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42화
「그래. 그럼 앞으로 나를 반휘라고 부르도록.」
검은 달팽이…… 아니, 방금 ‘반휘’가 된 달팽이는 아주 만족스럽게 목을 쭉 뺐다. 그리고 희원을 향해 안테나를 흔들었다.
「제법 마음에 들었다. 흡족하군.」
「인정한다. 너희는 내 배웅을 받을 만한 인간들이다.」
희원이 킬킬 웃으며 맞받아쳤다.
“네 내면에 가득 찬 피와 어둠과 고독과…… 아무튼 그런 걸 집대성한 이름인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나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건 인간, 네가 처음이다.」
“오. 그것이 네 ‘어둠’이구나.”
「크큭.」
어찌 저리 쿵짝을 잘 맞춰 주는지…….
희나는 그 꼴을 더는 보지 못하고 오빠의 뒷덜미를 낚아채 질질 끌어당겼다.
“아! 문 닫히겠다! 이만 가자! 바, 바, 반휘야, 우리 이만 가 볼게.”
「Adios.」
“그래.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보자…….”
희나는 다음번 만남을 기약하며 작은 달팽이 반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쨌건 시스템이 어떻게든 다음 기회를 쥐어짜 낼 건 명확한 일이었으므로…….
* * *
태릉 지구 제17던전.
세간에 ‘토끼 던전’이라고 알려진 던전 게이트 인근.
돌풍과 함께 우르릉, 하며 바닥이 울렸다.
“뭐, 뭐야? 지진인가?”
직원 하나가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게이트에서 파동이 퍼지지 않았어?”
“착각 아니야?”
“무슨 일이 생겼나?”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헌터들도 웅성거리며 게이트를 손짓했다.
그만큼 짧지만 강렬한 몇 초였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던전 관리 인원만 있고, 다른 입장객이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길드에 보고 후 조를 편성하여 진입한다!”
관리자가 나와 손짓했다.
헌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토벌 준비를 끝낸 후, 토끼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
그 어느 던전보다 안전하기 그지없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던전은 던전이었다. 돌발 상황에는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기해야 했다.
“별일은 없겠지?”
“설마. 여기처럼 안전한 데가 어디 있다고.”
“그냥 우리 착각이었을 수도 있어.”
게이트 바깥을 지키고 선 헌터들은 속닥거리며 진입조의 귀환을 기다렸다.
“나왔다!”
진입조가 나온 건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모두 하나같이 귀신을 본 것처럼 이상한 낯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고해.”
관리자의 물음에 진입조 조장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던전 관련 이슈가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 그건 아니고요…… 문제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문제라는 겁니다.”
모호한 설명에 관리자가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헛소리 말고 제대로 설명해.”
조장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던전 안에 있던 몬스터가 싹 다 사라졌습니다. ……누가 청소라도 한 것처럼요.”
* * *
“입이 방정이야! 입이 방정!”
희나는 SSS급 신문지를 말아 쥐고 오빠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으악! 살려 줘! 바둑아! 아빠 맞아 죽는다!”
희원의 호들갑과 다르게 해충 박멸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그저 차진 소리가 났을 뿐이다.
“아니 반휘혈이라니! 애를 생각하면 그런 이름은 가르쳐 주면 안 되지! 나중에 이불 찬다고!”
“괜찮아. 달팽이는 이불 못 차!”
“으이구, 이 화상아!”
“왜 갑자기 어제 있었던 일에 화를 내고 난리야?”
“가만히 생각해 보자니 내가 쪽팔려서 그런다, 왜!”
“장본인은 좋아했으니 된 거 아니…… 아얏! 방금 건 진짜 아팠어!”
강진현은 남매의 애정 어린 한때를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았다.
‘보기 좋군.’
형제가 모두 과묵한 탓에 만나도 별 대화가 없는 강진현, 강목현과는 달랐다.
“어휴. 저걸 오빠라고!”
희나는 마침내 한숨을 폭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원이 강진현을 붙잡고 한탄했다.
“진현아, 얘가 저렇게 폭력적이다. 평소에 하는 거 다 내숭이야!”
“활기차군요.”
“……내가 말을 말자.”
결국 희원은 쯧쯧 혀를 차며 TV를 틀었다. 할 말이 없어진 마침 때맞춰 저녁 뉴스가 흘러나왔다.
- ……태릉 지구 제17던전, 세간에 ‘토끼 던전’이라고 알려진 던전에 이상이 생겨 봉쇄됐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정부 산하 연구팀이 파견되어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소식을 김태희 기자가 전합니다.
희나가 TV 화면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우리가 어제 다녀온 곳 아니에요?”
