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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70화 (170/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70화

    ‘기, 기분이 이상해.’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신의 감각이 입술 하나로 밀집된 것처럼 느껴졌다. 맞닿은 입술의 감촉, 촉감, 심지어 주름 하나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작 주둥이 하나 맞댄 것뿐인데, 고작 그뿐인데, 절로 숨이 가빠 왔다.

    ‘정신 차리자, 이희나!’

    마음속으로 양 뺨을 찰싹 때린 희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강진현의 해주 확률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퍼, 퍼센티지가 높으면 이, 이, 입술 떼야지.’

    허겁지겁 창을 띄우니 반가운 정보가 업데이트되었다.

    ‘이제 됐어!’

    속으로 환호를 외치며 조심스레 입술을 떼려 하던 순간이었다.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강진현의 눈꺼풀이 반짝, 뜨였다.

    ‘헉.’

    희나는 돌처럼 굳었다. 앞뒤 사정이 있다고 해도, 이 상황은 엄청나게 수상쩍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머리가 그대로 텅 비었다.

    반쯤 떨어진 입술이 다시 붙은 건 그때였다.

    “으, 읍……?”

    화들짝 놀라 머리를 뒤로 빼려 하는데, 어느새 강진현의 손이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달아날 곳이 없었다.

    ‘뭐, 뭐, 뭐지?’

    다시 닿은 입술은 어째 더 뜨겁게 느껴졌다.

    강진현은 희나의 머리를 받친 손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희나는 자연스레 그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이 이렇게 맞닿았으니, 시선이 스치지 않을 수 없었다.

    똑바로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몹시 검고 깊어, 희나는 잠시 상황조차 잊은 채 넋을 놓고 말았다.

    “…….”

    강진현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입맞춤을 음미하듯 다시 눈을 감았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감추어졌다.

    내리깐 속눈썹이 몹시도 길고 섬세했다.

    희나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눈이…… 눈이 이렇게 예뻤던가?’

    강진현을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 알지 못했던 게 당연했다.

    고요한 분위기에 취해 희나도 반쯤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렇게 입술을 맞대고 있던 것도 잠시.

    횡격막이 열기에 반쯤 녹아든 이성을 채찍질했다.

    “딸꾹!”

    그러니까 희나가 제법 격렬한 딸꾹질을 시작했다는 소리다.

    “딸꾹!”

    딸꾹질과 함께 집 나갔던 희나의 이성도 빠르게 귀가했다.

    “악!”

    희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입술을 가렸다.

    강진현에게 뒤통수를 붙잡혀 있긴 했지만, 그 손길이 워낙 조심스러웠던 덕에 순식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강진현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희나…… 씨?”

    마치 얕은 잠에 들었다 깬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의 텅 빈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여기에 희나 씨가 있었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딸꾹!”

    희나는 딸꾹질하며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제야 강진현은 허공을 헤매다 희나를 바라보았다.

    그 느릿한 시선에 희나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악! 어떻게 해!’

    눈앞이 희었다, 검었다, 세상이 아주 핑핑 돌았다.

    참고로 그 세상은 강진현의 입술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의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다…….

    오버랩되는 입술의 이미지에 희나가 반쯤 정신을 놓은 사이, 강진현은 반대급부로 정신을 조금 차린 듯 보였다.

    그는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희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자신의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에는 전혀 감흥을 느끼지 않는 듯 했…… 까지 생각하던 희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붕붕 돌렸다.

    ‘…… 당연하지! 눈떴는데 갑자기 누가 입술 비비고 있으면 당연히 놀라서 아무 생각 안 들겠지!’

    희나는 딸꾹질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사이, 마침내 완전히 깨어난 강진현이 희나의 이름을 불렀다.

    “희나 씨.”

    이는 마치 어떤 신호처럼 느껴졌다.

    ‘아, 안 돼.’

    이 상황에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순식간에 풀렸다.

    “아악! 미안해요!”

    희나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강진현은 그런 희나를 붙잡지 않았다.

    “으으…… 어떻게 해! 아악!”

    희나는 라운지 바에 앉아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라운지 바는 스위트 객실 이상의 손님만을 받아서 그런지 제법 한산했다.

    “마실 걸 드릴까요?”

    바텐더의 물음에 희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여기서 제일 독한 술로 한 잔 주세요.”

    바텐더는 손님의 불친절한 주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빙긋이 술 한 잔을 내주었다.

    묵직한 유리잔에 호박색 술이 절반쯤 차 있었다.

    희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것으로 내드렸으니 천천히 드세…… 오, 이런.”

