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60화
* * *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이번에는!’
희나는 손을 꼭 맞잡고 흰 연기를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번 실험의 책임자인, 제1 마법 연구팀장 구수한이었다.
“으아아악! 이번에도 실패라니! 또! 실패라니!”
구수한은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난 죽었다! 죽었어! 길드장님한테 털릴 거라고! 탈탈 털릴 거야!”
방금 끝난 실험은 강진현의 저주를 풀기 위해 그가 구상했던 수많은 실험 중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니까 구수한 연구팀장의 뛰어난 능력으로도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콜록, 콜록. 연기가 왜 이렇게 많이 난담?”
희나는 절규하는 구수한을 제치고 걸어 나갔다.
연기가 피어났던 곳 한가운데는 쁘띠 사이즈의 강진현이 가만히 서 있었다.
“진현 씨,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뭔가 변화가 느껴지진 않고요?”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어휴.”
한숨을 푹 내쉬며 손바닥을 내밀자, 강진현이 풀쩍 뛰어 희나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희나는 그런 그를 자연스럽게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앞치마 주머니는 제법 깊어 강진현의 머리가 간신히 빼꼼 나올 정도였다.
“구수한 연구팀장님, 저희 나가 볼게요.”
“끄흐으윽……. 내 능력으론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네, 네에……. 새로운 방법 떠오르면 연락 주시고요.”
요 몇 주 연구팀을 순례하며 터득한 경험에 따라 구수한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이 상태의 연구팀 사람들을 위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진현 씨, 어떡해요? 일이 계속 안 풀리는데.”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해결되겠지요.”
연구실을 슬쩍 빠져나와 강진현과 속닥이며 복도를 걷는데 상급 헌터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희나 팀장님! 오래간만! 던전에 빨려 들어갔다더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희나는 흠칫 놀라 앞치마 주머니를 힐끗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강진현은 주머니 안에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휴. 우리 대화 못 들었겠지?’
한숨과 함께 앞에 선 남자를 마주 보고 인사했다.
“우범 헌터님! 오래간만이에요.”
“진짜 오래간만이죠! 이번 던전 깨는 데 한 달 반이나 걸렸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한참을 구시렁거렸다.
평소였다면 흥미 있게 들어 줄 이야기였지만, 주머니에 저주에 걸린 강진현이 들어 있다면 상황은 달랐다.
‘진현 씨 불편할 텐데. 얘기 언제 끝나지?’
눈알을 도르륵 굴릴 때였다.
“그나저나, 강 헌터는 어디 있대요?”
“예, 예에?”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자 헌터는 킬킬 웃으며 희나의 뒤꽁무니를 손짓했다.
“강 헌터가 희나 씨 맨날 쫓아다니잖아요. 오늘은 왜 없나 해서.”
“아, 아! 얘, 얘기 못 들으셨어요? 진현 씨 장기 임무 있어서 자리 비운 지 꽤 됐는데…….”
희나는 쩔쩔매며 강진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일단 그는 서류상 ‘일급 기밀이라 절대로 밝힐 수 없는 장기 임무’에 투입된 상태였다.
“아, 그래요? 하긴, 일이 있으니까 없는 거겠지.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헌터는 강진현의 부재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찔리는 게 있는 희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다행인 일이었다.
“던전에 있을 때 희나 팀장님 손맛 엄청 그리웠던 거 알아요?”
그러면서 헌터는 희나가 만들어 준 시금치 양갱의 효과가 얼마나 탁월했는지 한참 떠들었다.
어쨌든 힘들게 개발한 게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었다.
“좋은 말 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전 일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재빨리 인사를 건네자 헌터가 낄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그래도 강 헌터 있으면 말 제대로 못 거니까, 반가워서 그랬어요.”
“평소에도 말 많이 걸어도 돼요.”
희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글쎄요!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그랬겠지!”
헌터는 속 모를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났다.
‘무슨 말이지?’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빨리 사무실로 향했다.
희나는 강진현을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미안해요. 중간에 갑갑했죠?”
마지막엔 희나가 사무실까지 풀쩍풀쩍 뛰어왔으니 승차감도 썩 안 좋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강진현에겐 그보다 다른 주제가 더 중요한 듯했다.
그는 어지럼증을 순식간에 날려 내고는 말했다.
“그 헌터와 꽤 친해 보이더군요.”
“예? 그 헌터요? 성우범 헌터님 얘기하는 거예요?”
“……예. 친근하게 대화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가끔 보면 인사하는 사이?”
한 달에 한두 번, 일반 길드원들에게 음식을 해 주며 청룡 길드 헌터들과는 거진 얼굴도장을 찍었다.
성우범과도 그런 사이였다. 얼굴은 아는 데다 적당히 친한 직장 동료 사이 말이다.
“그렇군요. 하긴, 희나 씨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시니까…….”
강진현이 책상 위를 좌우로 오가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조금 뾰로통해 보였고, 이 상황에선 더더욱 미안한 말이지만……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 안 돼. 참아야 해.’
희나는 씰룩거리는 입가를 애써 진정했다.
