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69화
침실에 고요가 내려앉았고, 강진현의 고통스러운 신음만이 간혹 들려왔다.
희나는 협탁 위에 대야를 놓고 그의 이마 위 물수건을 열심히 갈았다.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낯설어.’
희나 앞에서 풀어진 모습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언제나 강인하고 든든하기만 하던 강진현이었다.
이렇게 호되게 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이거라도……. 악몽은 꾸지 않기를.’
희나는 강진현의 애착 인형을 꺼내어 그의 품 안에 안겨 주었다.
“으음…….”
가슴에 인형을 얹어 주자, 강진현의 찌푸려졌던 이마가 살풋 풀리는 게 보였다.
‘효과가 있나 봐.’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니, 반가운 일이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희나는 잠시 꾸벅, 졸았다가 화들짝 놀라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넘었네.’
해주의 여파로 강진현이 쓰러진 지도 벌써 반나절이나 지났다.
‘아직 해주 중인가……?’
종전과 별다를 바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몇 퍼센트쯤 진행했는지도 안 가르쳐 주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침대맡에 앉아 강진현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고통 때문에 흘린 식은땀에 피부가 축축했다.
‘얼굴이라도 좀 닦아 줘야지.’
보송한 수건을 찾으러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 으.”
강진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희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깼어요?”
아니나 다를까, 강진현이 흐릿한 초점으로 눈을 뜬 채였다.
“…… 씨.”
“네, 진현 씨.”
“…… 희나 씨.”
그는 잠긴 깊게 잠긴 목소리로 희나를 연거푸 불렀다.
희나는 몸을 숙여 강진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 여기 있어요.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나요? 몸은 괜찮고요?”
“…… 희나 씨.”
하지만 강진현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몸이 많이 아프면 현실이랑 꿈이 구분 안 되는데. 진현 씨도 그만큼 아픈가 봐.’
희나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려 앓았던 때를 떠올렸다.
희원이 돈벌이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라, 아무도 없는 집 안에 틀어박혀서 홀로 앓았더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장면, 합동 장례를 치르던 기억들이 악몽이 되어 희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마지막에는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꾸고선 베갯잇이 푹 젖을 정도로 펑펑 울었다.
진짜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희나는 머리를 휘저어 괜한 잡념을 털어 냈다.
‘아무튼, 진현 씨한테 뭐라도 해 줘야 하는데.’
“물이라도 가져올게요. 탈수 올 수도 있으니까요.”
한참 열에 들떠 땀을 흘렸으니, 목이 마를 것 같았다.
침대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뜨거운 무엇인가가 팔목을 덥석 잡아 왔다.
“진현 씨?”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강진현의 손이었다.
“…… 지 마십시오.”
“가지 말라고요?”
희나의 물음에 강진현은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만히 감아 보였다.
“알았어요. 여기 있을게요. 대신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줘야 해요.”
희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강진현을 내려다보았다.
“엘릭서 먹고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는데…….”
천하의 강진현이 이토록 약해진 모습을 보이다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
희나는 제 팔목을 붙잡은 커다란 손등을 도닥였다.
“별일 없을 거예요. 엘릭서는 잘 들을 거고, 저주도 완전히 사라지겠죠. 소원을 이루어 주는 샘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강진현이 소원의 샘은 그저 해답을 보여 주는 창구일 뿐이라고 이야기했지만, 희나는 그 이상이 있기를 바랐다.
‘진현 씨가 겪는 고통을 빨리 끝낼 수 있기를.’
눈을 꼭 감고 속으로 기도했다.
한편, 강진현은 희나를 꿈꾸는 듯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내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의식이 바람 앞 촛불처럼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그는 손등을 쓸어내리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문득 생각했다.
‘희나 씨가 아니라 나여서 다행이다.’
그러면서 멀어지는 의식 한편으로 읊조렸다.
이대로, 이대로 계속 쓰다듬어 주기만 한다면 이런 고통 따위야 영원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내 그의 눈앞에 노이즈가 낀 듯, 어슴푸레한 글자가 지직거리며 떠올랐다.
하지만 강진현은 다시 의식을 잃었으므로 이 문구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동시에 강진현의 손을 붙잡고 있던 희나의 눈앞에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주 확률이, 올랐다고?”
급하게 강진현의 상태를 확인하자, 50%에 불과했던 해주 확률이 54.7%로 5% 가까이 증가해 있었다.
