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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71화 (171/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71화

    거기다 호텔 밖으로 나가기엔…… 외국의 밤은 위험했다.

    최근 희나가 얻은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현관문을 열어서 집에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희나는 눈알을 굴려 곁에 앉은 잘생긴 거머리를 힐끗, 스쳐보았다.

    ‘이대로 보내면 다음에 또 접근할 것 같은데. 귀찮게.’

    마침내 희나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해 봐야 나오는 거 없다는 건 아시죠?”

    파비안이 위협이라도 당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말하니까 무서운데요?”

    “……말 돌리지 말라고 했죠!”

    “알았어요. 말할게요.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소원 던전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목적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긴 했다. 그는 계속 소원 던전에 관심을 표했으니까.

    이에 희나는 지난번부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파비안 씨 말로는 거긴 팔콘 길드 소속 던전이라면서요? 그럼 팔콘에 문의하시지 왜 저한테……?”

    “상종도 안 해 주니까 이렇게 방법을 찾아다니는 거 아니겠어요?”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청룡은 입장에다 던전 클리어까지 했잖아요. 방법을 뚫었으니 다음 분기 때 한 사람 정도는 더 들여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하자면, 이건 청탁이었다.

    하지만 좀 잘못된 청탁이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청탁을 넣은 상대가 문제였다.

    “만약 그쪽이 한 말이 맞는다고 치더라도…… 저는 그럴 만한 직위가 안 되는데요.”

    희나도 팀장이긴 했지만, 길드 간 교섭이니, 협상이니 하는 일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이번 일의 책임자도 우민아였다.

    ‘이 사람 줄을 영 못 잡네. 민아 언니한테 가서 사정을 해야 할 판에……. 아니다. 민아 언니는 사정을 안 봐줄 것 같으니까 제일 만만해 보이는 내게 접근한 건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눈꼬리를 팩하고 올리자 파비안은 되레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럴 만한 직위가 안 되긴요. 나는 아주 촉이 좋은 사람이고, 내 촉은 희나를 공략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희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뭐 이건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봐요. 희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요. 나를 던전에 넣어 줄 만한 능력! 내 감이 그렇게 얘기한다니까요!”

    희나의 ‘홈 스위트 홈’ 능력을 쓴다면 가능하긴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촉, 되게 잘 들어맞네. 이 사람, 점쟁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희나는 모른 척 시치미 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그 던전에는 왜 가려고 하는 건데요?”

    “말했잖아요. 궁금해서.”

    “너무 두루뭉술한 동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음……. 필요한 게 있어서?”

    “뭔데요?”

    “거기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해서? ……이 이상은 나도 영업 기밀이라 말 못 해 줘요.”

    파비안은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아무튼. 내 제안 좀 고려해 봐요. S급 엘릭서보다 더 좋은 걸 줄지, 누가 알아요?”

    “그럼 나도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희나는 손가락을 꼽아 세웠다.

    “첫째로 나는 파비안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고, 둘째로 만약 뭔가 알더라도 그럴 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OK?”

    희나는 끝까지 팔콘 길드의 소원 던전을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지금 좀 심란해서 그런데, 복잡한 얘기는 그만해 줄래요?”

    정말로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파비안 앳킨스는 그제야 한 걸음 물러섰다.

    “알았어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뒀는데 한 번은 떠올려 주겠지. 나중에 나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해요.”

    그러면서 명함 한 장을 바 테이블 위에 올렸다.

    “지난번에 줬던 건 버렸을 것 같아서. 이번엔 버리지 마요.”

    파비안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눈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옆에서 한마디라도 더 떠들었으면 희나는 진짜로 화를 냈을 테니까.

    “어휴.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이상한 사람은 사람대로 꼬이고.”

    희나는 술잔을 벌컥 비우고는 손을 휘저어 바텐더를 불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희나에게 필요한 도움이라곤 딱 하나뿐이었다.

    “술 한 잔 더 주세요!”

    13. 핫도그 파는 살림꾼

    “휴우.”

    희나는 객실 문 앞에 서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킁킁, 몸에서 냄새가 나나 확인도 했다.

    ‘좋았어. 술 냄새 안 난다.’

    희나는 밤새 라운지 바에서 술을 마시다 왔다. 차마 강진현이 있을 숙소에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며 딱히 좋은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니다.

    부끄러움에 술만 꼴딱꼴딱 넘어갔고, 그래서인지 심지어 취기도 제대로 안 돌았다.

    희나는 통창 너머로 들어오는 어스레한 아침 햇살을 맞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결국 아무 대책 없이 숙소로…….’