“오전에 고생했으니까 점심부터 같이 먹어요.”
“예!”
강진현은 희나의 사무실을 풀쩍풀쩍 뛰어 이동했다. 타다다닷! 하면서 벽까지 탔다.
‘내가 이동시켜 줄 수 있는데…….’
저주에 걸렸으면서도, 강진현은 어지간한 일은 자기가 스스로 처리하고 싶어 했다.
‘힘들 텐데도, 티도 안 내고. 대단해.’
희나는 강진현의 강인한 정신력에 감탄하며 간단한 점심을 차렸다.
계란 물을 풀어 밥알을 코팅하듯이 볶았다. 아주, 아주, 아주 잘게 다진 채소도 함께 넣어 센 불에 함께 휘적거렸다.
“계란 볶음밥이에요.”
윤기 흐르는 밥알 몇 개를 담은 소꿉놀이 접시를 놓았다.
물론 식탁 또한 강진현 전용으로 만든 쁘띠 사이즈 테이블이었다.
“양상추 샐러드도 있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요.”
작게 찢어 둔 양상추 여린 잎을 내밀자, 강진현이 자그마한 접시 위에 채소를 덜어 갔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둘은 식사를 시작했다.
간단한 메뉴였지만 볶음밥은 맛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희나는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귀, 귀여워.’
커다란 밥알을 베어 무는 강진현을 힐끔거리기 바빴기 때문이다.
아주 잘 만든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물론 강진현은 살아 있는 사람이 맞긴 했지만…….
희나는 볶음밥을 씹으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정신 좀 차리자.’
리치 네크로맨서의 저주로 강진현이 작아진 지 어언 보름째.
심각한 상황인 게 분명한데, 희나는 강진현의 모습에 적응하다 못해 귀여움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적응이라기보다…… 급한 건 급한 거고, 진현 씨가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니까!’
자기가 작고 아기자기한 것에 약한 줄은 알았지만, 그게 작고 잘생긴 강진현에게도 해당할 줄은 몰랐다.
‘으으으! 밥알 오물오물 씹는 것 봐!’
왠지 모르게 손가락이 근질거려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희나의 뜨거운 시선을 느낄 법도 한데 강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밥알을 몇 톨이나 해치웠다.
“포도도 먹어요.”
후식으로 청포도 한 알을 내주니, 무릎에 얹어 두고 열매를 야무지게 베어 먹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포도를 먹어야 완벽하게 보일지 아는 듯한 자세였다…….
* * *
“강 헌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강진현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 김규희 길드장의 심각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하자, 길드장이 ‘허’ 하고 헛웃음 쳤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긴급한지 알고는 있지?”
“제가 저주의 당사자 아닙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내 눈엔 위급함이란 게 읽히지 않을까?”
“마음을 급하게 가진다고 안 될 일이 풀리진 않습니다.”
“언제부터 낙천주의자가 되기로 했는지도 궁금해지고…….”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태연한 대꾸에 김규희 길드장은 뒷목을 붙잡았다.
“아이고, 골이야.”
여유롭다 못해 철혈이라고까지 불리는 길드장의 당혹이라니.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길드장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진현과 눈을 마주하며 읽은 속내가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나 참. 이 팀장에게 귀여움받는 게 그렇게 좋아? 이 상황에서? 응?”
“……싫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희나는 저주로 작아진 강진현을 몹시 귀여워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태평한 태도였던 건 아니다. 자기 대신 저주를 맞은 탓이라며 자책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장본인인 강진현이 태연하다 못해 이 상황을 즐기기까지 하니, 저도 모르게 이에 동화한 듯했다.
덕분에 희나는 요즘 작은 인형 크기로 변한 강진현을 하나부터 열까지 돌보는 데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강진현은 지금 상황에 꽤…… 만족하고 있는 상태였다.
속내를 읽은 길드장이 삐딱하게 웃었다.
“얼씨구? 나는 강 헌터가 이렇게 야망 없는 놈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야망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지나가는 강아지도 받을 수 있는 게 귀여움이야. 전혀 특별한 감상이 아니라고. 설마 귀여움받는 걸 사랑받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강진현의 몸이 주춤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멋진 모습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국에, 귀여움이라니. 쯧. 이 틈에 다른 놈이 나타나서 이 팀장 쏙 채 가면 어쩌려고? 그 몸으론 지금 어디 나서지도 못하잖아.”
“그건…….”
강진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당장 받는 관심에 만족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성우범이라는 헌터도 그랬지.’
그러고 보니, 오늘도 웬 헌터 하나가 희나에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호감이 밑에 깔린 채 친한 척 말을 거는데도, 앞치마 주머니 속에 숨어 견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진다면…….’
주먹이 쥐어졌다.
희나는 상냥했고, 사람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어영부영 이렇게 지내다가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자리를 빼앗겨 버릴지도 몰랐다.
심지어 강진현이 원하는 건 그 이상의 관계인데도 말이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제야 심각해진 표정에 길드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의욕이 생긴다고?’
이 녀석을 어찌해야 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