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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72화 (172/228)

던전 안의 살림꾼 172화

“이리 오세요. 떨어질라.”

희나는 발코니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강진현은 주춤거리며 희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멀찍이 엉덩이를 붙였다.

희나는 그제야 확신했다.

‘진현 씨, 정말로 날 피하고 있었잖아?’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못했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간식 몰래 빼 먹은 강아지 꼴이 저럴까…….

한마디로 엄청나게 도망가고 싶은 눈치였다는 의미다.

‘이렇게 티 나게 피한다고?’

상대의 반응이 이러니, 괜히 오기가 솟았다.

원래라면 엄청나게 고민해서 꺼냈을 말이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진현 씨. 저주 풀렸을 때 기억 멀쩡히 나는 거 맞죠? 민아 언니한테 했던 이상한 변명은 지어낸 거였고요.”

뾰로통한 목소리에 절반쯤 뒤돌아 앉아 있던 커다란 몸이 움찔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찔린 사람의 반응이었다.

희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와다다 쏟아 냈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다, 그거야 민망해서 지어냈다고 치더라도…… 왜 계속 저 피했어요? 그렇게 싫었어요? 나도 어쩔 수 없……”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무어라 해명할 시간이라도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지려는 순간이었다.

강진현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닙니다! 안 싫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박력 넘치는 S급 대꾸에 희나는 말을 살짝 더듬었다.

“뭐, 뭐가?”

“입……맞춤 말입니다! 안 싫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새로운 폭탄이 펑, 하고 터졌다.

희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안 싫으셨구나…….”

“네. 안 싫었습니다.”

“어……. 네.”

“…….”

두 남녀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희나도, 강진현도, 집 나간 넋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연 건 강진현이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유독 풀 죽은 기색으로 사과했다.

“희나 씨를 곧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희나 씨가 저와 있었던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아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심장이 아팠다니.’

의미심장했다. 명치에 뜨거운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은 듯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제가 왜 싫어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대로 자리를 뜨셔서, 술까지 마시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술로 기억을 잊고 싶을 정도로 싫었……”

이번에는 희나가 소리칠 차례였다.

“아니에요! 안 싫었어요!”

“그럼 어째서?”

강진현은 몹시 긴장한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커다란 손에 붙잡힌 의자 팔걸이가 엿가락처럼 휘었다.

하지만 희나도, 강진현도 그런 사소한 일 따위를 눈치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희나는 더듬더듬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 그런 걸 하고 있는데 진현 씨가 갑자기 깨어났잖아요. 놀라 가지고…….”

“그래서 뛰쳐나가신 겁니까?”

“맞아요.”

“음주하신 건?”

“그것도 당황해서……. 그 밤에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요? 라운지 바밖에 없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워서 한잔했을 뿐이에요.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희나의 변명이 길어질수록 굳어 있던 강진현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 또 해도 됩니까?”

다짜고짜 들어온 질문에 희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예?”

“입맞춤, 또 해도 되겠습니까?”

묻는 그의 얼굴은 이미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불현듯 밤바람이 훅, 불었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흐트러졌다.

흰 이마 아래 자리 잡은 진한 눈썹, 흑요석 같은 눈동자.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 안에 가득 찬 희나의 모습…….

그대로 빨려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희나 씨.”

그의 입술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떨리는 숨이 섞여 들었다.

그대로 두 입술이 겹쳐지려던 순간…….

“잠깐만요!”

입술 사이에 손바닥이 쏙 하고 끼어들었다. 희나의 손이었다.

졸지에 희나의 손등에 입 맞추게 된 강진현이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왜?”

“왜, 왜긴요!”

희나는 고개를 팩 뒤로 물리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진현 씨는 그냥, 기분 좋다는 이유로 뽀……뽀를 해요? 저는 아니에요! 지난번에야 진현 씨 저주 해주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번에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냥, 그, 그걸 한다고요?”

말하다 보니 절로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다른 사람도 이런 식으로 홀려서, 응? 막, 입술 비비고? 응? 그랬던 거야?’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바로잡은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희나는 제법 용맹하게 돌진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저는 특별한 사이 아니면 이런 거 안 해요!”

희나도 강진현과 입 맞추었던 게 싫었던 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외면해 오긴 했지만, 그동안 그를 보며 가슴 설렜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고작 잘생겼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진현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희나는 그의 상냥함이, 진중함이, 혹은 가끔 보여 주는 긴장 풀린 모습이 좋았다.

