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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39화 (13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39화

    “맛 한번 기깔 나네.”

    “효과도 장난 아닌데?”

    순식간에 근력과 민첩 항목이 올랐다. 버프 지속 시간도 1시간 30분가량으로 넉넉했다.

    보통 이 정도 효능이면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맛이 고약해야 하는데, 이건 맛조차도 좋았다.

    사기가 오르는 맛이었다.

    “가자! 양갱 버프 빠지기 전까지 처리 끝내는 거다!”

    “후방조, 백업 부탁합니다.”

    공략팀 근접 공격조는 강진현을 필두로 하여 적을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강진현의 손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은 안개가 거대한 늑대를 휘감았고, 마침내 늑대는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쿵!

    “됐어! 끝났다!”

    백업하던 헌터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명령을 내릴 보스가 사라졌으니 남은 몬스터들은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캬아아앗!

    물론, 몬스터 하나하나의 능력이 가공할 만하기는 했지만 청룡 길드의 노련한 헌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뒷정리는 깔끔하게 하고 가야지!”

    각 조장의 지시에 따라 토벌은 빠르게 마무리됐다.

    황야는 몬스터의 핏물로 물들었다.

    이제 공략팀의 맨 끝머리에 있던 채집조가 나설 차례였다.

    그들은 각자의 연장을 꺼내 들고 몬스터의 껍질을 벗기고, 배 속을 헤집었다.

    몬스터 부산물과 마석을 채집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이런 일은 최하급의 헌터들이 도맡아 하는 편이었지만, 청룡 길드의 채집조는 조금 결이 달랐다.

    중하급 몬스터면 몰라도 상급 몬스터를 해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상당한 힘과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청룡의 채집조는 어지간한 중소 길드의 전투 공략조만큼이나 노련한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부상자들은 알아서 빠지고, 여력 남는 놈들은 캠프 구축하자.”

    쓰러진 몬스터가 많은 만큼 채집 시간이 길어질 테니 한동안은 이 근처에서 머무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총괄 공략팀장의 지시에 따라 헌터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강진현 쟤 지금 뭐 해?”

    공략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어느 한구석을 가리켰다.

    “누워 있는데요.”

    “내가 그걸 몰라서 물었냐고!”

    원래의 강진현이었다면 팀장의 지시에 따라 묵묵히 제 할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진현은 캠프 한구석에 침낭을 펴고 굼벵이처럼 홀로 누워 있었다!

    심지어 작달막한 토끼 인형까지 꺼내어 소중히 품에 안은 채였다.

    피 냄새 나는 살벌한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날이 갈수록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착각 아니지?”

    팀장의 물음에 헌터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와르르 말문을 열었다.

    “착각 아니에요. 그저께는 집이 그립다며 인형한테 말까지 걸었답니다.”

    “보름이나 지났으니 지겨울 만도 하지.”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근데 저 정도면 향수병 아닙니까?”

    “사람이 2주 만에 향수병에 걸릴 수가 있던가?”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공략팀장은 끙, 하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전투 때는 이보다 더 멀쩡할 수가 없는데…….”

    심지어 멀쩡하다 못해 누구보다 의욕 넘치는 사람이 바로 강진현이었다.

    방금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몬스터들을 도살하고 다녔지 않았는가?

    ‘그랬던 사람이!’

    그랬던 그인데, 이젠 자기 할 일 다 끝냈다고 이렇게 태도가 바뀐다.

    그사이 누군가 강진현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와 귀띔했다.

    “전투조는 할 일 다 끝냈고, 이제는 잘 시간이라 누웠답니다.”

    ……거기다 던전에서 워라밸을 챙긴다고?

    던전 공략 시즌엔 하루에 채 한 시간도 눈 붙이는 일 없이 철저하던 ‘그’ 강진현이?

    “그러고 보니 이번엔 유독 낮 전투가 많긴 했군. ……아니, 생각해 보니까 해 지고 전투를 한 적이 없잖아?”

    헌터들은 지난 보름의 여정 동안, 어떻게든 해 지기 전에는 모든 전투를 마무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전투의 중심에는 당연히 헌터 강진현이 있었다.

    “그것 참, 별일이 다 있군.”

    임무 수행하는 로봇처럼 보이던 강진현이 다른 의미로 로봇 같아졌다.

    정해진 시간에 꼭꼭 누워야 하는 로봇 말이다.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거지?”

    다들 도롱이처럼 침낭 안에 누운 강진현을 의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

    “……취! 엣취!”

    희나의 요란한 재채기 소리에 희원이 한마디 했다.

    “요즘 따라 재채기가 잦다? 감기 걸린 것 아니야?”

    “아니, 그건 아닌데. 집에 먼지라도 쌓였나? 청소나 다시 할까?”

    “……오늘 아침에 한 건 청소가 아니야?”

    “에이, 간단하게 청소기만 돌렸잖아.”

    “세상은 그걸 청소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동생아.”

    남매는 두런두런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TV를 시청했다.

    지이이잉.

