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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75화 (17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75화

    희나의 시선을 잡아끈 건 바로 ‘자선 바자회’라는 글자였다.

    ‘바자회?’

    태블릿을 터치하여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니, 행사의 취지와 관련 정보가 떴다.

    “미관리 던전 피해 구역 구제를 위한 정기 자선 사업이라…….”

    첨부한 사진과 피해 구역의 실정을 보니, 절로 침음이 터져 나왔다.

    “미국도 던전 피해가 심각하네요.”

    미국은 넓은 국토만큼이나 길드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길드로도 우후죽순 생겨나는 던전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고로, 외지고 가난한 지역의 가치 없는 던전은 자연스레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지금 사진과 영상을 통해 희나의 눈앞에 뜬 지역도 그런 곳이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밥 먹듯 일어나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라…….’

    이제는 손쓸 겨를도 없이 심각한 상황이 된 게 짧은 소개로도 한눈에 파악될 정도였다.

    희나는 패드에 첨부된 사진과 영상을 보며 혀를 찼다.

    “아니, 이런 환경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예요?”

    그야말로 심각했다.

    마을 반경 10km 내외에 독 던전이 있다는 코멘트가 붙어 있었는데, 던전에서 나온 독기 때문에 지표면이 시커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철근이 부식되어 건물 곳곳이 무너져 갔다.

    나무와 풀은 말라 죽었고, 야생 동물의 사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그곳에 사는 사람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사람들 피부가…….”

    독기에 잠식당한 피부는 얼룩덜룩했고,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말라 있었다.

    카메라 렌즈와 마주한 두 눈 안에는 희망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국가에서 지원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희나는 분개하며 보고서 페이지를 죽죽 넘겼다.

    한참 뒷장에 이르러서야, 주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 아래 분기별로 정화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나왔다.

    해당 던전의 몬스터가 부동형 식물이라 던전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독기만 적당히 처리해 주는 판국이었다.

    물론 그 횟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번 바자회는 이 마을처럼 소외된 지역을 알리고, 장기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었다.

    “마음이 갑니까?”

    “그건…….”

    강진현의 물음에 희나는 머뭇거렸다.

    신경이 쓰이는 건 맞았지만, 자기 때문에 일정이 너무 밀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속내를 어찌 읽었는지 강진현이 손끝으로 태블릿 PC를 톡, 쳤다.

    암전되었던 화면이 다시 환히 밝아지고, ‘바자회’라는 글자가 떴다.

    “마음이 움직인다면 해야지요.”

    “맞아. 하고 싶으면 해. 강진현 해주의 일등 공신은 바로 너야. 이 정도는 해도 돼!”

    우민아까지 등을 떠밀어 주니,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 바자회만 참가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요, 우리.”

    마지막 일정은 훈훈한 봉사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제가 여기서 핫도그를 만들면 된다는 소리죠?”

    “여기 위에다 소스만 뿌려 줘도 돼요! 얼굴! 얼굴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자기를 마리안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껄껄 웃었다.

    “희나 씨가 온다고 지역 커뮤니티에 싹 소식 돌렸다고요! 다들 난리가 났어요! 옆 주에서도 바자회 오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대요.”

    “에이, 설마요.”

    “원래 이런 지역에서 행사 진행하면 무섭다고 참가 잘 안 하는데, 이번엔 벌써 대흥행 조짐이 보이네요!”

    “하하, 마리안 씨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큰 나라 사람이라 그런지 과장도 통이 컸다.

    적어도 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시간 동안 내리 일하다 쉬는 시간을 겨우 얻었다.

    “아이고, 허리야.”

    희나는 핫도그 트럭에 앉아 혀를 내둘렀다.

    ‘해도 해도 사람이 안 줄어들잖아?’

    며칠 전, 자선 사업을 위해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황량하게만 느껴지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그 황량하던 마을이 단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활기차게 변했다.

    ‘대단하네. 거기다 다들 엄청 쾌활해.’

    사람들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은 맥주를 마시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나의 핫도그를 기다리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마리안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줄 제대로 서세요! 새치기하면 맨 뒤로 끌어내 버릴 겁니다! 인당 개수 제한은 두 개까지!”

    복작복작 모여 있는 것이 불편할 법도 한데, 사람들은 불평 하나 없이 지시에 따랐다.

    지루하기는커녕 몹시 흥이 나 보였다.

    “얼마나 맛있을까? 핫도그 차에서 풍기는 냄새만 해도 끝내주는데…….”

    “완전 맛있어요! 방금 한 개 먹고 또 먹으려고 줄 섰잖아요! 이번에는 두 개 사서 내가 혼자 다 먹으려고요.”

    “천상의 맛이야!”

    키 큰 남자 하나가 침을 튀겨 가며 설명했다.

    “이건, 정말이지! 천국에 있을 우리 할머니도 인정해 주실 만한 맛이라니까!”

    어쨌든 돌아가신 할머니를 걸 만큼 맛있다는 뜻이리라.

    누군가가 설명을 덧붙였다.

    “빵도 빵인데, 소시지가 죽여줘! 씹을 때 탁, 하고 입안에서 육즙이 터지는데……. 와우. 이건 말로 설명 못 해. 거기다 다진 피클의 조합은 또 어떻고? 여기에 머스터드까지 뿌리면 게임 오버지.”

    말재간이 어찌나 현란하던지…… 희나의 핫도그를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 침을 꼴깍 삼켰다.

