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159화 (15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59화

    12. 엄지 왕자와 살림꾼

    희나는 고개를 문밖으로 빼꼼 내밀었다.

    “다혜야, 밥 먹자!”

    그러자 사무실 책상에서 무엇을 끄적이던 권다혜가 고개를 휙 들었다.

    “강진현 헌터님은요?”

    “진현 씨는 일정이 있어서 오늘 밥 같이 안 먹어.”

    대답에 권다혜의 낯에 은근한 화색이 돌았다.

    “그럼 오늘은 우리 둘이서만 먹는 거네요?”

    “응. 너 좋아하는 반찬 많이 해 뒀어. 공부하느라 배고프지? 가자.”

    “……네!”

    권다혜는 병아리색 노란 앞치마를 입은 희나 뒤를 병아리처럼 쫑쫑 따라갔다.

    ‘귀여워라.’

    희나는 그런 권다혜를 힐끔거리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여전히 말은 없고 새침했지만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권다혜는 입술을 불퉁 내밀고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희나가 가는 곳마다 열심히 따라다녔다. 정말로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병아리 같았다.

    번거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나이 터울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긴 기분이라 흐뭇했다.

    특히 잔뜩 낯가리던 이전 모습을 떠올리면 예민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길들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먹자. 오늘은 오후에 실전 수업 있지?”

    “네.”

    “든든하게 먹어 둬야겠네.”

    S급 버퍼로 각성한 권다혜는 얼마 전, 청룡 길드와 전속 헌터 계약을 맺었다.

    사람들은 청룡 길드가 권다혜에게 어떤 파격적인 제안을 했을지 궁금해했다.

    여러 가지 추측이 오갔다.

    하지만 이 계약에 이희나라는 사람이 중요한 열쇠가 되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권다혜가 청룡 길드를 선택한 까닭은 순전히 희나가 속한 길드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규희 길드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희나를 소환했다. 그리고 새로운 일 하나를 제안했다.

    ‘권다혜 양이 이희나 팀장을 굉장히 믿고 신뢰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런데…… 혹시 강 헌터 말고 전속으로 한 명 더 맡아 볼 생각은 없어요?’

    길드장은 S급 버퍼인 권다혜를 청룡 길드에 단단히 붙잡아 줄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 존재가 바로 희나라고 눈치 빠르게 판단했다.

    그리고 길드장의 제안에 대한 희나의 대답은…… 거의 반쯤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희나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혜 하나 더 맡는다고 힘들 건 없지.’

    아무리 S급으로 각성했다곤 하지만, 권다혜는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됐다.

    어떻게든 보살펴 줄 어른이 필요할 나이다.

    희나는 열심히 식사하는 권다혜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 수업이랑 길드 훈련 병행하기 힘들진 않고?”

    “음. 괜찮아요.”

    “하긴, 다혜는 똑똑하니까 공부 걱정은 없겠다. 반 1등도 자주 했다면서?”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에요.”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희나는 권다혜의 광대께에 붉은 기가 스치는 걸 확실히 보았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유, 귀여워!’

    희나는 속내를 티 내는 대신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게 대단한 거지. 길드 와서도 꼬박꼬박 학교 숙제에, 복습까지 하고.”

    “……이제 학원 안 다니니까, 진도 쫓아가려면 그 정도는 해야죠.”

    새침한 어조에 희나는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 * *

    권다혜를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우당탕탕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따위가 들렸다.

    두터운 사무실 문을 넘을 정도의 소란이면, 보통 사건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어째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싸움 났나? 아니면 하던 실험이 잘못되기라도?’

    턱을 괸 채 사무실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퍼엉!

    기별조차 없이 문이 펑! 하고 터져 나갔다.

    쾅 하고 열린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펑! 하고 터진 거였다.

    그것도 튼튼하기 그지없는 사무실 문이!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희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사무실 입구는 먼지가 안개처럼 껴 있었다. 시멘트 가루였다. 문짝이 그대로 뜯겨 나간 탓이다.

    “뭐, 뭐…… 뭐야?”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어 중얼거리는데, 자욱한 먼지 사이로 작은 형체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희나의 책상 위에 풀썩, 내려앉았다.

    그리고…….

    “희나 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 지, 진현 씨?”

    희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눈을 비볐다.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강진현의 모습은 오색이 만큼이나 작아져 있었다.

    희나가 놀라거나 말거나, 강진현은 마른세수하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희나 씨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군요. 다행입니다.”

    어른 손으로 한 뼘가량 될까 싶게 변한 몸으로 그러니 진중하기보단 좀…… 귀여워 보였지만 말이다.

    ‘아니, 심각한 일이 생겼는데 이런 생각이라니!’

    희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렸다.

