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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78화 (178/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78화

    “그럼 나머지 한 벌은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거예요?”

    “응. 둘 다 누가 보냈는지 안 써 놨네. 거 참, 생색낼 줄 모르는 양반들일세.”

    “으으. 어쩌지?”

    곤란해하는 희나의 모습에 우민아가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뭘 어째? 선물 온 건데 둘 다 해. 오늘은 적당히 아무거나 입고 나가고. 파티 시간도 다 돼 간다. 시간 없어.”

    “저, 적어도 진현 씨가 준 걸 입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급하게 강진현에게 연락했지만, 그는 무얼 하고 있는지 연락을 받지 않았다.

    결국 희나는 두 벌 중 한 벌을 선택해 입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 * *

    ‘으, 어색해라.’

    희나는 시원하게 드러난 맨팔을 쓱쓱 문질렀다.

    추워서는 아니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런 공주 같은 드레스를 입을 기회가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만약 오빠가 본다면 낄낄거리면서 엄청나게 놀릴 게 분명했다.

    “어깨 펴! 대장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는다!”

    우민아는 계속하여 희나의 귓가에 대장부가 가져야 할 덕목을 속닥거렸다.

    “대장부는 뭇사람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지!”

    희나는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아니, 그냥 어색해서 그런 것뿐이라고요…….”

    우민아 또한 시원하게 파인 드레스 차림이었으므로 민망함은 조금 덜했다.

    희나는 우민아를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민아 언니는 키도 크고 늘씬해서 파격적인 디자인도 잘 어울리네.’

    그녀는 화통한 성격처럼 짙은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활동성을 고려한 듯 치마 옆이 길게 트여 있었다.

    ‘모델 같아. 그에 비해 나는 좀…….’

    희나는 자신이 입은 칵테일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무릎 기장 정도에서 사락거리는 치맛자락은 그저 해맑게만 느껴졌다.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민아처럼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희나는 우민아의 곁에 딱 붙어 파티장에 입장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와! 멋있다.’

    주최 측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하던 커뮤니티 회관을 제법 그럴싸하게 리모델링했다.

    제법 유명한 사람들을 초청했다더니, 그에 뒤지지 않게 자선 파티를 준비한 게 티가 났다.

    “언니, 이제 뭐 해야 해요?”

    희나는 알록달록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우민아에게 귓속말했다.

    “음식 먹고, 술도 좀 마시고, 적당히 사람들이랑 얘기도 좀 하고 그러는 거지.”

    “모르는 사람들이랑요?”

    “엉. 너 보러 온 사람 많으니까 사람들이 먼저 말 걸어 줄 거야.”

    이런 식의 파티 문화는 희나에게 제법 낯설었다.

    침을 꼴딱 삼키고 있는데, 옆에서 우민아가 킬킬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혹시 이상한 놈 있으면 내가 예전에 준 과도로 찔러 버려.”

    “……네.”

    그것참 사람 마음 안심시켜 주는 조언이었다.

    “그럼 나 음식 좀 가지고 올게. 파티장 좀 구경하고 있어라.”

    우민아는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향해 쌩하고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먹는 거 참 좋아한다니까.’

    허허 웃으며 주변을 구경할 때였다.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누군가의 시선을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강진현이 있었다.

    희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현 씨!”

    “희나 씨.”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희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요?”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자 강진현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 주었다.

    “인지 방해 아이템을 끼고 있었는데요.”

    이번 감정 학회에서 새로 구매한 아이템이었다.

    길을 가기만 하면 몰려드는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희나가 사용하던 것인데, 지금은 정체를 감추어야 하는 강진현이 끼고 있었다.

    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그래도 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진현 씨인데, 알아봐야죠.”

    가까운 사람이니 그 효과가 미미하게 나타났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진현은 그 사실이 못내 감동스러운 모양이었다.

    무뚝뚝하기만 했던 입꼬리가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거기다 다정함이 담긴 눈이 부드럽게 휘어 있기까지 하니…….

    희나는 손을 들어 강진현의 입매를 가려 주었다.

    “계속 그렇게 웃다간 다른 사람들이 진현 씨 정체를 눈치채 버릴 수도 있어요.”

    강진현의 미모(?)는 그야말로 낭중지추라, 인지 방해 아이템의 효과를 뚫고 타인의 시선을 잡아끌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당연히 눈길이 쏠리겠지!’

    희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강진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인적 좀 드문 곳으로 가요. 눈길 쏠릴라.”

    “……예.”

