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47화
심지어 던전은 해마다 늘어나고, 각성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언젠가 이 균형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긴장 속에서 아슬아슬 살아가고 있었다.
‘또다시 가족을 잃고, 아비규환 속에서…….’
희나는 여기까지 생각하다 고개를 저어 울적한 회상을 털어 냈다. 대신 밝은 목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쨌든, 저도 기뻐요. ……이건 너무 영웅적인 심리인가? 하지만 이 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올라요.”
저 먼 곳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희나와 희원, 강진현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미래는 바뀌었다.
이제 더는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희나는 무엇보다 그게 기뻤다.
선의를 가지고 행한 일이니만큼 일이 끝났을 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실을 직접 전해 들었을 때의 기쁨은, 상상 이상이었다.
“뿌듯할 줄은 알았지만…….”
다음번을 기약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일 줄은 몰랐다.
희원 또한 희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했다.
“이거, 의외로 할 만한 것 같지 않아?”
그러면서 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니, 여기선 강진현의 의사가 제일 중요했다.
초롱초롱한 시선에 그가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꽤 할 만한 일이군요.”
반가운 대답에 희나는 화색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네. 진심입니다. 절대 희나 씨나 희원 형님이 강요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요.”
강진현은 그답지 않은 너스레까지 곁들였다.
결국 희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강진현은 그 밝은 웃음을 기껍게 바라보았다.
11. 시원한 여름휴가와 살림꾼
캠핑장에 들고 온 짐을 털썩 내려놓으며 감탄했다.
“와, 날씨 너무 좋아요!”
무거운 짐을 들고 캠핑 사이트까지 올라오는 건 꽤 고역이었지만, 그보다 선선한 날씨가 더 인상 깊었다.
엊그제까지 오던 비가 싹 그치고 더위가 한풀 꺾였다.
덩달아 맑게 갠 하늘도 잘 닦은 통유리창처럼 반짝거렸다.
“희나 씨, 나머지 짐은 제가 가져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그래. 넌 여기서 짐 지키고 있어. 아니다,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럴 필요도 없겠다. 돌아다니면서 경치 구경도 좀 하고 그래.”
“어? 네. 알았어요. 고마워요.”
강진현과 희원은 남은 짐을 가지러 비탈길을 내려갔고, 희나는 혼자 남았다.
‘주변 좀 둘러볼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변 길을 따라 걸었다.
‘고즈넉하고 좋네.’
여름휴가를 받았으니 어디라도 놀러 가야 한다는 희원의 주장에 반쯤 끌려오듯 도착한 휴양림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희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던전 앞마당은 휴가 기분 내기엔 역부족이라고 주장했던 이유가 있구나.’
희원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고 싶다면 적당한 던전을 골라 캠핑을 가면 되지 않겠냐는 희나의 질문을 단칼에 잘라 냈다.
‘가족 여행도 오래간만이잖아. 평소랑 다른 게 있어야지!’
그도 그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먹고사는 게 바빠 가족 여행이니 뭐니 하는 건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희원의 말대로 여름휴가철을 맞아서 남들처럼 어딜 놀러 가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이 휴양림이었다.
캠핑도 할 수 있는 곳으로, 추억 쌓기에는 딱 적절했다.
물론 강진현의 유명세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으므로, 큰돈을 내고 주변 캠핑지까지 죄 예약해 두기까지 했다.
돈이야 제법 들었지만 희나 남매는 이제 그 정도 금액은 선선히 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풍요로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희나 일행이 캠핑장을 완전히 전세 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희나네보다 앞서 예약한 두어 팀 정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캠핑장이 워낙 넓어 그 정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듯했다.
“아빠! 나도 망치질할래요!”
“그래? 한번 해 볼래? 여기로 이렇게 쿵쿵 때리면 돼.”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이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 몇 안 되는 캠핑 이웃 중 한 팀인가 보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부모님을 도와 텐트를 설치한다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어릴 때 생각난다.’
희나도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계곡에 캠핑을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자기의 모습이 저랬을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앗!”
희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인영에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괜찮으세요?”
깜짝 놀라 습관적으로 상대를 살폈다.
상대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아 넣고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희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이 여학생은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서로가 가까워지는 줄도 몰랐나 보다.
“어디 접질리진 않았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네.”
조심스러운 사과에 돌아온 반응은 다소 냉랭했다.
하지만 희나는 그게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사춘기구나.’
텐트를 치고 있는 가족과 일행인 것 같은데,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니 반쯤은 억지로 끌려온 듯했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한창 재미있을 땐데, 캠핑 와서 지루한가 보네.’
희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발밑 울퉁불퉁한데 조심해요. 넘어질라.”
“네에.”
휴대전화를 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참견에 시큰둥하게나마 대꾸해 주는 걸 보니 양반이었다.
‘우리 바, 반휘는 좀 더 어둡게 사춘기가 왔는데…… 저 정도면 아주 발랄하지.’