    때맞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원덕삼 아저씨’라는 이름이 화면에 반짝거렸다.

    희나는 화색을 띠며 전화를 받았다.

    “아! 아저씨! 오래간만이에요!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요?”

    - 그럼요! 괜찮은 걸 얻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오늘 비데 쓰러…… 아, 아니, 희나 아가씨 집에 직접 찾아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잠깐 마음의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희나는 모른 척해 주었다.

    “그래요. 설명은 직접 들으면 좋을 테니까요. 아파트 초인종 누르시면 문 열어 드릴게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실거주지로 등록된 아파트와 이어진 초인종이었다.

    “어서 오세요.”

    희나는 반갑게 원덕삼을 맞아들였다.

    본업인 정보상 일로 집을 방문해서일까?

    원덕삼은 만만했던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래간만입니다. 기한은 넉넉하게 주시긴 했지만, 일단 중간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그는 품 안에서 칩 하나를 꺼내 건넸다.

    “우선 이건 제가 조사 중 건진 데이터 전체 파일이고, 확인 후에는 완전히 삭제하는 걸 권장합니다. 설명은 제가 직접 해 드릴 테니…….”

    하지만 똥독으로 검게 죽은 안색을 한 채 무게를 잡아 봤자다.

    희나는 조심스럽게 원덕삼의 말을 끊 어냈다.

    “그, 아저씨.”

    “예?”

    “얼굴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화장실부터 쓰세요.”

    화장실을 손가락질하자 순간 그늘졌던 원덕삼의 얼굴에 생기가 돋았다.

    “아이고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럼 실례부터 하겠습니다!”

    희나는 허둥지둥 화장실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었다.

    ‘뭐, 중요한 이야기니까 컨디션 좋은 상태로 듣는 게 낫겠지.’

    비데의 효과는 영험하기 그지없었다.

    원덕삼은 반들거리는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와 희나와 희원 남매에게 굽신거렸다.

    “어째 그사이 신수가 더 훤해지신 것 같습니다! 아주 눈이 부십니다, 눈이 부셔요!”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프로페셔널하고 진지한 모습은 화장실 물에 쓸려 내려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그럼 바쁘실 텐데 본론으로 들어갈깝쇼?”

    원덕삼은 굽신거리던 태도를 싹 갈아 끼우고 진지한 낯을 했다.

    ‘똥쟁이 아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믿을 만하게 보이네.’

    희나는 그 의외의 면모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얘기 한번 들어 볼까요?”

    시스템에 휘둘리다 뒤통수 맞는 것도 질렸다. 이제부터는 원덕삼에게 얻은 정보로 먼저 움직이리라!

    불끈 주먹을 쥐고 있는 사이, 원덕삼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흠. 우선 이번 의뢰 건은 정말 어려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키워드도 정말 모호했고, 유기적인 정보 자체도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자 바둑이가 봉오리를 삐딱하게 흔들며 이파리를 동그랗게 말아 흔들었다.

    「바둑: 주먹맛 보고 싶음?」

    오색이가 바둑이의 보디랭귀지를 해석해 주었다. 친절했다.

    원덕삼이 삐질, 땀을 흘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아니! 급하시긴! 본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케이스는 정보가 없는 것 자체가 정보고, 키워드입니다.”

    “정보가 없는 게 정보라고……?”

    원덕삼은 허겁지겁 부연 설명했다.

    “제 말은 이 ‘공간의 조각’이란 것이 발견된 게 몇 개월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일자 이전으론 아예 관련 자료가 나오지 않습니다. 특정 세력에 의해 지워진 것도 아니고, 그냥 없습니다.”

    “흐음. 그럼 언제부터 공간의 조각이 언급되기 시작한 건가요?”

    “최초 보고 일자는 4월 초쯤 됩니다.”

    지금이 8월이니, 대충 4개월쯤 전 일이다.

    희나는 시간을 셈하며 중얼거렸다.

    “나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네?”

    “예! 아가씨 말이 따악 맞습니다!”

    갑자기 원덕삼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확히 말하면 희나 아가씨가 각성한 이후에 던전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거라, 이거죠!”

    이렇게까지 말하니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공간의 조각이 저랑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근데 그건 조금 비약 아닌가?”

    매달 나오는 각성자가 얼마나 많은데, 고작 시기상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고 이런 결론을 내리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원덕삼은 고개를 갸웃하는 희나를 설득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공간 뭐시기의 사용처를 아는 건 희나 아가씨뿐입니다.”

    기본적으로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들은 헌터넷에 등록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그것이 여태까지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건 국가 차원의, 전 세계적인 정보 교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의 조각’에 대해 세계 각국의 헌터들이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무리 나온 지 4개월가량밖에 안 된 부산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 정도로 정보가 없는 물건은 흔치 않습니다.”

    헌터넷 전체 데이터베이스를 훑어본 결과, 의뢰인인 희나 이상의 정보를 가진 이는 없었다.

    설명이 그럴싸했는지 희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희나는 끙, 하고 머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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