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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43화 (14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43화

    * * *

    커다란 웍에 오빠의 땅콩을 다글다글 볶았다.

    반복 노동이 지겨울 법도 했지만, 지금 희나에게는 아주 딱 적절한 일이었다.

    반쯤 넋을 빼놓은 채 진행해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던전……. 몬스터……. 시스템 에러……. 혼돈 구멍…….’

    시스템이 던져 준 수많은 힌트가 머릿속에 땅콩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으. 복잡해. 가설이 틀리면 그냥 헛짚은 거지만, 가설이 맞아떨어진다면…… 엄청난 일인 거잖아?’

    던전을 완전히 비활성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누구라도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본인들, 그러니까 희나와 희원 남매가 얽힌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좋은 소식이긴 했지만, 너무 스케일이 컸다.

    당신이 바로 세계의 환란을 저지할 수 있는 존재랍니다! 라니.

    지구 평화를 위해 힘쓰는 슈퍼 히어로가 아닌 이상, 보통의 평범한 소시민 마인드로는 불쑥 받아들이긴 힘든 내용 아닌가?

    ‘일단 일주일만 고민해 보자.’

    희나와 희원, 강진현은 일주일의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날벌레 던전의 상황도 확실히 체크해야 해.’

    만약 강진현의 말대로 날벌레 던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희나의 가설이 거의 99퍼센트 맞아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덕삼에게 조사를 맡겨 두었다.

    원덕삼은 일주일 이내에 만족할 만한 정보를 가져오겠다며 호언장담했다.

    * * *

    머리가 복잡하면, 몸을 열심히 움직여라.

    희나의 인생철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희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우와아!”

    “요즘 무슨 날인가? 이게 웬 떡이야!”

    헌터들이 열렬하게 희나를 반겨 주었다. 입가에 흐르는 침방울은 덤이었다.

    참고로 이들은 희나의 ‘바쁜 몸 철학’의 최대 수혜자들이었다.

    “오늘은 무슨 간식이야?”

    “아, 밀치지 마! 줄 서라고!”

    “끼야홋!”

    잡생각을 물리친다는 이유로 희나가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 댔기 때문이다.

    “오늘은 쿠키예요.”

    희나는 바구니 한가득 구운 쿠키를 휴게실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찌나 많이 만들었는지 쿠키 바구니에서 쿵, 소리가 났다.

    “많이 만들어 뒀으니까 싸우지 말고 골고루 나눠 드세요.”

    희나는 굶주린 개떼처럼 달려드는 헌터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쿠키를 두 개씩 얹어 주었다.

    헌터들은 커다란 쿠키를 두 개나 얻었다는 데 만족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희나 팀장님도 하나 먹어. 우유랑 같이 먹어.”

    낯익은 헌터 하나가 희나에게 팩 우유 하나를 건네며 잠시 쉬어 갈 것을 종용했다.

    “아……. 고마워요!”

    “별말씀을.”

    헌터들은 하나같이 괴팍한 면이 있었지만, 은근 잔정이 많았다.

    우유를 마시며 쿠키 하나를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우유를 건넨 헌터를 힐난했다.

    “고작 우유냐? 마석을 슬쩍 넣었어야지!”

    그 소리에 희나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안 그래도 잔소리 한번 할 때가 됐다.

    “……계속 제 주머니에 몰래 마석 집어넣으면 화낼 거예요!”

    대체 어떻게 숨겨 넣어 두는지 앞치마 빨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마석이 후두둑 떨어져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들을 헌터들이 아니었다.

    다들 입안에 쿠키를 욱여넣으며 태평하게 손을 휘저었다.

    “넣어 둬, 넣어 둬. 우리 성의야.”

    “아니, 여러분 챙겨 주는 걸로 인센티브도 많이 받고, 월급도 엄청 많이 받는다고요! 부담스럽게!”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마석을 볼 때마다 더 일하라며 등을 떠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마석을 넣어 줘야 그걸 보면서 희나 팀장님이 우리 한 번 생각할 거 두 번 생각해 주지!”

    “맞아. 그러다가 이렇게 간식도 한 번 더 얻어먹고.”

    “…….”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헌터들의 꿍꿍이도 별다를 바 없었다.

    “안 그래도 열심히 챙길 테니까, 좀 참아 봐요.”

    희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쿠키 한 개를 전부 먹어 치웠다. 고소한 우유와 함께 먹으니 꿀꺽꿀꺽 넘어갔다.

    한편.

    “근데 희나 팀장님, 토끼 던전 소식 들었지? 아쉽겠다.”

    “예? 예에?”

    누군가 건넨 예기치 못한 질문에 희나는 잡고 있던 우유 팩을 툭 떨어뜨릴 뻔했다.

    “그, 그게 무, 무, 무슨 말이에요? 토끼 던전이, 왜, 왜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야 했는데, 이건 누가 봐도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강 헌터랑 토끼 던전 다녀왔다…… 억!”

    말하던 헌터가 갑자기 퍽, 뒤로 자빠져 넘어갔다.

    그 모습이 놀랍지도 않은지 다른 헌터들은 그를 툭 쳐서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살벌한 기세로 쑥덕거렸다.

    “눈치 없는 놈.”