화면에 던전 게이트 인근을 찍은 영상 자료와 함께 취재진의 모습이 교차해서 나오고 있었다.
기자들은 언론 대응팀으로 보이는 정부 관계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 토끼 던전은 하급 던전이지만 굉장히 안정화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던전에 이변이 생긴 것은,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관계자는 아직 확답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러면서 부정적으로 해석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짧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뉴스에서는 던전 안정화란 무엇인지, 일반적인 던전 안정도는 얼마나 되는지, 안정도에 따라 위험도는 얼마나 낮아지는지 연신 보도해 댔다.
한참을 말없이 뉴스를 시청하던 희원이 끙, 하고 얼굴을 쓸었다.
“아무래도 이거, 퀘스트랑 상관있어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래.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던전 봉쇄에, 연구팀까지 파견한 거지?”
희나는 손을 발발 떨었다.
‘시스템 에러를 해결했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좋은 일이 벌어지기는커녕 문제가 생겼다며 뉴스에서 호들갑을 떨어 대니, 걱정이 될 수밖에.
희나는 고개를 휙 돌려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TV를 시청 중이었다.
“진현 씨!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 수 없어요?”
인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톱 헌턴데, 이런 소식 정도는 주워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오색이가 한마디 했다.
「밥값을 하라!」
‘맞아. 밥값을 해…… 아니, 이게 아니라.’
희나는 고개를 흔들어 헛생각을 떨쳐 냈다.
“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강진현은 휴대전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길드 관계자나 정부 관계자에게 연락해 볼 참인 것 같았다.
“제발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희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시스템을 향해 이를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놈의 시스템! 뭐 하나 믿을 게 없네!’
강진현이 통화를 끝내고 나온 건 그로부터 몇십 분이 지난 후였다.
희나와 희원은 강진현에게 후다닥 뛰어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뭐래? 알려 줄 수는 있대?”
강진현은 손을 들어 남매를 진정시켰다.
“우선, 나쁘게 해석할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정말요?”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설명을 이어 갔다.
토끼 던전의 경우, 위험한 보스 몬스터만 주기적으로 토벌하고 나머지 조무래기 몬스터들은 남겨 두는 편이었다.
토끼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 귀엽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 헌터들이 해당 몬스터를 해치우며 경험을 쌓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해당 던전 몬스터들이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은 거네요? 아니, 좋은 건가?”
던전 안에 있던 몬스터가 사라졌다?
이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다?
그럼 이게 정말 좋은 일인지 생각해 봐야 했다.
“변화는 좋지 않은데…….”
극도의 안전주의자인 희나는 급작스러운 변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잘 정리했던 규칙이 흔들리면 상황은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아지는 것이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기면 대비를 못 하게 되잖아!’
희나는 끙, 하고 신음했다.
당황은 당황이고 일단 상황을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제 거울 토끼 던전에 퀘스트를 하러 다녀왔잖아요?”
“예.”
“그 이후에 우리 세계의 토끼 던전의 몬스터가 싸그리 사라진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강진현이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이전에 거울상 나무 퀘스트로 다녀왔던 던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희나의 물음에 강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기밀 사항입니다.”
희나는 금세 말뜻을 알아들었다.
“마석에 기밀 서약했나 보네요.”
“……예.”
강진현이 맡는 수많은 기밀 임무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굉장한 위험을 감수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해 마석 계약 조건을 은근슬쩍 비껴 지나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났을 거다.
희나는 겁 없는 행동을 저지른 이 S급 헌터를 어찌해야 하나,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올곧게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요. 위험하니까.”
희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진현 씨 말대로라면 퀘스트로 다녀온 던전들의 몬스터가 모두 사라졌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싸그리 싹싹~♬」
진지해진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색이는 신나게 노래를 불러 댔다.
희나는 그런 오색이의 동그란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내리치며 생각에 빠졌다.
‘흐음. 그동안 알아낸 정보랑 시스템 메시지를 떠올려 보면…… 우리가 던전에서 한 건 시스템 에러를 메꾸는 일이었어.’
그리고 시스템 에러, 그러니까 공간의 틈새가 커지면 그 사이로 외계의 존재들이 침입한다고 했다.
거꾸로 생각하면, 희나 일행이 시스템 에러를 해결하면서 외계 생물체가 더는 던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희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엇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방금 나만 그 생각 한 거 아니지?”
희원 또한 무엇인가 유추해 낸 듯, 희나와 강진현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마침내, 희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추측을 입에 올렸다.
“그 외계의 존재를 던전 몬스터라고 생각하면 좀 말이 되는 것 같은데……. 혹시 우리가 시스템 에러를 해결해서 던전 몬스터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