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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37화 (13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37화

    “이걸로 뭔가…… 뭔가 기능이 있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시스템 창에는 특별한 손길과 깊은 정성이 닿는다면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여기서 특별한 손길이라고 하면, 보통은 아이템 제작 관련 스킬이겠지만…… 어쩌면 내 야무진 손끝 스킬도 해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나는 그럴싸하게 머리를 굴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각성 반년쯤 되니 이런 응용 사고도 하게 됐다.

    “음. 그럼 뭘 만들어 보지?”

    희나는 천 조각들을 앞에 둔 채 팔짱을 꼈다.

    시간이 얼마 없었으므로 일단 손이 많이 가는 건 곤란했다.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워도 안 돼.’

    희나의 손바느질 솜씨는 나쁘지 않았지만, 숙련되지는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조금 배웠다 뿐이지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이 직접 바느질을 할 일이라곤 거의 없었으니까.

    희나는 오랜 고심 끝에 이 천으로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다.

    “인형, 인형을 만들어야겠다!”

    고민한 것치고는 강진현과 썩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선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리저리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바느질로 만드는 선물이라곤 귀여운 지갑이나 인형 따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희나의 실력으로 만들어 줄 만한 적당한 물건은 찾기 어려웠다.

    그런고로, 희나는 선물의 모양보다 그 성능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뭐든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하다고 했어.’

    희나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했다.

    깊은 정성과 좋은 성능이 담겨 있다면 그 모양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마도.

    한번 마음을 결정하니 만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본을 뜨고, 자르고, 바느질했다. 솜도 사 와 텅 빈 인형 몸을 통통하게 채워 넣고, 허술하지만 귀여운 옷도 입혀 주었다.

    희나는 마지막 한 땀을 마지막으로, 손에 든 인형을 내려놓았다.

    “음, 이 정도면 나쁘진 않아.”

    가무잡잡한 색의 손바닥만 한 토끼 인형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귀 한 쌍이 귀엽게 팔락거렸다.

    그와 함께 완성 메시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와, 이게 정말로 되네.”

    반신반의하면서 만들었는데, 정말로 아이템을 만들어 낼 줄이야.

    ‘그것도 S급이 떴어!’

    희나는 잔뜩 흥분해서 만들어진 ‘애착 인형(S)’의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애착 인형(S): 품에 안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오는 애착 인형. 체력 회복 속도가 20% 효율로 증가한다.>

    “와. 꽤 괜찮은 게 떴잖아!”

    희나가 감탄한 건 체력 회복 속도 버프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문구 때문이었다.

    “품에 안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오는!”

    날카로운 기감 때문에 희나의 손길이 닿은 침상이 아니면 쉽게 잠들 수 없는 강진현에게 딱 알맞은 아이템이었다.

    ‘우리 집에서야 편히 재울 수 있다지만, 던전 공략으로 집 떠나 있으면 제대로 못 자는 게 걱정이었는데. 이거면 딱 좋아!’

    강진현이 좀 더 편히 자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희나는 토끼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괜찮은 게 만들어졌잖아?’

    빙그레 웃는 토끼 인형의 모습이 몹시 의기양양해 보였다.

    물론 그 얼굴 또한 희나가 그린 표정이었지만……!

    * * *

    [희나 씨: 진현 씨, 오늘 일 끝나면 제 사무실 좀 들러 주세요.]

    갑자기 도착한 메시지에 강진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서울에 7시 넘어 도착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늦으니 먼저 집으로 퇴근하십시오.]

    [희나 씨: 아니에요. 저도 오늘 야근하려고요. 늦는 김에 같이 퇴근해요!]

    전에 없이 적극적인 제안에 강진현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어이, 강진현. 뭐 때문에 그렇게 히죽거려?”

    옆자리에 앉아 함께 이동하던 구채산이 강진현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딱 잘라 대답하자 그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재미없기는.”

    심심해서 뭐라도 툭 던져 보았는데, 제대로 된 대꾸가 없으니 김이 빠진 듯했다.

    그는 혼자서 계속 투덜댔다.

    “아오, 그나저나 언제까지 뺑이 쳐야 하는 거야? 상위 랭커를 둘이나 모아 두고 지방 하급 던전만 돌리고 있잖아. 다른 길드들도 있는데 굳이 이런 임무라니……. 시간 낭비도 이런 시간 낭비가 없다.”

    “기밀 임무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아! 진짜 재미없는 인간일세그려!”

    구채산이 몸을 뒤트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던전 관련 연구원들을 데리고 2박 3일째 남해안 부근의 하급 던전을 돌고 있었다.

