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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63화 (16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63화

    “그…….”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금발의 외국인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벌어진 가방 틈을 바라보는 듯했다.

    “아닌가? 동물인가?”

    허리를 숙여 가방 속을 확인하려 하기에 희나는 후다닥 가방을 품에 안았다.

    가방 안에서 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건 착각이리라.

    “가방을 함부로 들여다보다니, 좀 당혹스럽네요.”

    당혹에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 그러자 남자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미안, 미안해요. 내가 호기심이 많거든요.”

    그의 순순한 사과에 희나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동시에 민망함 또한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예의 없는 쪽은 저였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부터 해야 했는데…….”

    넘어지려던 자신을 도와주다 우연히 가방 속을 들여다본 것뿐인데, 역으로 성을 내다니. 꽤 염치없는 상황 아닌가?

    “대뜸 남의 가방 들여다본 것도 그닥 예의 있다고는 할 수 없죠. 피차 실수한 건 똑같으니까 괜찮죠, 오케이?”

    그는 시원시원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물었다.

    “궁금해서 그런데, 가방 속에 왜 애완동물을 넣고 다니는 거예요?”

    “인형인데요?”

    계획한 대로 뻔뻔하게 대꾸하자, 남자가 갸웃했다.

    “움직이는 걸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주먹보다 좀 크고…… 햄스터같이 복슬복슬하고.”

    1초도 안 되는 사이, 뭘 그렇게 많이 봤는지 모르겠다. 희나는 뚝 잡아뗐다.

    “제 애착 인형이에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요. 그나저나 나는 파비안이에요.”

    그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렸다. 녹색 눈이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하관만 보아도 짐작이 갔지만, 굉장히 잘생긴 남자였다.

    “어…… 저는 희, 희수예요.”

    희나도 얼결에 자기 이름을 말하려다가 주춤하고 다른 이름을 댔다.

    청룡 길드 소속으로 ‘이희나’라는 이름이 등록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선 정체를 숨기는 게 더 훌륭한 선택일 것 같았다.

    ‘가방 속에 뭐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으니까.’

    놀란 마음이 불러온 순발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희수……. 그래요. 희수는 관광객인가요?”

    “네. 미국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나저나, 세상 소식엔 관심이 없는 편인가?”

    “그냥 남들 보는 만큼 보는데…… 아니, 이런 건 대체 왜 물어보는 거예요?”

    “그야 내 얼굴을 봤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으니까요!”

    그는 또다시 선글라스를 들어 올려 희나와 두 눈을 마주했다.

    녹색 눈동자는 다소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희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이 수상한 눈빛은?’

    어쩐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희나도 지지 않고 눈싸움에 응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하하!”

    파비안이 다시 선글라스를 내려 끼며 피식 웃었다.

    살짝 시험받은 느낌이 든 터라, 희나는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파비안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아직은 멀었네요.”

    “멀었다니요?”

    “희수가 날 모르잖아요.”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인지?

    희나는 불손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비안은 자기 할 말을 마쳤다.

    “눈까지 두 번 보여 줬는데 내가 누군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충격인데요.”

    희나는 외국 소식, 그것도 외국 유명인에는 완전 문외한이었다.

    “그쪽, 유명한 사람이에요?”

    깜짝 놀라 묻자 파비안이 킬킬 웃었다.

    “뭐, 그래요. 덕분에 오래간만에 신선한 기분도 들고 재미있었어요.”

    예의상 사인 요청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번에는 그쪽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슈퍼스타가 되어 만나도록 하죠.”

    그는 깔끔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휙 뒤돌아 수많은 인파 속으로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 어어.”

    희나는 그의 등 뒤를 향해 어물쩍 손을 흔들다가, 품에 안은 가방을 슬쩍 펼쳐 보았다.

    강진현은 가방 한구석에 얌전히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괜찮아요, 진현 씨?”

    가방 안에 머리를 반쯤 집어넣은 채 속삭이자 곰돌이 인형 옷을 입은 강진현이 근엄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표정이 다소 석연치 않은 것이, 분위기가 아리까리했다.

    “별로…… 느낌이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착각입니다, 희나 씨.”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대충 봐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걸요.”

    희나의 추궁에 강진현은 마른세수했다.

    “하…….”

    그 와중에 자신이 입고 있는 보송보송한 털옷을 보니 더 심란해진 듯, 깊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애처로워 보였으므로, 희나는 강진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숙소로 돌아왔다.

    밖에서 나누기에는 다소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숙소 도착했어요. 얘기해 보세요, 진현 씨.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강진현은 희나의 라탄 토트백에서 풀쩍 뛰어나왔다.