    강진현은 어쩐지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소곳이 희나의 뒤를 따랐다.

    “여긴 사람이 좀 없네요.”

    사람이 잔뜩 몰린 커뮤니티 홀 중심부와 다르게, 창가 쪽으로 오자 다소 한적한 분위기가 흘렀다.

    “뭐 좀 먹을래요? 아니, 여기 음식은 진현 씨 입맛에 안 맞겠구나. 뭐라도 먹을 거 좀 해 올 걸 그랬네요. 입 심심하겠다.”

    평소 버릇대로 그를 요모조모 챙기려 드는데, 강진현이 슬쩍 손을 바꿔 잡아 왔다.

    덕분에 희나는 어느새 손깍지를 단단하게 잡힌 꼴이 되었다.

    ‘어머.’

    희나는 슬쩍 귓불을 붉혔다.

    강진현의 커다란 손을 마주 잡으려니 손가락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미, 민아 언니나 원호 씨, 상훈 아저씨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지만 강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깍지 낀 손을 등 뒤에 잡아 숨겼다.

    그러자 둘 사이는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한층 가까워졌다.

    “이렇게 감추면 괜찮습니다.”

    대답에 푸슬푸슬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현 씨, 은근 뻔뻔하네요?”

    말이야 그렇지, 희나도 지금이 싫지 않았다.

    닿은 손끝부터 시작해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게, 하늘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래서 연애하나 봐.’

    이렇게 좋은 걸, 왜 여태껏 할 생각 없이 지냈을까?

    ‘그러고 보니까 진현 씨랑 나, 사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다 해 본 것 같기도 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데이트도 하고, 둘이 식사도 자주 했고, 연락도 자주 하고, 심지어 꽃도 받아 봤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모두 연애의 전조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희나는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을 파닥이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강진현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립니다.”

    “네?”

    “그…… 옷 말입니다. 예쁩니다.”

    여기까지 대답한 그는 조금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한껏 꾸민 희나에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시선이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꺅!’

    희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예쁘다는 칭찬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어떤 차림을 해도 잘 어울리지만…… 오늘은 유독이요.”

    그것도 좋아하는 상대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데, 설레지 않을 리가!

    ‘시, 심장에 무리가 온다!’

    희나는 당장이고 심장을 부여잡고 홀 바닥을 뒹굴고 싶은 욕망을 애써 내리눌렀다.

    설렘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을 순 없었다.

    희나는 애써 입을 열어 칭찬을 되돌려 주었다.

    “고, 고마워요. 진현 씨도 멋져요.”

    강진현이야 눈에 띄지 않도록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었을 뿐이지만, 뭐든 옷걸이가 가장 중요한 법이다.

    훤칠하고 번쩍번쩍하게 빛이 났다.

    인지 방해 아이템 때문이라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잔뜩 몰리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이 옷, 진현 씨가 해 준 거라면서요? 엄청 좋아 보이는데…… 고마워요. 제 마음에도 쏙 들고요.”

    조심스럽게 감사 인사를 건네자 강진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희나 씨는 노란색을 좋아하니, 노란색 드레스가 가장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색까지 신경 써서 골라 준 거예요? 어쩐지.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의 눈동자에 기쁨이 스쳤다.

    ‘다행이다.’

    희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색과 노란색, 두 벌의 드레스가 선물로 도착했는데 강진현이 보낸 건 노란색이 맞았나 보다.

    ‘푸른색 드레스 입고 왔으면 엄청 섭섭해했겠지?’

    슬픈 눈에 축 늘어진 눈꼬리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강진현의 모습을 생각하니 상상이나마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홀 한구석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파티 주인공이 이렇게 외진 데 숨어 있을 줄이야.”

    익숙하지만 썩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파비안 앳킨스?”

    “아이템 꼈는데도 알아봐 주네요? 감동이에요.”

    씨익 끌어 올리는 잘생긴 입꼬리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제가 아는 한 이 시간에 선글라스를 끼고 다닐 사람은 한 명밖에 없어서요…….”

    “어쨌든 알아봤다는 게 중요한 거죠. 안 그래요?”

    파비안은 선글라스를 슬쩍 끌어 올리며 희나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서운한 낯을 했다.

    “헌데…… 내가 보낸 선물은 별로였나 봐요?”

    “선물이라뇨?”

    “드레스 말이에요. 자선 파티가 있다고 해서 좋은 걸로 맞춰 보냈는데. 내가 보낸 드레스랑은 다른 걸 입고 있네.”

    “……그걸, 그쪽이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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