    “빨리 먹고 싶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잠깐 쉬는 시간이라 줄이 밀리는 거라는데? 핫도그 나오기 시작하면 줄 금방 사라질 거야.”

    “기대되는군.”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대 어린 목소리에 희나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그리고 힘내서 많이 팔자!’

    희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입에 주먹밥을 욱여넣었다.

    눈앞에 상태 회복 창이 떴다.

    밥심 스킬 덕에 어지간한 포션 한 병보다 주먹밥 한 알이 훨씬 더 유용했다.

    “진현 씨도 드실래요?”

    희나는 트럭 옆자리에 앉은 강진현에게도 주먹밥을 권했다.

    그는 희나가 구운 소시지를 받아 빵 사이에 끼우고, 토핑을 올리는 등…… 핫도그 장사를 돕고 있었다.

    물론 모자를 푹 눌러쓰는 등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는 아이템을 착용한 채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희나 씨 많이 드십시오.”

    강진현은 고개를 저으며 희나에게 제 몫의 주먹밥 하나를 권했다.

    “오늘 뭐 드신 게 없는데……. 저만 먹는 건 미안하잖아요.”

    “희나 씨 드시는 거 보면 안 먹어도 배부릅니다.”

    그러면서 슬쩍 눈을 휘어 보이는데, 희나는 강진현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뭐, 뭐야!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생각해 보니 원래도 이런 낯간지럽게 오해 살 만한 말을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때랑 느낌이 또 엄청나게 다른데?’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희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강진현의 입 앞에 주먹밥을 들이밀었다.

    “그, 그럼 나눠 먹어요! 사람이 밥심으로 일해야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안 돼요!”

    “그렇습니까?”

    희나의 고집 아닌 고집에 이내 강진현은 고개를 내밀어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는 주먹밥을 잠시 우물거리며 씹더니 빙그레 웃음 지었다.

    “역시, 맛있습니다.”

    평소와 같은 칭찬인데, 유독 쑥스럽게 여겨지는 건…… 아마 그와의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리라.

    희나는 남은 주먹밥을 입안에 마저 털어 넣었다.

    “가, 간이 잘됐더라고요. 주먹밥은 짭짤하고 고소해야 제맛이죠.”

    “맞습니다. 깨소금도 들어갔군요.”

    깨소금 이야기에 희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역시 그렇죠? 깨가 들어가야 씹는 맛도 있고, 보기도 좋고! 고소하고! 맛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팔콘 길드에서 구해다 준 재료입니까?”

    “아, 잠깐 집에 가서 가져온 거예요. 화장실 다녀오는 척하면서요.”

    키득거리며 비밀을 실토하자, 강진현도 픽 웃었다.

    “용의주도하시군요.”

    “별말씀을!”

    별 내용은 없었지만, 대화는 이루 말할 바 없이 유쾌했다.

    제대로 연인이 된 후 첫 데이트 자리가 작은 핫도그 트럭 안이 된 게 조금 우습다고도 생각했는데, 이 또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바쁜 와중, 단둘이 즐기는 짧은 휴식은 꿀처럼 달게 느껴졌으니까.

    “땡땡땡! 휴식 시간 다 끝났어요!”

    때맞추어 마리안이 핫도그 트럭을 콩콩 두들기며 소리쳤다.

    “영업할 시간입니다! 핫도그 제조 공장 다시 돌아갈 준비 하세요! 사람들 미어터져요! 이러다 줄이 뉴욕까지 길어질 지경이라고요!”

    특유의 과장 어린 화법 때문일까? 독촉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여기 밖에 있는 사람들은 머스터드랑 케첩 뿌려 준 스태프 정체가 S급 헌터라는 걸 꿈에도 상상 못 하겠죠?”

    희나는 위생 장갑을 끼며 작게 웃었다.

    바깥의 사람들은 C급 히든 클래스 살림꾼의 핫도그를 먹으러 왔다가 S급 헌터의 손맛까지 보게 된 격이다.

    평생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S급 헌터와 이렇게 스치다니, 운이 좋다면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다, 희나는 힘차게 외쳤다.

    “자! 밖에서 고객들이 기다린다고 하니까, 우리 다시 힘내 봐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진현은 몹시 성실하고도 진지한 손길로 트럭 가판대를 열었다.

    마리안의 말대로, 핫도그 공장을 재가동할 시간이었다.

    * * *

    희나는 임시 침대에 몸을 푹 누였다.

    “와, 온종일 쪼그려 앉아 있다 누우니까 완전 살 것 같네!”

    찌뿌둥한 근육을 쭉쭉 늘렸다.

    “민아 언니, 제 몸에서 소시지 냄새 나지 않아요?”

    “엉. 엄청 향기롭네.”

    “향기롭다뇨!”

    말도 안 되는 표현에 희나가 깔깔 웃었다.

    하지만 우민아의 농담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대로 길거리에 나가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부 너만 쳐다볼걸. 그 정도로 매혹적인 향이야.”

    “매혹적인 향이라니! 제가 무슨 팜파탈도 아니고!”

    “냄새로 사람 꼬시고 다니고 있잖아.”

    “아니, 언니……!”

    활짝 웃으며 대꾸하는데, 임시 숙소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이 예의 없는 침입자의 정체는 바로 강진현이었다.

    그는 당혹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누, 누굽니까?”

    “누구라뇨? 무슨 일 있어요? 여기 저랑 민아 언니밖에 없는데.”

    그러자 강진현이 몹시도 다급하게 물었다.

    “누가 희나 씨에게 반했습니까? 어떤 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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