    어느새 귀여운 곰돌이 인형 옷도 벗어 던진 채였다.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닙니다. 아까 같은 상황에서 몸도 드러내지 못하고, 가방 속에 숨어만 있어야 하는 게 갑갑하게 느껴졌을 뿐입니다.”

    그의 말에 희나는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외국에 왔다는 설렘에 잠시 잊고 있던 미안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몇 주 동안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죽은 듯 지내려니 얼마나 갑갑할까? 거기다 이건 나 대신 저주를 맞아서 이렇게 된 건데…….’

    희나가 죄책감에 풀이 죽은 한편, 강진현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래 몸으로 온종일 희나와 붙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함께 다녀 보니 세상엔 위험한 놈들이 너무 많고도 많았다.

    예를 들어 희나의 시선이 향했던 잘생긴 남자라든가, 희나에게 호객하던 잘생긴 남자라든가, 넘어지려던 희나를 일으켜 세워 수작을 걸던 특히나 수상하게 잘생긴 남자라든가…… 말이다.

    마지막에 보았던 수상한 남자, ‘파비안’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더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멋대로인 남자가 희나에게 접근하다니…….

    ‘어떻게 해서든 몸을 되찾아야 한다. 한시가 급해.’

    길드장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랬다. 귀여움만으로는 안 됐다.

    강진현은 희나에게 이성으로 보이고 싶었고, 가장 매력적인 상대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상대가 되고 싶다.’

    노골적이니만큼 부끄럽게까지 느껴지는 욕망이었다.

    ‘희나 씨는 좋은 사람이고, 챙겨야 할 사람도 점점 늘어나지.’

    희나 주변에는 사람이 늘 넘쳤다.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게 되듯, 사람을 이끄는 따스함이 있었다.

    강진현은 희나의 상냥함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동시에 강진현은 희나의 그런 면을 좋아했고 지켜 주고 싶었다.

    ‘겁 많고 조심스럽지만 사람 좋아하는 무른 사람.’

    희나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래서 그럴까?

    반대급부로 희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진현 씨, 무슨 생각 해요?”

    희나가 테이블 위에 턱을 괴며 물었다.

    강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저주를 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현 씨도 이렇게 있는 거, 많이 갑갑하죠? 저 대신 저주를 맞는 바람에…….”

    “아닙니다. 희나 씨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은 건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강진현은 진실로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아니라 희나가 저주에 걸렸더라면, 길드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작아진 희나 씨를 보는 건 아주 귀엽겠지만…….’

    그렇지만 이런 당혹스런 일을 겪는 건 희나가 아니라 강진현 자신인 걸로 족했다.

    강진현은 복잡했던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희나를 바라보았다.

    희나와 눈을 마주하면서 아쉽거나 나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나 씨와 제대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 나눈 지 꽤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슬슬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 *

    우민아는 팔콘 길드 관계자와 무슨 담판을 지었는지,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가 너무 유능해서 당황스럽다, 정말.”

    그녀는 낄낄 웃으며 맥주 한 캔을 순식간에 비웠다.

    “그놈들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아, 이거 꼭 기억해 가지고 길드장님한테 보여 드려야지. 길드장님 말대로 잘됐다고 말이야.”

    무언가 길드장이 지시한 바가 있었고, 그걸 아주 잘 수행해 낸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결과는 청룡 길드에 유리한 쪽으로 돌아갔을 테고.

    “내일이 던전 리셋일이래. 나랑 강진현, 화원호 헌터 셋이 함께 던전 열리자마자 입장할 거야.”

    “팔콘 길드 관계자는 안 들어가고요?”

    “당연하지. 우리 쪽 상황은 아직 극비야. 우리 측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찾아왔다는 것 정도만 알지, 강진현의 저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을걸.”

    “그렇게 일방적인 거래가 가능하다고요?”

    “이게 바로 이 우민아 팀장의 능력이라는 거지!”

    우민아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셋이서…… 아니, 진현 씨 빼면 둘이서 던전 입장하는 거잖아요. 괜찮은 거예요?”

    희나는 걱정했지만, 우민아는 씨익 웃기만 했다.

    “괜찮아. 여기 B급 던전밖에 안 되거든.”

    “그래도 던전 종류에 따라서 사람들 더 필요하고, 막 작전 짜야 하고 그런 것 아니에요?”

    “오올, 청룡 길드 취업 반년 만에 전문가 다 됐네?”

    “아이, 언니. 계속 놀리지 말고요. 정말 걱정된단 말이에요.”

    주인 놓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희나를 보다 못한 강진현이 나섰다.

    “던전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쩝. 알았어, 금방 알려 주려고 했다고. 그렇게 날 보지 말아 줄래?”

    “제가 어떻게 봤기에?”

    “‘희나 씨를 불안하게 하다니, 이 사람은 천하의 쓰레기 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이군.’ 하는 눈빛.”

    “그런 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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