    “쟤는 저 과자 먹을 자격이 없어. 뺏어!”

    “강냉이를 털어 버려!”

    당장이라도 스킬을 날려 휴게실을 뒤집어 놓을 기세였다.

    희나는 어엿한 청룡 길드의 일원답게 상황을 진정시켰다.

    “허, 헌터님들! 진정해요! 휴게실 리모델링한 지 한 달도 안 지났잖아요! 싸울 거면 나가서, 저 옆의 공터에서 싸우세요!”

    사고 안 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사고를 덜 치길 바랄 뿐…….

    다행스럽게도 헌터들은 밥 주는 사람 말은 잘 따랐다.

    “에이, 아쉽다.”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었는데.”

    헌터들은 주먹을 우득우득 꺾으며 한 마리의 순한 양처럼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런데 저랑 강진현 헌터님이랑 토끼 던전 다녀왔단 소문이 돌았어요? 그건 상훈 아저씨만 그렇게 알고 있는…… 아, 상훈 아저씨구나.”

    희나는 강진현과 토끼 던전을 다녀왔냐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던 최상훈 감정사를 떠올렸다.

    ‘감정품에 대한 얘기만 안 하면 말해도 상관없다고 약속하긴 했는데, 아저씨 은근 입 가볍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호로록 소문을 내 버리는지.

    그리고 그 소문이 뭐라고 헌터들은 또 난리를 치는지.

    “아니, 최 감정사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걸 믿겠냐!”

    “그럼 뭐라고 말하라고!”

    잠깐 사이 2차전을 벌일 기세로 헌터들이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희나는 이 주제에 대해 금방 관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화염 스킬 넣어 둬요! 스프링클러 작동하면 어떻게 해욧!”

    헌터 휴게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곳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소동과 함께 상황이 정리되었다.

    희나는 휴, 하고 진땀을 닦으며 궁금했던 것을 슬쩍 물었다.

    “아까 얘기 나와서 그런데, 토끼 던전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몬스터가 사라졌다고 뉴스에서 얘기 많잖아요.”

    그러자 헌터들이 하나둘 입을 툭툭 열었다.

    “그래도 게이트는 남아 있는데……. 계속 관리는 해야 하지 않을까?”

    “글쎄. 몬스터가 없어졌으니까 더는 던전이라고 못 부르는 거 아냐?”

    “하긴 그래. 몬스터 없으면 그냥 경치 좋은 이공간이잖아.”

    난리법석인 언론과는 달리, 헌터들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여러분은 이번 일이 별로 신경 안 쓰이시나 봐요?”

    희나의 물음에 헌터들이 서로 시선을 나눴다.

    “뭐, 우리 길드 소관도 아니고. 거기다가 토끼 던전은 놀이터급의 하급 던전이었잖아.”

    “고등급 던전이었으면, 글쎄. 공략 프로젝트 하나 없어지고…… 편하고 좋겠다.”

    “맞아. 안 그래도 게이트 자주 열려서 각성자들 갈려 나가는데, 하나라도 없어지면 얼마나 편할까?”

    “끄흑, 일 얘기 하지 마라. 나 내일부터 토벌 나간다. 노숙할 생각 하니까 벌써 뼈 시리다.”

    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던전이 하나라도 안정화하면 좋기는 하겠네.’

    한국의 경우, 정부-길드 체계가 잘 잡혀 던전 관리가 체계적으로 잘되고 있는 편이었다.

    이런 한국도 헌터가 부족해 사람이 갈리고 있는 판국이니, 다른 나라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했다.

    ‘툭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곳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던전 리셋을 완전히 멈출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스템 에러를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해.’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나랑 오빠, 진현 씨, 이렇게 셋이서만 던전을 쏘다닐 수는 없잖아!’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받는다는 방안도 있었지만, 그것도 찜찜했다.

    그렇게 되면 평범한 삶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 아닌가?

    ‘밝혔다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고.’

    희나의 능력 전반을 밝혀야 하는 일이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고민해 볼 만한 상황이었다!

    희나는 관자놀이를 꾸욱 짚었다.

    “으으으……. 어떻게 해!”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고 헌터들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구했건만, 괜한 부담감만 지게 됐다.

    “일단 알았어요. 시간 더 늦기 전에 저는 이제 일어나 볼게요.”

    희나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빈 쿠키 바구니를 챙겼다.

    어쩐지 어두워진 낯빛에 헌터 하나가 위로 비스무리한 걸 건넸다.

    “희나 팀장님, 너무 시무룩하지 마. 장소가 바뀌어도 그곳에 얽힌 추억은 변하지 않아.”

    “맞아, 맞아. 어쨌든 토끼 던전에서 좋은 추억 만들었으면 됐지.”

    대체 무슨 말인지 뜬금없이 느껴지긴 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아, 네네. 알았어요.”

    뭘 더 따져 묻기도 피곤했으므로 희나는 위로에 적당히 응수하며 손을 흔들었다.

    * * *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둔 휴대전화 너머로 원덕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여수 밤바다 길드 관리하에 있는 D급 비충류 던전! 아가씨 말대로입니다. 정부에서 계속 주시하고 있는 듯한데, 수 주째 몬스터라곤 코빼기 하나 안 비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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