쿡쿡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희나 씨.”

    옷을 갈아입고 후다닥 화장을 지우자마자 강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 설명할 게 있어요. 숙소 입구에 서 있을 테니까, 꼭 나와야 해요!”

    혹시라도 강진현이 피하기라도 할까 봐, 후다닥 말을 전한 후 뚝 끊어 버렸다.

    ‘으아아. 어떻게 해!’

    심장이 벌렁거렸다.

    사실상 희나가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의도치 않게 강진현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파비안 앳킨스!’

    희나는 파비안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유명하다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접근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긴 했다.

    ‘단순히 소원 던전이 궁금해서라기엔 너무 절박하게 매달리는 거 아니야? 그 사람도 저주에 걸려 있다거나?’

    고개를 휘휘 가로젓고 있을 때였다.

    “희나 씨.”

    강진현이 나타났다.

    “저녁 바람이 서늘합니다.”

    그는 얇은 희나의 옷차림이 신경 쓰이는 듯, 인벤토리에서 담요를 꺼내 덮어 주었다. 이루 말할 데 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희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좋은 사람 마음을 속상하게 했네.’

    행사 시간 내내 온갖 생각에 마음 졸였을 강진현에게 미안함도 느꼈다.

    심지어 그는 아까 일은 완전히 잊은 듯, 묘하게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마음이 넓은 남자였다!

    희나는 주저하다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아까요.”

    “예.”

    “아까, 갑자기 그 사람이 아는 척해서 많이 놀랐죠?”

    “아닙니다. 그ㄴ…… 남자가 희나 씨에게 일방적으로 접근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반대 상황이었으면 전 되게 마음이 상했을 것 같아서요.”

    절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제로 파비안 앳킨스가 온갖 친한 척은 다 하고 가지 않았던가?

    ‘별별 의미심장한 말이란 말은 다 남기고!’

    희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해명했다.

    “예전에 그 사람이랑 처음 마주쳤을 때 이후로 몇 번 더 본 사이긴 해요.”

    “그렇군요.”

    “글쎄, 저한테 소원 던전을 출입하게 해 달라고 접근하지 뭐예요? 자기 감이 그렇게 얘기한대요. 이상한 사람이죠? 전 그냥 평범한 비전투계 각성자일 뿐인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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