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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65화 (16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65화

    희나는 경계하는 어조로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건 파비안 씨가 알 바 아닌 것 같은데요. 유명한 분이시라면서요? 이런 데 오실 분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하지만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안부 인사는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태연한 대꾸에 희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뭐 대단한 거라도 있는 줄 알겠네…….”

    “대단한 거 있는 것 맞잖아요. 청룡 길드 측 경호 인원이 팔콘 길드 소속의 던전에 입장한 이 상황에서 홀로 남은 사람과 대화해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희나의 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뭐라고 했어요, 방금?”

    “안 그래요, 희나?”

    “희, 희나라니요!”

    희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정곡을 찔려서 그런지,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파비안이 희나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닥거렸다.

    “그럼 희수라고 불러 줄까요? 그래도 이왕이면 가명보다는 본명으로 부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어요?”

    “관심이 있어서?”

    그는 계속 빈말이 분명할 소리만 빙글빙글 돌려 했다.

    희나는 주변을 재빨리 살폈다.

    사람들은 지루한 기조연설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심지어 단상 위에 올라앉은 세 명의 S급 감정사조차 드르렁 코를 골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소란이 일어난다면 모두 희나가 있는 쪽을 바라볼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 파비안이라는 남자도 나한테 해를 끼치진 못할 거야.’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이름은 파비안이고 성은 앳킨스. 파비안 앳킨스.”

    “단순히 이름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글쎄요. 이 정도 얘기했으면 다 말해 준 거나 다름없는데.”

    파비안은 희나의 손에 든 휴대전화 화면을 톡톡 쳤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뒀다 뭐 해요? 검색해 보면 되지.”

    그러면서 무릎을 쫙 펴고 허리를 좌석에 기대어 앉았다. 몹시 거만해 보이는 포즈였다.

    ‘팔다리가 길어서 모델 같기는 한데…….’

    희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검색창에 파비안 앳킨스의 이름을 쳤다.

    그러자 뜬 것은…….

    “어어?”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가득 떴다. 모두 희나의 옆자리에 앉은 금발 머리 남자, 파비안 앳킨스였다.

    간단히 정리된 프로필에 의하면, 그는 소위 말하는 ‘셀러브리티’였다.

    A급 전투계 헌터로 특출한 전투 감각에 모델처럼 잘생긴 외모, 엄청난 재력, 거기다 관심받기 좋아하는 성격까지…….

    수백만 명의 SNS 팔로워를 보유한 헌터계의 슈퍼스타였다.

    희나는 입을 쩍 벌렸다.

    “파비안 씨…… 유명한 사람이었네요.”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게 된 것 같네요, 희나.”

    “그런데 왜 파비안 씨 같은 유명인이 왜 제 뒷조사를 하고, 저한테 접근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서 제 정체를 알고 접근하신 건가요? 지난번에, 해변가에서 말이에요.”

    경계의 시선을 보내자 파비안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건 우연.”

    희나는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기엔 그날 의미심장한 얘기들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어요?”

    “의미심장한 이야기라니?”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표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도와준 아가씨 가방 속에 인형인지, 햄스터인지가 들어 있기에 호기심이 생겼고.”

    그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톡톡 쳤다.

    “거기다 이거, 이미지 왜곡하는 아이템을 벗고 눈을 보여 줬는데도 나를 못 알아보다니. 그건 문제가 있지.”

    그의 대답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자는 오지랖처럼 들렸고, 후자는 자의식 과잉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건 다 우연이라고 치고, 제 뒷조사는 대체 왜 한 거예요? 보통 길 가다 본 사람 뒷조사를 하진 않잖아요.”

    희나가 따져 묻자 파비안이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뒷조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건 아니고, 뒷조사를 했더니 희나가 나왔어요.”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요…….”

    그는 희나의 지적은 모른 척하며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내가 관심이 있는 던전이 있어서…… 거기 입장하고 싶어서 1년을 기다렸는데, 청룡 길드가 쏙 채 간 것 같더라고요.”

    속이 뜨끔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극비라고 했는데.’

    표정을 읽었는지, 파비안이 양손을 쫙 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최상훈 감정사 경호 명목으로 도착한 인원이 있었는데, 오늘 나타나지 않았죠.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때가 던전 게이트 리셋일과 겹쳤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에 깔린 검은 정장의 사내들을 가리켰다.

    팔콘 길드의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최상훈 감정사 경호는 팔콘 길드 헌터들이 책임지고 있으니, 이 정도면 팔콘과 청룡 사이에 무엇인가 거래가 오갔다는 의심을 가질 만도 하지 않을까요?”

    “그, 그건 좀 억측 아닌가요?”