“내 행운이 진현 씨에게 효과가 있는 거야?”
남의 능력치에 상대가 영향을 받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시스템 창은 계속해서 깜빡였다.
스킨십을 하면 해주 확률이 오른다니, 어처구니없이 느껴질 만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고통으로 신음하는 강진현을 앞에 둔 희나는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 어떻게 하지?”
당황하여 발발 떨리는 손으로 강진현과 손깍지를 끼자, 해주 확률이 60%를 넘겼다.
‘이거 맞나 봐!’
하지만 확률은 60%에서 멈추어 더는 오르지 않았다.
턱도 없이 부족한 확률이었다.
“뭘 더 해야 하지?”
희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침대에 더듬더듬 올랐다.
그리고 누운 강진현을 이불 위로 꼭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고 단단했다.
기다렸다는 듯 확률이 빠르게 올라갔다.
그와 함께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강진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효과가 있어!’
퍼센티지는 79%까지 올라, 거의 8할에 육박했다.
이 정도면 성공 확률이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희나는 그마저도 불안하게 느꼈다.
‘다섯 번 중 한 번은 실패할 수 있는 확률이라는 거잖아.’
90%가 되어도 마음이 불안할 판국에 80%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숫자라니…….
이대로 해주에 실패한다면 잃을 게 너무 많았다.
‘이젠 S급 엘릭서도 없고, 또 이번처럼 운 좋게 엘릭서를 얻는다 해도 또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거고……!’
그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강진현의 모습을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아야 하는 건 싫었다.
‘확률을 더 올리려면 무얼 해야 하는 거지?’
급박한 마음으로 상태 창을 살필 때였다.
눈앞에서 메시지가 반짝, 튀어 올랐다.
희나는 눈을 의심했다.
‘상태창 주제에 헛기침을 했어?’
성대도 없는 주제에 문자로 헛기침이라니?
심지어 ‘거시기 화법’을 사용하기까지!
“에러 떴나?”
콧주름을 세우며 인상을 쓰자, 창이 하나 더 떴다.
당장 생각나는 건 딱 하나였다. 희나는 자연스럽게 중얼거렸다.
“입맞춤?”
그러자마자 시스템은 허겁지겁 대답하듯 창을 띄우고는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애매한 긍정이었다.
희나는 당혹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 입맞춤이라고?”
말하자마자 시선이 저절로 강진현의 입술로 향했다.
몸이 아픈 탓일까? 조금 까슬해 보이긴 했지만, 무척 잘생긴 모양을 한…….
‘아니!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진현의 몸에서 열기가 옮겨 오기라도 한 건지, 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으읏…….”
고통스러운 신음에 곧장 정신이 돌아왔다.
‘이럴 때가 아니야.’
부끄러워하기라도 하는 듯 유독 상태창이 이상하긴 했지만, 결국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내용은 하나처럼 보였다.
‘하긴. 스킨십으로 치자면 포옹 다음 단계는 입맞춤…… 이겠지.’
입을 맞추어야 행운 효과가 최대 발현하는 게 분명했다.
‘입맞춤이라니……. 우린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걸 해!’
희나는 눈을 꼭 감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보다 강진현에 대한 염려가 더 컸다.
마침내 희나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축였다.
‘고, 고민해 봐야! 방법이 있는데 민망하다고 피할 수는 없잖아?’
사안의 급박성을 생각하면, 이게 맞았다.
마침 강진현은 잠들어 있었고, 몰래 입맞춤 정도 한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도둑 입맞춤이 아니라!’
희나는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할 변명을 중얼거리며 몸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잠든 강진현과 누운 채 얼굴을 마주하자 명치께가 간질거렸다.
‘아마 이건 진현 씨 숨결이 간지러워서 그런 걸 거야.’
그의 숨은 굉장히 뜨거웠다.
희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집에서 매일 보는 얼굴이건만, 작아진 후로 귀엽다고 인형처럼 데리고 다니던 사람이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 낯설어 보이는 걸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기 직전이라 그런가……?’
아무것도 모른 채 앓고 있는 순진무구한 S급 헌터에게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생각하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고 기회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에잇, 모르겠다! 어쩔 수 없잖아!”
마침내…… 희나는 눈을 질끈 감고 강진현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현 씨, 미안해요!’
그와 동시에 뜨끈하고 부드러운 살이 입술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