희나는 던전 저 반대편에 있을 검은 달팽이를 떠올리며 캠핑장을 마저 거닐었다.
캠핑장 한구석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세운 텐트를 감상하던 여자가 남자에게 속닥거렸다.
“자기야, 타프가 좀 틀어진 것 같지 않아?”
“글쎄. 내 눈엔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 착각인가…….”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남자의 어깨를 톡톡 쳤다.
“자기! 미안한데 차에 내려가서 내 선글라스 좀 가져와 줄 수 있어? 글러브 박스 안에 넣어 뒀어.”
“알았어.”
남자는 군말 없이 캠핑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여자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더니…….
팟! 파팟!
바닥 깊숙이 박혀 타프 중심을 지지하고 있던 말뚝을 맨손으로 빼내고, 그 옆자리에 박아 넣었다.
희나는 잠시 눈을 의심했다.
‘내,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망치로 땅바닥에 박아 넣어야 하는 걸, 맨손으로 뽑아서 맨손으로 박는다고?
한편, 여자는 속 시원하다는 듯 손을 탈탈 털었다.
“햐. 이제야 살겠네. 역시 아까 비뚤어진 게 맞았다니깐.”
……어쩐지 누군가의 보아서는 안 될 비밀을 본 것 같았다.
‘잊자.’
희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산책을 계속했다.
캠핑장은 꽤 넓었다. 이런저런 시설까지 다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앗, 너무 땡땡이쳤나?”
희나는 서둘러 오빠와 강진현이 있을 캠핑 장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헐레벌떡 자리에 돌아와 입을 쩍 벌렸다.
“벌써 텐트 다 쳤어? 나도 같이 하지!”
어느새 캠핑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심지어 색색의 알전구마저 텐트 이곳저곳에 예쁘게 달려 있었다.
희원이 껄껄 웃으며 강진현을 칭찬했다.
“이거 진현이가 거의 다 했어. 몇 번 뚝딱뚝딱하는 것 같더니, 순식간이던데? 던전에서 야영을 자주 해 봐서 그런가?”
강진현은 가져온 음식물을 차곡차곡 꺼내어 준비하며 대답했다.
“야영 준비에는 익숙합니다. 이 정도는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정말인지,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이에 희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진현 씨는 이런 야영 자주 해 봤을 텐데, 별로 새롭지도 않겠네요.”
“헉. 그러게.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다. 우리가 귀찮게 한 거 아니야?”
남매는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강진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혀 아닙니다. 그건 일이고, 이건 휴식 아닙니까? 저도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놀러 나온 건 처음이라 기대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방 속에 있던 커다란 마시멜로 봉지를 들고 흔들었다.
“아무래도 던전에서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며 담소를 나누긴 좀 어려운 편이죠.”
그답지 않은 너스레에 희나는 킥킥 웃었다.
“그러게요. 그럼 우리 던전에서랑은 다른 느낌 많이 내다 가요.”
“좋습니다.”
희나는 강진현을 도와 식재료를 정리하고,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역시 캠핑답게, 그릴에 두툼한 고기와 커다란 새우, 치즈, 야채 등을 구울 생각이었다.
“캠핑장엔 사람 얼마나 있디?”
희원이 때깔 좋게 구운 고기를 열심히 씹어 삼키며 물었다.
“우리까지 합쳐서 딱 세 팀 있더라. 한 팀은 4인 가족이고, 한 팀은 남녀 커플이야.”
“오, 사람 거의 없네. 돈 쓴 보람이 있다.”
희원이 낄낄거리며 맥주 한 캔을 순식간에 비웠다.
그 모습이 제법 시원해 보여서 아이스박스 속 맥주에 손을 뻗으려 하는데, 희나의 앞접시 위에 새우가 턱 놓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쁘게 껍질을 까서 통통한 속살이 드러난 새우였다.
“어?”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숯불에 지글지글 구운 새우가 뜨겁지도 않은지 술술 껍질을 벗겨 내고 있었다.
희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강진현이 입을 열었다.
“새우 다 익었습니다. 드십시오.”
“고, 고마워요.”
“진현아, 나는?”
“뜨거우니 입 조심하시고요.”
“네에…….”
“내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거니, 얘들아?”
희나는 얼떨떨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강진현이 준 새우를 집어 먹었다.
입안에서 터지는 새우 살은 탱글탱글했고, 짭짤한 바다 맛이 났다.
‘맛있네.’
거기다 명치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게, 어쩐지…….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고, 바닥이 흔들렸다. 테이블 위에 놓은 수저와 그릇이 정신없이 덜그럭거렸다.
무언가 익숙한 감각이었다. 희나는 기억을 거슬러 이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 이건!”
번쩍!
희나의 외침과 동시에 눈앞이 번쩍 빛났다. 주변의 기운이 순식간에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