    대충 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때려 맞힌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파비안은 자신의 생각에 꽤 확신을 가진 듯했다.

    “아닌 것 같은데요. 팔콘 쪽 던전을 계속 보아 왔던 내 감에 따르면…… 이건 확실한데.”

    그는 희나가 앉은 의자 손잡이를 톡톡 쳤다.

    “거기다 더 알아보니까 비전투 요원인 희나가 나오더라고요. 찾아보다가 한 번 봤던 얼굴이 나와서 깜짝 놀랐지.”

    “저는 생활 계열 각성자라 최상훈 감정사 컨디션 관리 겸 따라온 거예요. 중요한 분이잖아요. 무엇보다 상훈 아저씨와 친하기도 하고요.”

    미리 입 맞춰 놓은 대로 술술 설명을 이어 가는데, 파비안의 입꼬리가 빙그레 올라갔다.

    “그래서 난 생각했죠. 청룡에서 뭔가를 감추고 있는데, 그건 희나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희나야말로 이번 일과 가장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이잖아요.”

    최상훈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동행했다고 말한 지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이런 막무가내식 결론이라니.

    희나는 최대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파비안 씨는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분이신가 봐요.”

    “희나 곁에는 언제나 S급 헌터 강진현이 있다는데, 그는 어디에 있을까요? 몇 주째 행방이 묘연하다는데?”

    “기밀 업무를 궁금해하면 곤란해요.”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진현 씨는 바쁜 사람이에요.”

    “그럼 바쁘고 무정한 사람은 놔두고, 나랑 비밀 얘기나 해 보는 건 어때요?”

    여기까지 오자, 애써 태연을 가장한 표정도 깨지려 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뭘 원하기에 나한테 와서 이런 얘길 하는 거예요?”

    “호기심? 재미있잖아요. 비밀 캐내는 거.”

    그것 참 사소한 데다 불건전한 동기였다.

    “아무튼 재미있는 이야기 있으면 나한테도 좀 알려 달라고요. 좋은 얘기는 서로 나눠 보자는 의미에서. 어쩌면…… 알아요? 내가 희나를 도울 수 있을지.”

    그는 바짝 굳은 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반쯤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런 파비안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몸을 뒤틀며 ‘나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필요한 것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요. 내 개인 번호니까 곧바로 나랑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파비안은 명함 한 장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치고는 굉장히 깔끔한 퇴장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희나는 흰 명함 종이를 손톱 끝으로 까득까득 문지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실제로도 길었고, 체감상으로는 더 길었던 개회식이 끝나자마자 희나는 최상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저씨! 상훈 아저씨!”

    “어……. 그래. 조, 좋은 아침.”

    최상훈은 학회장의 정신 공격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눈빛이 몽롱했다.

    “아저씨, 아저씨. 어디 조용한 곳 없어요? 얘기할 게 있어요.”

    “좋은 생각이다. 조용한 곳에서 낮잠 좀 자다가 마저 구경을…….”

    “어휴.”

    희나는 저 멀리 있는 학회장을 찌릿 째려보고는 최상훈을 VIP 대기실로 끌고 갔다.

    쾅! 커다란 문이 닫히자마자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누가 우리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아요. 진현 씨에게 무슨 문제가 생겨서 미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요.”

    최상훈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싹 가셨다.

    “뭐? 누가?”

    희나는 밖에 나갔다가 어떤 남자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부터 시작해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래서 그 사람 정체가 어떻게 되는데?”

    “이름이 파비안이랬어요. 검색해 보니까 되게 유명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러자 최상훈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파비안?”

    “아는 사람이에요?”

    “설마 파비안 앳킨스 말하는 거냐? 얼굴 매끈하게 생긴 그놈.”

    “맞아요!”

    정말 유명한 사람이긴 한가 보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는 최상훈마저 그를 알고 있는 듯한 것을 보면.

    희나는 자기가 얼마나 좁은 세계에 살고 있었는지 한탄하며 말을 이어 갔다.

    “맞아요. 자기가 도움 줄 수도 있을 테니 재미있는 소문 좀 있으면 넘기라면서 개인 연락처를 남겼어요.”

    “그놈한테 연락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끝나자마자 아저씨한테 달려온걸요.”

    최상훈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다. 그럼 아무 걱정 없어.”

    “아무 걱정 없다뇨?”

    “파비안 앳킨스의 별명이 뭔지 아니?”

    “아뇨. 저는 그 사람 얼굴이랑 이름도 얼마 전에 알았는걸요.”

    “스캔들의 제왕, 루머의 중심이란다.”

    “스캔들……이랑 루머?”

    “그래. 파비안 그놈이 말하는 것 중 절반은 믿으면 안 된다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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