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64화
“쳇. 내숭은. 아무튼…… 말 나온 김에 대강 설명은 해 줄게. 여긴 일대일 전투형 던전이라 소수 정예로도 격파 가능해.”
“일대일 전투형 던전?”
“한 마리 나오고 나서 한 마리 나오고, 이런 순서라는 거야. 떼거리로 덤비는 것보단 훨씬 편하지.”
“아……. 그건 그래요.”
희나는 밀물처럼 몰려들어 오던 좀비 몬스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엄청난 숫자에 천하의 강진현조차 난색을 표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네가 걱정하는 만큼 던전 공략이 어렵지는 않을 거야. 나도, 화원호 헌터도 A급이고…… 강 헌터도 작아지긴 했다지만 일단 보통 헌터들보다 능력치가 훨씬 뛰어나니까.”
우민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대신 문제라면, 미로형 던전이라 길을 찾는 데 좀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것 정도?”
“미로형 던전은 벽을 뚫고 전진하면 됩니다.”
강진현이 과격한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우민아도 그 무식하기 그지없는 계획을 두 손 들고 반겼다.
긴장감 떨어지는 대화였다. 덕분에 희나의 불안도 금세 가라앉았다.
“하긴. 지난번에야 비전투계 각성자에, 비각성자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힘들었던 거겠죠?”
청룡 길드의 스페셜리스트가 모인 이 공략 팀은 그때의 오합지졸과는 달랐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강진현 저주 풀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좀 해 줘.”
그보다 더 걱정해야 하는 건 던전 공략 보상으로 저주를 풀 수 없을 경우였다.
‘길드장님도, 덕삼 아저씨도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이대로 저주가 계속된다면 상황은 한층 더 곤란해진다.
강진현이 처리해야 할 상급 던전도 문제였고, 정부 관련 기밀 업무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S급 헌터의 상태 변화가 가져올 반향은 엄청났다.
아슬아슬하게 균형 잡혀 있는 길드 순위, 헌터 랭킹 순위, 심지어 국가 간의 알력까지 요동칠 게 분명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까지 흔들리게 돼.’
강진현 하나가 사회에 미치는 여파가 이만큼이나 컸다.
‘어떻게든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야 할 텐데.’
희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이번 또한 행운이 따라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 *
다음 날, 강진현, 우민아, 화원호는 희나가 차린 따끈한 아침밥을 먹고는 던전으로 떠났다.
극비리에 나서는 임무였다.
“희나야, 걱정은 그만하고 나랑 학회 구경이나 하자꾸나.”
최상훈 감정사가 커다란 손으로 희나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걱정해 보았자 달라지는 일은 없으니, 지금 즐길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즐기자는 거였다.
세계 감정 학회는 팔콘 컨벤션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S급인 최상훈을 필두로 전 세계의 감정사들이 모이는 행사인 만큼 컨벤션 센터는 커다란 규모가 무색하게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오…….”
희나는 가지각색의 차림새를 한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잠시 정신을 놓았다.
“많지? 감정사들만 오는 행사가 아니거든. 정부 관계자나 사업가, 헌터들도 많이 참여해서 그렇단다.”
최상훈이 행사 요모조모를 설명해 주던 참이었다.
“어? S급 감정사님이다!”
“어디? 어디? 나도 볼래!”
사람들의 이목이 한꺼번에 쏠리고, 수십 가지 언어가 단숨에 통역되어 들렸다.
희나는 수십, 아니 수백의 인원이 보내는 열렬한 눈빛에 질려 버렸다.
군중은 잠시 웅성거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최상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스터 최!”
“저와 이야기를!”
“비켜! 이거 감정부터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 어억!”
성난 들소 떼처럼 가까워져 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희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대로라면 사람들한테 치여 쓰러질지도 몰라!’
사람을 상대로 대청소 스킬을 써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스리슬쩍 SSS급 신문지를 꺼내려 할 때였다.
“간격을 유지하십시오.”
“위험합니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희나와 최상훈을 경호했다.
모두 상급 헌터인지, 각성자투성이인 군중 앞에서도 마치 돌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최상훈은 이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
“내 인기가 이 정도다, 희나야.”
심지어 이 광적인 현장의 열기를 즐기기까지 했다.
“대기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은 희나와 최상훈을 VIP 대기실로 이끌었다.
“휴.”
문을 탁, 닫자마자 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최상훈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세계 감정 학회잖냐. S급 감정사가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자리지.”
청룡 길드에서 최상훈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건물 안을 배회하는 털털한 아저씨, 정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S급 감정사라 하면, 전 세계에 단 세 명뿐인 귀한 인재였다.
이 학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만한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와…….”
희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최상훈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만으로는 잘 몰랐는데, 지금 인기를 보니까 아저씨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확 느껴지네요.”