희나가 아무리 연애 감정에 둔하다고 해도, 이쯤 되면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했다.

입맞춤까지 하고, 그게 서로 싫지 않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방금도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 더 입 맞출 뻔했잖아!’

그랬다.

둘은 누가 봐도 분명히 썸을 타고 있었고,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모른 척 덮어 둘 수 없었다.

‘이 일 때문에 진현 씨랑 어색해지더라도 어쩔 수 없어. 얼결에 뽀뽀했던 사이로 남는 게 더 이상해.’

희나는 둔했지만 이런 상황을 어영부영 넘길 정도로 소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튼. 확실히 해요! 그래서 진현 씨는 제가 좋은 거예요, 아닌 거예요?”

그러자 멍하니 있던 강진현이 덥석 대답했다.

“당연히, 좋습니다!”

하지만 희나는 예리했다. 뭐 하나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말고! 이성적으로 어떤지요! 그러니까 이건, 애인 하고 싶으냐는 뜻이에요.”

훅 꽂힌 돌직구에 강진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였다.

“그…….”

강진현은 말문이 턱 막힌 듯,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희나는 그런 그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속에 있던 말을 모두 털어 내 버려서 그런 걸까? 초조하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계속 같이 일해야 하니까 민망하긴 하겠지만…….’

모호한 사이로 남아서 서로 은근슬쩍 피하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나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강진현은 붉어진 얼굴을 연거푸 마른세수했다.

“당연히 이성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희나 씨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좋아합니다.”

마침내 그는 한숨처럼 마음을 털어놓았다.

“……애인 사이 하고 싶습니다. 희나 씨만 허락하신다면요.”

이에, 입술에서 저절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도 진현 씨가 좋아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신경 쓰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

강진현의 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깃들었다.

커다란 행복을 삼키기라도 한 듯,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리고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희나 씨.”

“네, 진현 씨.”

“……이제 입 맞춰도 될까요?”

그 물음에 희나는 픽 웃었다.

이렇게나 반짝이는 두 눈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좋아요.”

대답하자마자 뜨끈한 체온이 입술에 맞닿았다.

성급한 듯, 몹시도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커다란 손이 뺨을 붙잡아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부드러운 입맞춤에 희나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사랑스러운 밤이었다.

* * *

공식적인 첫 입맞춤(?)을 나눈 밤, 희나와 강진현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귓바퀴가 홧홧해지고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강진현은 ‘이 순간이 꿈같다’라며 몇 번이고 넋을 놓았다. 가끔 말을 더듬기도 했다.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런 어수룩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우습게 느껴질 법도 했다.

하지만 희나에겐 그런 모습마저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희나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그의 양 뺨을 붙잡고 잔뜩 뽀뽀를 날려 주었을 것이다.

강진현에게는 몹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둘은 긴 대화를 나누다 동틀 녘이 돼서야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입을 미리 맞춰 두었다.

바뀐 관계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괜히 주위에 밝혔다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알았다면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전혀 쓸모없는 배려’라고 말했을 게 분명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관계의 장본인인 희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둘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건, 시간은 술술 흘렀다.

희나 일행은 귀국을 준비했다.

감정 학회도 끝났겠다, 미국에 온 주목적을 해결했으니 더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일행은 의외의 일 때문에 미국에 추가 체류하게 되었다.

“팔콘도 참……. 떨어진 떡밥은 있는 힘껏 주워 먹는 타입이네.”

우민아가 킬킬거리며 희나 옆에 털썩 앉았다.

희나는 턱을 달달 떨었다.

“언니, 저 지금 떠는 거 티 나요?”

“엄청.”

“인터뷰하다 혀 씹으면 어쩌죠?”

“생방송도 아니고, 편집해 주겠지.”

“어헝…….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지? 나는 그냥 살림꾼일 뿐인데.”

눈꼬리를 축 내리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강진현이 희나를 위로했다.

“기운 내십시오.”

어깨 위에 얹힌 손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졌다.

참고로 갑자기 일행으로 나타난 강진현을 우민아가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팔콘 길드 측은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희나 씨, 영 긴장되신다면 인터뷰장을 부수는 방법도 있습니다. 장소가 사라지면 스케줄도 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는 카메라 울렁증에 잔뜩 긴장한 희나를 위해 상당히 획기적인 제안을 건넸다.

“흔적 없이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농담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 의욕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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