    그대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쨌든 계속 회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이 앞에서 딱 다섯까지만 세고 문을 열어야겠다,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우민아가 나타났다.

    “희나야! 어디 갔다 왔냐! 새벽에 연락이라도 돼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진작에 경찰에 신고했을 거야!”

    우민아는 머쓱하게 서 있는 희나를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슬쩍 눈을 흘겼다.

    “얼쑤? 혼자 나가서 술을 마셔?”

    “그, 티 나요?”

    “술 냄새가 나는데? 무슨 일 있었냐?”

    역시, 상급 헌터들의 기감은 짐승 같았다.

    희나는 우민아의 눈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으이구. 알았다, 알았어. 더 묻지는 않을게. 그나저나 강진현 깬 거는 알고 있지? 저주 풀린 거?”

    강진현, 이름 세 글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희나는 최대한 내색 않고 대답했다.

    “아, 알고말고요.”

    조금 말을 더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둘이 뭐 있었냐? 표정이 왜 그래?”

    ……아닌가 보다.

    우민아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네가 뭘 했을 리는 없고…… 걔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희나의 안면 근육이 경련했다.

    필요에 의해서였다지만, 동의 없이 입맞춤을 하고 상대가 깨자마자 그대로 튀어 버린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 하하. 그게……”

    희나가 더듬더듬 변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저주가 풀리며 순간적으로 능력이 방출되는 바람에, 놀라셨을 겁니다.”

    강진현이 말끔한 얼굴로 나와 희나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뭐? 힘이 방출됐다고? 아니, 나는 네 기운 못 느꼈는데?”

    “말 그대로 찰나지간에 일어났던 일이라.”

    눈 하나 깜짝 않고 뻔뻔하게 대답하니, 믿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우민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가? 하긴. 네 능력은 S급이니까 내가 캐치 못 했을 수도 있겠다.”

    “예. 희나 씨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죠. 늦게까지 저를 보살펴 주고 계셨는데.”

    ‘헉.’

    ‘보살펴 주다’라는 표현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역시 진현 씨, 내가 곁에 있는 거 알고 있었구나!’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혹시, 진현 씨…… 저주로 앓느라 기억이 온전하지 않나? 기억이 이상하게 꼬였나?’

    그도 그럴 게, 자기와 입맞춤한 상대를 두고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희나는 그랬다.

    한편, 또 다른 가설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아니면 설마…… 진현 씨한테 그 정도는 별거 아닌 접촉이어서,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하는 건가?’

    의외로 강진현이 남녀 간 접촉에 몹시 트인 사람이라면?

    ‘원체 유명하고 돈도 많고 잘생겼고…… 아무튼 멋있으니까 연애도 많이 해 봤을 거야. 그래서 이 정도 스킨십은 별일도 아닌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이것도 왠지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뒤늦게 술기운이라도 오르는지, 생각이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우민아는 혼란에 찬 희나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어깨를 툭툭 쳤다.

    “많이 놀랐겠구나. 그래서 놀란 가슴 술로 가라앉히고 온 거야? 이주당 씨? 진정은 좀 했고?”

    “네, 네…….”

    “술 냄새만 나고 썩 취한 것 같지도 않네. 밤새 깨어 있느라 피곤했겠다. 쉬어.”

    우민아는 희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덕분에 희나는 강진현과 제대로 된 대화도 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다만 저주가 남긴 잔열 때문일까?

    슬쩍 본 강진현의 귓바퀴가 다소 붉은 것 같기도 했다.

    ‘뭐지, 뭐지? 뭐야?’

    문이 쿵, 닫히고 방에 혼자 남겨진 희나는 침대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혼란한 오전이었다.

    * * *

    그 이후로도 강진현은 줄곧 희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고민 끝에 그날 있었던 일을 솔직히 고백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 기회도 얻기 쉽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때마다 강진현이 쓰윽 몸을 피하거나 옆에서 다른 일행이 다가와 버렸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장본인인 희나조차도 ‘그날 있었던 일이 사실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답답함을 참다못한 희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50%에 불과했던 해주 확률을 100%로 올린 건 바로 희나였다.

    ‘진현 씨가 멀쩡한 몸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증거야, 증거!’

    희나는 방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걸었다. 발코니에 가서 선선한 밤공기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에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발코니 문을 열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난간 틈새로 스스슥,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어?”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 형체를 유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희나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알았다.

    하여, 일단 급한 대로 협박을 갈겼다.

    “거기 멈춰요! 한 발자국 더 움직이면…… 바, 밥은 없습니다!”

    그러자 그림자가 발코니 난간 위에서 뚝 멈추어 섰다.

    “……너무하십니다.”

    강진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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