느슨하게 입은 정장이 영 못 미더워 보일 법도 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엄청난 실력자의 여유로까지 보였다.
“그나저나 까만 옷 입은 사람들은 뭐예요? 전속 경호원 비슷한 건가요?”
희나의 물음에 최상훈이 설명했다.
“그래. 사실 우리 쪽 수행원이 경호 역할로 붙어 줘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모두 다른 일 때문에 바쁘잖냐?”
그는 팔콘 길드의 극비 던전을 넌지시 언급했다.
“그래도 우민아 팀장이 제대로 얘기를 해 뒀는지, 팔콘 길드에서 경호팀을 보내 준 것 같구나.”
“오…….”
이에 희나는 작게 감탄했다.
대체 어떤 조건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강진현의 상태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던전에 경호 문제까지 전부 해결한 건 대단한 능력인 게 분명했다.
‘고기 먹기 좋아하는 호탕한 언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쟁쟁한지 다시 한번 체감했다.
S급 헌터 강진현, S급 감정사 최상훈, 미국 최고 길드를 구워삶을 재간이 있는 우민아…….
한편, 최상훈은 시계를 힐끔 보았다.
“이제 곧 개회사 시작할 것 같은데, 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거든. 개회사는 영 재미없을 테니, 여기서 기다리는 건 어떠냐? 행사 마치면 내가 전시관 소개해 주마.”
“상훈 아저씨랑 같이 다니면 아까처럼 난리 날 것 같은데요?”
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문밖을 가리키자 최상훈이 머쓱하게 웃었다.
“다른 S급 감정사 도착하고, 세미나랑 전시회 시작하면 다들 좀 진정할 거다. 각자 자기 연구 발표하느라 정신없겠지.”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래도 개회사는 저도 들으려고요. 아저씨도 연설 같은 거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건 들어 둬야죠. 괜히 저 없을 때 멋있는 척하시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장난스럽게 웃으니, 최상훈의 광대께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근엄을 떨려고 했던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사진이랑 영상 많이 찍어 둘게요.”
“어이쿠. 말하다 혀나 안 깨물면 다행이지.”
최상훈이 너스레를 떨기에, 희나는 그를 따라 킬킬 웃었다.
개회식은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뒤늦게 도착한 다른 두 명의 S급 감정사들은 아주 개성이 넘쳤다.
한 명은 최상훈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성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희원 또래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각각 가죽 앞치마를 매고, 후줄근한 힙합 티셔츠를 차려입은 게 중요한 자리에 참석한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넥타이조차 없이 느슨한 정장을 걸쳐 입고 온 최상훈이 가장 근엄하고 진지해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상훈 아저씨는 체면치레를 하는 스타일이었구나…….’
출발하기 전, 차림을 좀 단정히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속으로 걱정했던 건 아주 헛일이었다.
최상훈의 말대로 개회식은 꽤 길었다.
특히 학회장의 연설이 몹시 길고 지루한 데다 어려웠다.
통역 아이템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회장이 하는 말의 반절 이상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통역기가 고장 났나?’
귀 뒤에 붙인 통역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희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또 보네요, 희수.”
“아, 깜짝이야!”
예상치 못한 데서 들려온 목소리에 희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긴 다리를 꼬아 앉으며 희나에게 조언했다.
“주위를 제대로 경계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렇게 자주 깜짝깜짝 놀라고 자주 넘어지는 거예요.”
“누구…… 파, 파비안?”
파비안은 선글라스를 슬쩍 올려 눈인사했다.
“이름 기억하네요. 잊었으면 서운할 뻔했는데.”
“며칠 전에 만난 사람 이름을 잊을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진 않거든요.”
희나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의심스럽게 살폈다.
“그나저나 실내에서 왜 선글라스를 껴요?”
심지어 식장은 무대 조명만 밝혀져 있어, 상당히 어두운 편이었다.
이 상태에서 파비안이 낀 것 같은 짙은 선글라스를 낀다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질문에 파비안은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당겼다.
“아. 이건 일신상의 이유 때문에. 그 이상은 노코멘트. 물론 희수가 나에 대해서 더 알게 되면 자연히 이해할 테지만…… 그다지 나에 대해 더 알아볼 의욕이 있어 보이진 않는군요.”
당연했다. 파비안은 길 가다 부딪친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진현 씨를 본 것같이 구는 수상한 사람.’
지금만 해도 이 조우가 전혀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그 펫, 안 데리고 나왔나 보네요?”
“예?”
“그 귀여운 털북숭이 햄스터 말이에요.”
……심지어 이런 질문까지 꼬치꼬치 던지는 사람이라면, 반갑게 느껴지기는커녕 더 멀어지고 싶은 기분만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