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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48화 (148/228)

던전 안의 살림꾼 148화

“꺄악!”

희나는 앉아 있던 의자째로 뒤로 자빠졌다.

아니, 자빠질 뻔했다.

“희나 씨.”

강진현이 희나를 받아 냈기 때문이다.

“고, 고마워요.”

희나는 강진현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산등성이였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산이 아니었다. 시커먼 침엽수가 빼곡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스름하게 해가 지고 있는 탓일까, 울창한 나무가 든든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소름 끼치는 형상으로 바뀌어 보였다.

지진과 급작스러운 공간 이동.

이 두 가지 현상이 뜻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던전 게이트에 또 휘말렸어…….”

‘내 집은 어디에’ 스킬을 사용해 보니 지도가 떴다. 진짜 던전이 맞았다.

첫 경험 때와는 달리, 희나는 패닉 상태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어휴. 또야?”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던전이나, 비상 상황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덕이다.

“어떻게 희나 씨는 매번 이런 일에 휘말리시는지…….”

어쩌면 곁에서 희나를 걱정해 주는 강진현이 있는 덕일지도 모르고.

“오빠, 우리 오빠는요?”

희나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가장 먼저 희원을 찾았다.

분명히 셋이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하나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같이 있었으니까 떨어졌더라도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야.”

희나는 차분하게 중얼거리며 강진현과 함께 주변을 뒤졌다.

다행스럽게도 희원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희나야!”

“오빠!”

희나는 후다닥 오빠에게로 뛰어갔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그럼. 너는?”

“나는 진현 씨랑 같이 있어서 별일 없었어.”

“다행이네.”

남매는 평소 나눌 일 없던 우애를 몰아서 나눴다.

“그나저나, 이거 오빠가 모아 둔 거야?”

희나는 희원의 주변에 쌓여 있는 캠핑 용품들을 둘러보았다.

찌그러진 텐트에, 의자에, 백팩에, 침낭에, 즉석 밥, 랜턴까지…….

특히 마지막 랜턴은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이건 빠른 남매 상봉의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흐린 빛이나마 없었다면 진현이 희원을 금세 찾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랜턴을 툭툭 쳤다.

“어. 내가 모아 뒀어. 빈손으로 게이트에 휘말리는 건 위험하잖아. 근처에 보이는 대로 주워 왔지.”

던전 게이트는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근처에 있는 것들을 랜덤하게 집어삼켰다.

홀로 떨어져서 정신없었을 와중에도 희원은 생존을 생각하며 주변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줍고 있었던 것이다.

하급 헌터 생활 10년의 경험은 공으로 얻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랜턴 켜 두면 둘 중 하나라도 불빛 따라서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같이 있었으니까 멀리는 떨어지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불빛 때문에 몬스터들이라도 모여들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불쑥 든 생각에 희나는 오빠의 손에 있는 랜턴을 낚아채 불을 껐다.

“그 전에 너희가 날 찾아 줬겠지. 무슨 일이 있었으면 진현이가 더 빨리 나를 찾아 줬을 테고.”

이걸 태평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대범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일행에 대한 믿음이 넘친다고 해야 하는 건지…….

희나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어휴. 그래. 일단 좋게 끝났으니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에 같이 쓸려 왔을 물건들 더 찾아보자.”

“좋은 생각입니다.”

셋은 희원이 물건을 모아 둔 장소를 중심으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변을 싹쓸이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빠작, 하고 마른 가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촉각이 곤두섰다.

‘뭐지?’

어쩌면 희나 일행의 인기척을 듣고 찾아온 몬스터일 수도 있었다.

‘전투인가? 나 어두울 때는 전투 안 해 봤는데!’

희나는 인벤토리 창에서 SSS급 쓸모 있는 신문지를 꺼내 돌돌 말아 쥐곤 마른 입안을 침으로 꼴깍 축였다.

곁에 S급 헌터인 강진현이 있긴 했지만, 어두운 산길에서 몬스터를 마주치는 건 아무래도 등골이 오싹한 경험일 게 분명했다.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곳에서부터 무엇인가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기서 뭔가 보였어.”

“……면 어떻게 해요?”

사람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졌고, 이내 대화 내용이 완전히 들릴 정도로 선명해졌다.

“아니, 몬스터는 아닐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인공적인 빛이었어. 그러니까 얘들아, 너무 걱정하지 마.”

“여보, 위험하니까 너무 앞으로 나서지 마. 내가 앞에 설게.”

“고마워. 자기도 조심하고.”

“권환웅! 발 조심해! 너 때문에 한꺼번에 넘어질 뻔했잖아.”

“미안, 누나.”

순서대로 중년의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희나는 그 목소리의 정체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같은 캠핑장에 있던 사람들인가 봐요. 가족끼리 온 팀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도 게이트에 휘말렸나 봐.”

희나의 속삭임에 강진현이 입을 열었다.

“거기, 사람 맞습니까? 민간인입니까?”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했기에 또렷이 들렸다.

그러자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대답했다.

