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162화 (16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62화

    * * *

    거의 스무 시간에 가까운 비행 끝에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장소는 커다란 호텔이었다.

    “우와…….”

    희나는 연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국적인 말씨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신기했다.

    우민아가 키득거리며 희나에게 속삭였다.

    “힐러 불러다 줘?”

    “네, 네? 힐러요? 힐러는 왜요?”

    “눈알 튀어나오고 턱 빠질 것 같아서.”

    가벼운 놀림이었다. 희나는 광대를 살풋 붉히며 눈을 흘겼다.

    “해외여행 처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신기할 수도 있죠!”

    “그래, 그래. 온 김에 많이 구경하다 가.”

    우민아가 희나의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트렸다.

    워낙 힘이 좋아서 몸까지 휘청거린 탓일까, 희나의 미니 백에 들어가 있던 강진현이 눈을 빼꼼 드러내고 한 소리 했다.

    “우민아 헌터, 희나 씨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우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다 들키겠다. 얌전히 있으라고.”

    그러면서 희나 가방을 꽉 닫아 잠갔다.

    “우민아 헌ㅌ……!”

    강진현의 목소리는 가방 안으로 먹혀 사라졌다.

    가방을 뚫고 나왔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으니, 속절없이 가방 속에 갇히게 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크크, 꼬시다.”

    우민아가 낄낄 웃었다.

    따라 웃으면 안 되는데, 우민아의 목소리가 너무나 유쾌했다.

    결국 희나도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까 웃어서 미안해요.”

    사과에 강진현이 반쯤 넋 놓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희나 씨가 즐거웠다면 됐습니다.”

    희나 일행은 호텔 상층의 로열 스위트에 짐을 풀었다.

    S급 감정사인 최상훈이 세계 감정 학회의 귀빈이었기 때문이다.

    “내일모레부터 학회 일정이 시작될 거야.”

    우민아가 며칠 동안은 시차 적응 겸, 푹 쉬어 두라며 조언했다.

    “학회는 일주일간 이어질 거고, 학회가 끝난 후에도 최상훈 감정사님 연구 교류를 핑계로 일 풀릴 때까지 미국에 체류할 거야.”

    “와……. 학회를 일주일이나 해요?”

    “학술 발표만 있는 건 아니거든. 이런저런 이벤트가 많아.”

    최상훈도 우민아의 설명을 거들었다.

    “고리타분한 학회는 아니니, 보는 재미는 있을 거다. 신기한 거 많이 보여 주마.”

    껄껄 웃는 최상훈을 쓱 밀치며 우민아가 손뼉을 짝짝 쳤다.

    “자! 나는 팔콘 길드 관계자 만나고 올 테니까, 나머지는 모두 휴식하십쇼. 내일까지는 자유 시간으로 아시고. 에, 또…… 그사이 절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관광하고 있도록!”

    * * *

    “아흐음…….”

    희나는 기지개와 함께 녹아내릴 듯 푹신한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몰려와 잠시 몸을 뉜 사이,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한낮이네.’

    미국 시간으로 오전에 도착한 탓에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쨍쨍했다.

    희나는 발코니 바깥 풍경을 잔뜩 구경하다, 외출을 결심했다.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살이 희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우민아가 나누어 준 통역 아이템을 장착하고 재빨리 외출 준비를 했다.

    ‘신난다! 미국이야, 미국! 기념품 잔뜩 사 가야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서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외출하실 생각입니까?”

    강진현이 테이블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앗, 진현 씨. 안 주무시고 계셨구나.”

    “네. 딱히 피곤하지는 않아서……. 그나저나 외출하실 생각이라면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희나는 슬쩍 강진현의 눈치를 살폈다.

    “음.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진현 씨가 작아진 건 비밀이다 보니……. 들키면 곤란해질 것 같은데.”

    “보이지 않게 잘 숨어 다니겠습니다. 은신 아이템도 쓰고요.”

    그는 풀쩍 뛰어올라 희나를 향해 날아왔다.

    희나는 반사적으로 그런 강진현을 손 위에 얹었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옆에 누구라도 있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 그거언…….”

    자그마해진 강진현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잘생긴 데다가 귀엽기까지 하다니!’

    ……적어도, 희나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윽, 모르겠다!’

    결국 희나는 눈을 꽉 감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긍정에 강진현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희나도 호락호락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말입니까?”

    “그건…….”

    희나는 슬쩍 짐가방이 있는 등 뒤를 힐끗거렸다.

    희나는 크게 감탄했다.

    “너무 잘 어울려요!”

    즐겁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강진현은, 희나의 기쁨을 위해서는 이 정도 일은 감내할 수 있다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옷이 몸에 잘 맞는군요.”

    “그러게요! 눈대중으로 사 뒀던 건데 진현 씨한테 딱 맞아서 다행이에요!”

    “예…….”

    희나는 인형용 동물옷을 입은 강진현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털이 보송보송하게 달린 옷을 입은 덕에 강진현은 한 뼘짜리 곰돌이 인형으로 보였다.

