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38화
하긴, 동생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희나에게 이런 부탁까지 하진 않았을 테지.
“우선 초부터 불어요, 촛불! 촛농 떨어져요!”
희나는 강진현을 쿡쿡 찔러 케이크 촛불부터 불게 했다.
강진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촛불을 껐고,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깜짝 파티를 계획하긴 했지만, 진현 씨는 안 놀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강진현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생일상 앞에 앉고서야 입을 열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왜요? 오늘 진현 씨 생일이라고 저기, 사진이랑 전광판도 번쩍거리게 달려 있었는데요.”
희나는 창문 너머로 번쩍이는 강진현 얼굴을 가리켰다.
잘생긴 얼굴은 역시 크게 봐도 잘생겼다.
“그건……. 일단 감사합니다.”
자신의 얼굴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아니면 그걸 희나가 보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강진현이 얼굴을 붉혔다.
흔히 볼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찰칵, 찰칵!
그 와중에 강목현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집요하게 울렸다.
“어…….”
희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강목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인사팀장님? 우리 식사부터 할까요?”
파티는 순식간에 끝났다.
아니, 순식간에 끝난 듯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축하를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고, 신나게 떠들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너도 빨리 가! 치우는 건 내일 강진현 시켜라!”
“네네. 알았어요.”
“이 팀장, 여러모로 신경 써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녜요. 저도 같이 챙길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모두 아쉬운 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떠났다.
강목현과 나눌 이야기가 있는 듯, 강진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희나는 재빨리 사무실을 정리했다.
손님들이 뒷정리를 많이 도와주어서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았다.
여기에 희원의 재빠른 손까지 더하니, 강진현이 돌아왔을 즈음엔 사무실과 식당은 처음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얘기 다 끝났어요? 우리도 집에 가요.”
희나는 ‘홈 스위트 홈’ 현관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아파트까지 다 같이 걸어갔을 테지만, 오늘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경)☆ㅊㅋㅊㅋ★(축)☆」
강진현이 현관문에 발을 내딛자마자 오색이가 화려한 축하 인사를 날렸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바둑이도 두 잎사귀를 신나게 갈기며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앉아, 엎드려, 일어서, 빵야 등의 신묘한 묘기들을 선보였다.
강진현은 입술에 작게 웃음을 띤 채 그런 오색이와 바둑이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오색아, 바둑아.”
그리고 희나와 희원 남매에게도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희나 씨, 희원 형님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특별한 하루를 보냈군요.”
“아니에요. 인사팀장님 아니었으면 이런 자리도 마련 못 했을 거예요. 들으셨겠지만…… 인사팀장님 부탁받고 준비한 거거든요.”
파티는 강목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치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나의 통장에 엄청난 거금을 꽂아 주어서 최선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2차는 우리가 준비했다! 기념할 만한 날인데, 식구끼리 한잔해야지!”
어느새 식탁 위에 술상을 그득히 차린 희원이 둘을 불렀다.
사실 ‘한 잔’이라기엔 조금 많은…… 양으로 보였지만, 말술인 그들 남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양이 강진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강진현의 고개가 꾸벅, 기울었다.
그 모습에 희나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희원이 헉, 하고 놀랐다.
“야, 진현이 취한 거냐? 설마?”
“어…… 그런가 봐. 우리, 좀 많이 마셨나……?”
희나는 하음, 하고 하품하며 주변에 늘어진 술병들을 하나, 둘, 셌다.
특별한 날이라 종류별로 사 온 양주에, 맥주에, 한국인의 얼을 담은 이슬까지…….
셋이 비운 술병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으음.”
그 옆으로 강진현이 꾸벅꾸벅 졸고 있고,
「¿내가 알코올인가 알코올이 나인가?」
「@.,@」
심지어 오색이까지 소주잔 위에 동그란 머리통을 걸쳐 놓고 선문답을 날리고 있었다.
“얘는 또 언제 이걸 마셨대……?”
슬쩍 소주잔을 치우자 오색이의 안테나가 물풀처럼 흐느적거렸다.
「크헤헤헤!ㅋㅋㅋㅋㅋㅋㅋ킥! !!! !!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
심지어 자판 잘못 누른 것처럼 대화를 출력해 내니, 보통 취한 게 아닌 듯 보였다.
“달팽이도 취하는구나.”
“그, 그러게.”
「ffffffffffffffffffff ff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zzzzzzzzzzzzzㅋㅋzsdeee22222221111111111」
“……일단 얘는 치워 놓자. 정신 사납다.”
희나와 희원은 고주망태가 된 달팽이를 바둑이에게 맡겼다.
바둑이는 비틀거리는 오색이를 잎사귀 위에 올려 두고 자장자장했다.
「웨에에ㅔㅐㅐ애ㅐ애ㅐᅟᅢᆨ」
……오색이는 그마저도 멀미가 났는지 텍스트로 구역질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챱챱챱, 챡챡챡챡!
바둑이는 실감 나게 구역질하는 오색이를 데리고 저 거실 한구석으로 멀어졌다.
희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오색이, 주정이 아주 요란하구나.”
“오색이에 비하면 진현이는 아주 양반이구먼.”
“S급 헌터가 저렇게 주정하면 큰일 나, 오빠.”