    “그나저나 진현 씨,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왜 이렇게 작아진 건데요? 실험이라도 하고 있어요? 저한테는 왜 찾아온 거고요?”

    와다다 질문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어디로 사라졌지?”

    “저기! 저기로 간 듯합니다!”

    “으아아악!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고함이 가까워졌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희나의 부서진 문 앞을 막아섰다.

    ‘어라?’

    먼지 너머로 보이는 얼굴들이 의외로 익숙했으므로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 민아 언니? 강목현 인사팀장님? 거기다…… 길드장님까지?”

    청룡 길드에 속한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핵심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정신없이 전개되는 상황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있는데, 김규희 길드장이 주변을 재빨리 살피곤 그녀답지 않은 급박한 목소리로 강진현을 가리켰다.

    “이 팀장! 강진현! 잡아! 빨리!”

    “지, 진현 씨를요? 왜요?”

    희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우민아가 소리를 꽥 질렀다.

    “간부 회의 중에 저 꼴로 변해 놓고 갑자기 토끼잖아! 아니, 누가 봤다가 어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차, 간부들 입단속 시켜야 하는데!”

    “그건 제가 처리하고 왔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인사팀장님!”

    우민아는 강 씨 형제 중 형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그 동생을 다시금 닦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동생 강 씨가 입을 여는 게 더 먼저였다.

    “우선, 저는 도망간 적 없습니다. 희나 씨의 안전을 확인하러 움직인 것뿐입니다.”

    고작 한 뼘짜리가 된 강진현이 매섭게도 대꾸했다.

    우민아도 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의실 벽을 다 부숴가면서 날아가? 엉? 나 여기 있소, 아주 광고를 하면서?”

    “정황상 네크로맨서의 저주 때문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그러면 희나 씨도 저주에 스쳤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희나였으면 진작 얌전히 여기서 기다렸겠지!”

    “그런 일이 생겼더라면 희나 씨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야, 지금 쬐끄매진 건 희나가 아니라 너거든?”

    “그건 다행인 일이지요.”

    “아니, 말대답이 아주 수준급이네 이거?”

    슬슬 과격해지려는 분위기를 정리한 건 길드장인 김규희였다.

    “싸울 거면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마저 싸워. S급 헌터에게 이변이 생겼다는 건 일급 기밀이니까.”

    * * *

    희나는 앞치마 주머니 안에 강진현을 숨긴 채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강목현 인사팀장이 회의실 문을 콱 닫아걸자마자 희나는 강진현을 회의실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진현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명 좀 해 봐요.”

    “아까 잠깐 말씀드렸지만…… 지난번에 상대했던 S급 네크로맨서의 저주가 발현된 듯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아졌다고요?”

    “예. 은밀한 저주가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라고 뜬 후에 갑자기 몸이 작아지더군요.”

    오늘 밥을 먹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하는 대답에 희나는 이를 까득 물었다.

    “……괜찮다면서요!”

    “예?”

    “제가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던전에서 나왔을 때도! 네크로맨서 공격받은 거 괜찮냐고 물었는데, 진현 씨가, 괜찮다고, 했었잖아요!”

    희나는 저도 모르게 흥분하며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안타까움이 잔뜩 담긴 내리침에 테이블이 사정없이 흔들렸고, 한 뼘짜리가 된 강진현은 잠시 비틀거렸다.

    자기가 딛고 있는 바닥이 흔들리거나 말거나, 강진현은 제법 당당하게 대답했다.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 후로 몸 상태는 변한 게 없었고, 복합 검사 결과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별 의미 없는 공격인 줄만 알았습니다.”

    조리 있는 설명에 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요. 다른 건 괜찮아요?”

    “모든 스탯이 20%씩 깎인 것 외에는 멀쩡합니다.”

    “……보통, 자기가 20% 약해졌다는 걸 멀쩡하다고 표현하진 않을 텐데.”

    김규희 길드장이 슬쩍 끼어들어 맞는 말을 했다.

    그러나 강진현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크기가 1/10가량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정도 힘을 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겠죠.”

    그 사고방식에 희나가 입을 뜨악 벌리고 있는 사이, 대화가 이어졌다.

    우민아가 끄응, 신음했다.

    “어쨌든 큰일이야. 너는 청룡 길드, 아니, 우리나라 유일의 S급 헌터고, 네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라가 뒤집어지겠지요.”

    “그래. 강진현! 너도 잘 알 것 아냐! 이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우민아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괴로워했다.

    반면, 강진현은 이 이상 침착해질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당황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방법을 찾는 수밖에요.”

    그는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강진현의 진중한 눈빛에 희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여전했다.

    “그리고 청룡 길드는 최고의 인재가 모인 곳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든 저주를 풀 방도를 찾아낼 수 있겠지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