    특히 머리에 푹 눌러쓴 후드 위에 빼꼼 올라온 동그란 귀 두 개가 아주 깜찍했다.

    ‘작고 귀여워.’

    다만,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낯빛이 조금 어두웠으나…… 귀여움에 눈이 멀어 버린 희나는 그런 사소한 사실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렇게 다니면 사람들이 털인형이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이건 너무…….”

    강진현은 조금 불만스러운 듯 보였지만, 희나는 그런 모습에서조차 눈을 떼지 못했다.

    “아, 너무 잘 어울려요.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진현 씨는 뭘 걸쳐도 귀엽…… 아니, 잘생겼네요. 희나야, 너 정말 이거 잘 샀다.”

    급기야 인형 옷을 사기로 결정한 자신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희나 씨가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그 눈빛이 몹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므로, 강진현은 시무룩한 기분을 애써 눌러 삼켰다.

    거기다, 희나 말의 요지는 ‘강진현이 잘생겼다’라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다소 설레었다.

    한참 자화자찬하던 희나는 복슬복슬해진 강진현을 작은 토트백 안에 집어넣었다.

    가방은 라탄으로 얼기설기 짜여 있어 내부에서 강진현이 바깥을 볼 수 있는 재질이었다.

    “가방 안에서 진현 씨 좀 움직인다고 티 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얌전히 있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귀찮은 일은 없을 겁니다.”

    강진현은 가방 한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동시에 낮은 한숨이 폭 비어져 나왔다.

    ‘언젠간 희나 씨가 나를 애완 인형 정도로 생각해 버릴 수도 있겠군.’

    저주가 길어질수록 하루하루 강진현이라는 인간의 존엄을 조금씩 잃어 가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 뿐일까……?

    그는 이번 미국행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 되도록 빨리 본래 몸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귀여움으로 마구 깎여나간 이성적인 매력을 제대로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강진현은 이 저주에서 풀려나면 할 일들을 많이 계획해 두었다.

    호텔 주변은 몹시 깨끗하고, 볼거리도 많았다.

    특히 개중에 희나의 눈길을 가장 잡아끌었던 건 자유스러운 해변의 풍경이었다.

    건강한 빛깔로 태닝한 젊은 남녀들이 아주 화끈한 옷차림으로 해변을 누비고 있었다.

    “와…….”

    그 장관(?)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텁, 하고 가렸다.

    ‘다들 엄청나잖아!’

    순수하게 사람들의 육체미에 혼이 빠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누군가 희나를 불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었다.

    “더워 보이시네요!”

    귀 뒤에 붙이고 나온 통역 아이템 덕분에 낯선 언어는 자연스레 한국어로 변환되어 들렸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래요?”

    그는 작은 수레 위에 쓴 ‘ICE CREAM’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질했다.

    “시원하고 맛있어요.”

    이를 내보이고 웃는 미소가 꽤 근사했다. 이런 호객이라면 누구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하나 주세요.”

    희나는 값을 치르고 아이스크림콘을 받아 들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쾌활한 인사를 보내기에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희나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할짝할짝 핥으며 해변을 천천히 누볐다.

    뜨거운 햇살에 아이스크림이 금세 녹아 손가락 사이로 진득하게 흘러내렸지만, 괜찮았다.

    그것 또한 바다 냄새, 햇빛의 감촉과 더불어 이 순간의 한 부분이었다.

    희나는 잠시 모든 걸 잊고 자유를 만끽했다.

    강진현이 다소 파렴치한 질문을 속닥이기 전까지.

    “희나 씨는 벗은 몸을 보는 걸 좋아하십니까?”

    “예?”

    “해변의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시기에…… 근육이 많이 부푼 쪽을 더 좋아하시나 싶어서요. 방금 아이스크림을 팔았던 남자도 상당한 근육질이었고요.”

    강진현은 정말로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저런 건 보여 주기식밖에 안 되는 과잉 근육일 뿐입니다.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보다는 좀 더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는 편이…….”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다 들렸다.

    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를 대체 뭐로 보시고!”

    사람들의 스스럼없는 옷차림과 행동에 감탄한 건 맞았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입이 절로 벌어졌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진현 씨 눈에는 내가 사람들 몸매나 훔쳐보는 변태 같은 사람으로 보인 거야?’

    강진현에게 이상한 의심을 받게 된 건 무척 억울했다.

    심지어 강진현은 희나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까닭이 청년의 근육질 몸매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좀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고…….”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희나는 가방에다 대고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아니, 뭘 노력한다는 거예요!”

    “몸매를…….”

    “그, 그게 아니라니까요! 진현 씨는 지금도 충분…… 아니, 이게 아니라!”

    희나는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기 위해 인적 드문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던 와중, 잠시 주의를 잃고 발을 헛디뎌 그만 앞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악!”

    휘청하는 순간, 누군가가 희나의 어깨를 붙잡아 바로 세워 주었다.

    “고, 고맙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 인사를 하는데, 머리 위에서 흥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여운 인형을 가지고 다니네요.”

    희나의 등 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