“예! 저희 사람 맞습니다! 어른 둘에 애들 둘입니다. 가까이 가도 될까요?”

이에 희나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간인인 데다가 아이까지 끼어 있었다. 뭉쳐야 했고, 지켜야 했다.

“이리로 오세요. 저희는 세 명이에요.”

“고맙습니다.”

풀숲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어른 둘과 아이 둘이 나타났다.

랜턴 등을 아주 약하게 켜서 얼굴을 확인하니, 캠핑장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맞았다.

“캠핑장에 계시던 분들, 맞죠?”

희나의 침착한 물음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키 작은 남자아이였다.

“여기 정말 던전이에요? 그럼 이제 우리 어떡해요?”

“괜찮아. 우리 일행은 다 각성자야. 특히 여기 있는 이 형이 굉장히 세니까, 걱정하지 마.”

희원이 나서서 남자아이를 안심시켰다.

한편, 아이의 부모는 어슴푸레한 불빛에 비친 강진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익숙한데.”

“혹시, 강진현 헌터……?”

“맞습니다.”

강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빳빳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어깨가 풀렸다.

“다행이다…….”

“구조대가 도착했나 봅니다. 그럼 이제 우리 괜찮은 거죠?”

“아니 그게 아니라요.”

희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저희도 휴가차 캠핑에 왔다가 게이트에 휩쓸려 온 거예요. 구조대는 아직 파견 안 됐을 것 같고요.”

“아, 이런…….”

희나의 경험상 구조대는 적어도 반나절은 있어야 도착했다.

‘서울 한가운데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도 그 정도였는데, 이런 깊숙한 휴양림이라면…… 그보다 더 걸리겠지.’

거기다 이곳은 꽤 외진 곳이니 게이트 발생 보고가 늦어질 수도 있었다.

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거나.’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보스를 잡아서 던전을 탈출해야지.’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방법이었지만, 일행에 강진현이 끼어 있으니 이 방법도 고려해 볼 만했다.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성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S급 헌터님이 같이 있으니까, 안전한 거겠죠?”

“일단 이곳이 어떤 던전인지부터 파악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강진현은 ‘여러분을 반드시 지킨다’라는 확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최선을 다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진심만은 확실히 느껴졌으므로 사람들은 천천히 놀란 마음을 안정시켰다.

“혹시 여러분, 여기 올라오면서 다른 분들은 보지 못하셨죠?”

희나는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을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

‘캠핑장에 있던 팀은 우리까지 합쳐서 총 세 팀이었는데.’

희나네 일행, 방금 만난 4인 가족 한 팀, 그리고 사이좋아 보이는 커플 한 팀까지 총 세 팀.

이들 이야기를 하자, 강진현이 표정을 굳혔다.

“그 두 사람도 쓸려 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빨리 주변을 수색해 봐야겠군요.”

이에 아이들의 아빠인 듯한 남성이 소극적으로 반대를 해 왔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우린 애들도 데리고 있는데…….”

일견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강진현 또한 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밤을 보내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닙니다. 야영할 장소를 물색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수색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득에 부부는 잠깐 시선을 나누었다.

결론은 금방 난 듯했다.

“예, 그럼 그렇게 할게요. 저희야 잘 모르니 헌터님을 믿는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애들 좀 잘 부탁드립니다.”

재빠른 결정을 내린 후, 일행은 희원이 주워 모은 캠핑 도구들과 음식을 나누어 들었다.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이니, 빠짐없이 챙겨 두는 게 좋았다.

“제가 선두에 서서 길을 열 테니, 희원 형님이 후미를 맡아 주십시오. 별일이야 없겠지만…… 일단 경험 있는 분이 뒤를 맡아 주면 좋을 듯해서.”

강진현의 부탁에 희원이 씨익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대신 위험하면 당장 뛰어와서 구해 줘야 하는 거다?”

“빈틈없이 주변 경계하겠습니다.”

강진현은 그래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지 희원에게 몇 가지 아이템을 떠안겼다.

일행은 천천히 산등성이를 걸어 이동했다.

랜턴은 켜지 않았다. 어두웠지만, 달이 밝아서 그럭저럭 시야를 분간할 만큼은 됐기 때문이다.

맨 앞에는 강진현과 희나가 섰고, 그 뒤로는 민간인 가족들이, 맨 뒤에는 희원이 섰다.

그렇게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쉿.”

강진현이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우뚝 멈추어 섰다.

“전방에 무엇인가 있습니다. 기운을 보아하니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몬스터로 보입니다.”

그의 경고에 사람들은 모두 바짝 얼어붙었다.

“잠시 후에 눈앞에 보일 겁니다. 모두 소리 내지 마시고…… 왔군요.”

말이 끝나자마자 환한 달빛 아래, 몬스터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헉.’

그리고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나 또한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몬스터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빛 아래로 비친 문드러진 회녹색 피부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조, 좀비인가?’

그랬다. 몬스터들은 마치 좀비 같은 모습을 한 채 어딘가를 향해 산비탈을 비틀비틀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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