    그 모습에 바텐더는 다소 당황한 듯, 작게 입을 벌렸다.

    희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빈 잔을 바텐더 앞으로 쑥 밀었다.

    “한 잔 더요.”

    술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수많은 번뇌가 섞여 있었으므로 바텐더는 순순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희나는 그렇게 독한 술 석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취기가 올라서는 아니었다.

    이씨 집안 핏줄에 흐르는 말술 유전자는 그깟 양주 석 잔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후끈한 알코올이 식도를 몇 번 타고 넘어가니 정신이 좀 들었던 덕이다.

    “끄응…….”

    희나는 네 번째 잔을 천천히 홀짝거리며 아까 전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강진현은 저주를 풀기 위해 엘릭서를 마셨고, 엘릭서의 저주 해주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행운 스탯이 높은 희나와의 스킨십이 필요했다.

    처음엔 손을 잡고 포옹하는 수준이었지만, 100%의 확률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 깊은 접촉을 해야 했다.

    그래서 희나는 정신을 잃은 강진현에게 눈 딱 감고 입맞춤을 했…….

    ‘아악! 이걸 어떻게 설명해!’

    그때는 더없이 이성적이라고 여겼던 판단이었건만, 막상 설명하려니 이처럼 파렴치할 수가 없었다.

    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떴을 때 얼굴에 철판 깔고 곧바로 자초지종 설명했으면 상황이 또 달라졌으려나……?”

    적어도 우물쭈물하다 얼굴 새빨개져서 도망치는 것보다는 나았으리라.

    “아니 나는 또 왜 거기서 도망쳐서는!”

    소리까지 지르면서 줄행랑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을 것이다.

    희나는 자신의 비명에 우당탕 튀어나와 ‘무슨 일이 있냐’며 주변을 경계하던 일행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다시 한번 붉혔다.

    그 소란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일단 강진현이 깨어났다는 사실은 금세 눈치챘을 것이고, 만약 강진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면…….

    “으아아……. 어떻게 한담!”

    이불이라도 있다면 뻥뻥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신,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퍽 내리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고민 상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익숙하지만 썩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희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계속 나 따라다녀요? 저 아는 거 없다니까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옆에 앉은 거예요.”

    파비안 앳킨스는 바텐더에게 희나가 마신 것과 같은 술 한 잔을 주문했다.

    인적이 적고 비교적 사적인 장소라 그런지, 매번 끼고 다니던 선글라스는 벗은 채였다.

    그는 잔을 입에 대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걸 스트레이트로 마신다고요? 너무 독하지 않나요?”

    옆에서 바텐더가 슬쩍 말을 걸었다.

    “이미 넉 잔째이십니다.”

    “넉 잔이나? 내 손가락 몇 갠지는 보이죠?”

    손가락을 두 개 들고 휘휘 흔들어 보이기에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론 안 취해요. 저 생각할 거 많으니까 다른 곳 가서 술 마셔요.”

    “머릿속이 복잡할 땐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게 최고예요.”

    “글쎄요…….”

    보통이라면 희나도 그렇게 하겠지만, 이건 달랐다.

    어떻게 방금 강진현이랑 뽀뽀하다 뛰쳐나왔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온갖 루머의 중심이라는 이 남자, 파비안 앳킨스에게?

    “나 덕분에 엘릭서도 얻었는데, 이 정도면 상대해 줄 만도 하지 않나?”

    희나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파비안은 턱을 괸 채 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팔콘 길드를 흔들어서, 엘릭서가 나온 거잖아요. 상태 이상에 꼭 필요한 물약 말이에요.”

    “아니 그건…….”

    희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그는 강진현이 상태 이상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안다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설마, 해변에서 만났던 날 진현 씨를 본 건가?’

    아니면 정말로 뒷조사를 통해 여기까지 유추해 낸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희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괜찮아. 진현 씨 저주가 풀렸으니 이제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퍼뜨리건 다 헛소리가 되는 거야.’

    그랬다. 소문의 장본인이 직접 나와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면 될 일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아는 게 없어요. 파비안 씨가 대체 뭘 알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냥, 내가 원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소원 던전…… 엄청나게 궁금하잖아요. 그렇게 꽁꽁 감춰 두니까.”

    둘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했는지, 눈치 좋은 바텐더는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다른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파비안이 이렇게 소원 던전 이야기를 넌지시 꺼낼 수 있는 것이었다.

    희나는 파비안을 피해 자리를 뜰까 잠시 생각했으나,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아직 진현 씨 깨어 있을 텐데. 얼굴을 어떻게 봐!’

    숙소에 있을 누군가의 얼굴을 보기가 무척 민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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