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173화 (17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73화

    굉장히 솔깃한 제안이긴 했지만, 희나는 끙, 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아무래도 이건 출근하기 싫다고 직장에 화염병을 투척하는 격이니, 사람 된 도리로 참는 게 맞으리라.

    “엘릭서 준 곳이 팔콘 길드니까, 그 값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무엇보다 진현 씨를 도와준 곳이잖아요.”

    팔콘 길드는 파비안 앳킨스의 노이징 덕분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풍문을 듣기로는 정부 감사도 받고, 요주의 대상까지 되었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팔콘 길드는 이목을 돌릴 만한 주제가 필요했다.

    때마침 등장한 트리플 S급 아이템과 그 소유자인 희나는 굉장히 좋은 화젯거리가 되어 주었다.

    즉, 팔콘 길드는 희나가 언론의 관심을 끌어 주길 바랐다.

    청룡 측도 팔콘의 제안에 동의했다.

    극비의 던전을 내주고 곤경에 처한 상대를 저버리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얼굴만 잔뜩 팔리게 됐네.’

    희나는 길드장이 약속한 막대한 보상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재산 규모로는 소시민을 벗어난 지 오래지만, 부자 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 김치 먹고 싶다. 오늘은 한식 레스토랑 가자고 해야겠어.’

    다음 끼니를 생각하며 힘을 낼 수밖에.

    “잘할 수 있습니다, 희나 씨.”

    무엇보다 강아지 같은 잘생긴 애인 얼굴을 보면, 절로 힘이 난다는 건…… 절대 비밀이었다.

    인터뷰를 끝낸 희나가 찌뿌둥한 몸을 쭉 펴 기지개했다.

    “으으, 관심받아야 할 건 SSS급 신문지인데 왜 저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하는 걸까요?”

    희나의 인터뷰를 내도록 지켜보던 우민아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클래스도 독특하고, 서사가 재미있잖아. 첫 번째 던전에서 ‘살림꾼’으로 각성하고, 다음으로 빨려 들어간 던전에서는 SSS급 신문지라는 전무후무한 아이템을 얻다니. 벼락을 두 번 맞아도 이런 우연이 겹치긴 힘들걸.”

    인공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 버섯 던전에서 아이템을 주운 건 비밀이었기 때문에 신문지의 출처는 최근, 좀비 던전으로 해 둔 상태였다.

    그때 행운치가 올라가는 약초를 먹고 신문지를 주웠다고 이야기하니, 다들 믿기 어려워 하면서도 무리 없이 납득했다.

    들어간 비각성자들이 전부 각성하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SSS급 신문지 정도야 주울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거기다 희나의 클래스인 ‘살림꾼’이란 직업도 대중의 지대한 관심에 한몫했다.

    음식을 하고 청소하는 데도 랭크가 있고, 경험치가 오른다는 사실을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스튜디오 청소 같은 건 안 시켜서 다행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외 대형 길드 소속에, 팔콘의 손님이기까지 하니 그 정도 무례한 요청은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카메라 울렁증만 제외하면 이건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다른 나라라서 그런가? 이상한 용기가 솟네.’

    낯선 곳이 주는 해방감 때문일까?

    한국이었으면 기를 쓰고 피했을 방송 출연도 별 거리낌 없이 응했다.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사진을 청하는 것도 그다지 민망하지 않았다.

    그저 유쾌한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물론 매일같이 관련 기사를 캡처해 희나를 놀려 대는 희원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언니, 다음 스케줄은 뭐예요? 내일 오전이라고 했던가? 이것만 하면 우리 한국에 돌아갈 수 있는 거죠?”

    우민아에게 다음 일정을 묻자, 메시지로 영상 링크 하나가 왔다.

    “이 프로그램 게스트로 출연할 거야. 이번엔 아침 뉴스 인터뷰 같은 고리타분한 게 아니니까 훨씬 재미있을걸.”

    “무슨 프로그램이길래……?”

    영상을 열자마자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빌어먹을! 이따위 요리를 먹으라고 내놓은 거야? 이건 쓰레기통도 맛없다고 뱉을 맛이야! 환경 파괴적이라고!

    영상 속에서는 흰 조리복을 입은 셰프 하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고함치고 있었다.

    그 위로 이글거리는 불꽃과 함께 프로그램 타이틀이 떠올랐다.

    “지옥의 요리사?”

    “맞아. 유명한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야. 매번 게스트를 들여서 심사 위원으로 세우는데, 이번 심사 위원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어, 어, 엄청 중요한 자리 아니에요?”

    “뭐……. 결국 최종 심사는 마스터 셰프가 하니까 너무 부담감 가지지 말고.”

    “그렇게 말해 줘도 엄청나게 부담스러운데요.”

    “괜찮아, 괜찮아! 신기한 거 보고 맛있는 거 얻어먹고 오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돼! 이것만 하면 집에 갈 수 있으니까, 재미있게 끝내고 오자고!”

    우민아가 껄껄 웃으며 희나의 등을 팍팍 내리쳤다.