말술 남매는 달팽이 한 마리와 S급 헌터 한 명을 두고 속닥거렸다.
“그런데 오색이는 달팽이니까 그렇다 쳐도, 진현이는 S급이잖아. 술이 이렇게 약할 수 있는 건가?”
희원은 눈을 반쯤 감은 채 꾸벅이는 강진현을 보며 근본적인 의문을 품은 듯했다.
랭크가 높을수록 각성자의 신체 능력은 높아진다.
고랭크 각성자의 경우 자연히 해독 능력도 대단하고, 어지간한 술로는 쉽게 취하지 않는 몸이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도 완전히 안 취했는데, 먼저 취해서 나자빠지는 S급이라니.”
부모님이 물려주신 주당 유전자가 이토록이나 강력했던가?
“진현 씨, 원래 술이 좀 약하긴 해. 나아져서 이 정도인 것 같은데.”
강진현의 취한 모습을 한 번 보았던 희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덜 취했나 봐.’
우민아와 셋이 술자리를 가졌을 때는 희나를 번쩍 안아 들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던가?
‘아, 이제 우리 집이 집이라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건가?’
강진현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가끔 흔들리는 머리통이나 천천히 끔뻑이는 눈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석상처럼 보였을 거다.
“뭐야, 그럼 일반인이었으면 술 한 잔에 쓰러졌겠네?”
무엇이 그리 웃긴지 희원이 낄낄거렸다.
“이야, 내가 S급 헌터보다 술 잘 마시는 C급이다!”
참고로 얼마 전, 희원은 D급에서 C급으로 랭크 업해서 ‘C급 농사꾼’ 타이틀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희나와 희원은 강진현의 주량을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남은 술병을 비웠다.
남매는 마지막 술 한 방울까지 모두 해치우고 나서야 자리를 파했다.
“오래간만에 실컷 마셨네!”
“근데 어째 진현이 생일 축하 자리에서 우리가 더 신났던 것 같다?”
“그, 그런가?”
희나는 뒤늦게 죄책감을 느끼고 강진현 앞에 냉수를 따라 주었다.
“진현 씨, 물 한 잔 드세요.”
“으음…….”
“옳지, 옳지.”
강진현은 술에 취해 반쯤 잠든 와중에도 희나의 말을 고분고분 따라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참…….”
“그것 참, 뭐?”
“아니야. 그냥, 자연스러워 보여서.”
자연스럽다 못해 어린 시절 보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잠시 겹쳐지는 듯했다는 사실은 절대 비밀이었다.
‘이것들이, 중간 단계는 다 건너뛰고!’
심지어 제대로 자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라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희원은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묘한 친밀감을 알았다.
‘눈이 있고, 눈치가 있으면 모르는 게 바보지.’
그런데 그 장본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하이고…….”
아무리 오빠라 해도 동생 연애사에 참견하는 건 과한 일이다.
“쯧, 갈 길이 구만리구먼.”
희원은 한숨과 함께 혀를 찼다.
오빠의 속내도 모르고 희나는 강진현의 어깨를 탈탈 흔들었다.
“진현 씨, 일어나 봐요! 잠은 누워서 자야죠!”
“…….”
10. 셔터 닫는 살림꾼
크르르르!
거대한 야수가 울부짖었다. 대지가 뒤흔들렸다. 가히 폭발적인 포효였다.
강진현은 한 치의 두려움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중급 몬스터를 터뜨려 내며 힐끗, 전황을 살폈다.
‘쉽지 않군.’
A급 던전 최초 공략 회차였다.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없이 진입한 던전이었다. 쉬울 리가 없었다.
심지어 이곳은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형 야수 몬스터의 터전인 듯 보였다.
지능이 낮은 하급 던전 몬스터들과 달리, 이곳의 몬스터들은 각각의 하급 던전 보스만큼의 이지를 지녔다.
크아아아아아!
거기다 그들을 지휘하는 보스 몬스터에, 수백 마리 몬스터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대격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던전에 진입한 헌터들 역시 전장을 수도 없이 누빈 베테랑들.
“5초 후 전방을 향해 원거리 공격! 5! 4! 3! 2! 1! 발사!”
쌔애애액!
퍼버벙, 펑!
공기의 화살이 조무래기들을 갈기갈기 찢었고, 이내 거대한 불덩이가 보스 몬스터 위로 떨어졌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보스가 있던 자리는 운석이라도 맞은 듯 깊은 크레이터가 생성됐다.
“뒈졌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겨운 행군이 이대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언제건 던전 공략이 마음처럼 이루어졌던 적이 있었던가?
그르르르…….
불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야수가 푸른 안광을 흘리며 기어 나왔다.
“빌어먹을! 퇴근은 글렀다!”
“헛소리 말고 진형 정비나 해!”
무시무시한 방어력이었다. 이대로라면 보스 토벌전은 장기전에 돌입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강진현도, 공략팀의 전략팀장도 상황을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전투가 길어지기 전에 몰아쳐야 합니다.”
“그래.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공격조 버프 빵빵하게 넣어 주고, 물약 빨아 둬!”
전략팀장이 나서 지시했다.
강진현은 인벤토리에서 녹색 양갱을 꺼내 한입에 삼켰다.
그 모습에 다른 헌터들도 잊고 있었다는 듯, 양갱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