    * * *

    험상궂게 생긴 마스터 셰프가 우렁우렁하게 소리쳤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제군들!”

    그러자 여섯 명의 참가자가 각자의 주방 앞에 섰다.

    수백, 아니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올라온 6인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SSS급 테크닉’이다! 각자가 가진 최고의 테크닉을 뽐낼 수 있는 음식 한 가지를 선보이도록!”

    SSS급 쓸모 있는 신문지의 주인인 희나를 의식한 듯한 주제였다.

    희나는 게스트석에 앉아 눈을 반짝였다.

    이 자리가 몹시 민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촬영 현장은 생각 외로 흥미로웠다.

    ‘와. 칼질하는 것 봐. 나는 저렇게 하면 손가락 채 칠 텐데…….’

    통통통통통, 식도가 도마를 내려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다들 기본 재료를 다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스터 셰프와 진행자가 다가와서 토크를 시작했다.

    “오늘의 게스트, 희나. 오늘의 주제인 SSS급 테크닉이라고 하면 어떤 음식이 떠오릅니까?”

    희나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차근차근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평범한 집 음식만 해 봤고, 대단한 음식을 먹어 보고 자란 것도 아니라서 쉽게 상상이 안 가네요. 거기다 여기는 우리나라랑은 다르잖아요. 조리법도 다를 테니까, 더더욱 예상이 안 가요.”

    “오, 그렇군요. 그럼 우리 게스트가 중요한 날 하는 회심의 SSS급 요리는 무엇이 있을까요?”

    진행자의 질문에 재료를 다듬고 있던 참가자 중 하나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각성 클래스가 살림꾼이라면서요! 그래서 더 궁금하네요!”

    손을 그토록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귀는 활짝 열려 있었나 보다.

    ‘오. 멀티 플레이가 되는구나.’

    희나의 감탄도 잠시였다. 곧이어 마스터 셰프가 심술궂게 고함쳤기 때문이다.

    “입 닥치고 음식에나 집중해!”

    “예스, 셰프!”

    빠릿하게 대답하면서도 실실 웃는 것이, 방송에 보이는 것처럼 셰프와 참가자의 관계가 살벌한 건 아닌 듯했다.

    “잠시 이야기가 샜네요. 본론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희나 씨, 중요한 날 내놓는 비장의 요리는 무엇이죠?”

    희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특별한 날에 내가 뭘 했더라……?’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고기 요리……일까요? 대단한 요리는 더 많겠지만, 기념하고 싶은 날에는 고기를 구워 먹어요.”

    특별한 날에는 언제나 고기를 먹었다.

    돼지를 굽거나, 소를 굽거나, 어쨌든 뭔가를 구웠다. 가끔 삶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체로 구이였다.

    여기까지 말했다가 희나는 아차, 하고 말을 덧붙였다.

    “말하고 보니 이건 요리라고 하기엔 조리법에 가깝네요.”

    졸지에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을 한 셈이 되었다. 희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진행자와 마스터 셰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긴!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야말로 특별한 요리라고 할 수 있죠!”

    진행자는 넉살 좋게 희나의 실수 아닌 실수를 받아넘겼고, 마스터 셰프는…….

    “각성 스킬 중에 요리 관련 스킬이 있다던데, 궁금합니다. 주방 자리는 넘쳐 나고, 재료도 썩어 넘칩니다. 한번 보여 줄 수 있습니까?”

    그의 회색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요리에 거의 평생을 바친 사람다웠다.

    진행자는 그런 마스터 셰프 앞에서 과장한 몸짓을 했다.

    “워, 워. 진정하라고요, 마스터 셰프. 이건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고요!”

    “고기 좀 굽는 게?”

    “스킬 쓰는 거 아닙니까? 이런 건 각성자들한테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상식, 몰라요?”

    하지만 진행자도 내심 희나가 스킬을 보여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제작진의 눈빛이 그랬다.

    ‘히든 클래스의 특수 스킬이라니! 방송에 내보낼 수 있으면 대박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게 빤히 보였다.

    “흠…….”

    희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구워서 같이 나눠 먹어요.”

    MSG 손맛 스킬 정도는 큰 비밀거리도 아니었고 이왕 굽는 거, 많이 구워서 사람들에게 한 입씩 물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사람들이랑 뭔가를 같이 나눠 먹는 건 좋은 일이니까. 재미있기도 하고.’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주방이 준비됐다.

    옆에는 소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스태프들까지 모두 한 입씩 나누어 먹을 만큼의 분량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마스터 셰프는 중간 상황을 보러 카메라와 함께 떠났고, 희나는 진행자와 단둘이 남았다.

    “거참. 일이 생각보다 커졌는데요. 고기가 이렇게 많은데, 다 구울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자기도 솜씨가 많이 늘어 달걀 프라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희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원래 손이 커서 뭐든 많이 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달군 팬 위에 살짝 밑간한 소고기를 얹었다.

    치이이익, 맛있는 소리가 스튜디오를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스킬 발동 창이 허공에 반짝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