    하급 던전이라도 차라리 몬스터가 나오기라도 했다면 덜 지루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이 돌고 있는 던전은 보스를 클리어한 상태의 안전한 던전이었다.

    그러니까 상위 헌터를 둘이나 데리고 이동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또 정치 놀음에 끼어서 쓸데없이 치이고 있는 것 아니야? 참 나. 상위 랭커들이 꿀 빤다, 꿀 빤다 하는 거, 다 거짓부렁이라니까. 이런 뒤치다꺼리까지 다 해야 하는데 꿀은 무슨……. 똥이나 안 닦아 주면 다행이지.”

    구채산은 상황을 신랄하게 평했다.

    상위 랭커들은 대단한 무력을 가진 만큼 정부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실제로 S급인 강진현은 길드 업무만큼이나 정부 관련 업무도 많이 맡아 했다.

    그렇다고 랭크에 맞는 대단한 임무만 처리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상황도 모른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강진현은 우직한 성격 덕인지, 큰 불만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임무를 유출하지 않기로 마석에 맹세한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헌터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는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큰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구채산은 무뚝뚝한 강진현의 반응에 진저리 쳤다.

    “잠깐이라도 맞장구쳐 주기라도 하면 어디 덧나냐!”

    하여간, 빡빡하고 재미없기로도 대한민국 최고일 인간이었다.

    때맞춰 타고 있던 버스가 멈추어 섰다.

    “마지막 던전입니다. 도착했으니 차례로 내려 주세요!”

    앞좌석에 타고 있던 연구원들이 각자 장비들을 챙겨 들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나섰다.

    강진현과 구채산 또한 빠르게 내려 던전에 진입할 준비를 했다.

    아무리 하급의, 안정화한 던전이라 해도 위험은 도처에 도사려 있다.

    그것도 비각성자 비율이 절반쯤 되는 연구원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임무이니 더더욱 조심에 조심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건 임무를 쉽고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막바지까지 안전 조심하시고, 발밑도 조심하시고. 이상한 것 있으면 손부터 대지 말고 저희부터 부르시고.”

    일행은 구채산의 잔소리와 함께 던전에 입장했다.

    사아앗!

    게이트를 지나자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느껴지는 공기마저도 달랐다.

    ‘……이곳은?’

    그리고 강진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처음 입장하는 던전인데, 어째서?’

    이내 그는 이곳을 기억해 냈다.

    광활히 펼쳐진 숲, 그리고 높은 하늘.

    ‘……거울 던전.’

    얼마 전, 퀘스트를 위해 입장한 D급 던전과 꼭 닮은 곳이 아닌가?

    ‘퀘스트, 거울 던전, 완성된 공간의 나무, 그리고 정부 파견 임무.’

    본능에 가까운 예감이 속삭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인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긴 일렀다. 그저 예감일 뿐이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

    ‘일단 상황을 지켜본 후 판단해야겠군.’

    강진현의 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 * *

    희나는 다소 초조한 듯 자판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쳤다.

    [어디까지 왔어요?]

    몇 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떴다.

    [진현 씨: 5분 안에 도착할 듯합니다.]

    [진현 씨: 도착하자마자 희나 씨 사무실로 올라가겠습니다.]

    “5분 안에 도착한대요! 곧바로 여기로 올 거라네요!”

    희나는 호들갑을 떨며 주위에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우민아가 벽에 달린 풍선을 툭툭 치며 물었다.

    “희나야, 근처에 오면 어차피 우리 기척 다 눈치챌 텐데, 이걸 깜짝 파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참고로 우민아는 장기 프로젝트에서 복귀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된 상태였다.

    “걔가 진짜 놀라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흠. 눈썹이나 까딱해 줄지는 모르겠다.”

    “혼자 있다던 애 옆에 사람이 여럿 있으니 놀랄 수도 있지요.”

    희원이 넉살 좋게 받아쳤다.

    그랬다. 지금 희나의 사무실에는 도합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희나와 희원 남매, 인사팀장 강목현, 우민아, 최상훈 감정사까지…….

    강진현과 가장 친분 있는 사람들이었다.

    ‘길드장님도 가까워 보였지만…… 내가 못 부르겠더라.’

    희나는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 길드장이 있으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어쨌든, 희나는 이 사람들을 초대하여 생일 파티를 꾸렸다.

    친동생이라 그런 걸까, 냉랭해 보이는 강목현조차도 파티 준비에 제법 열성이었다.

    “강진현 건물 진입한다, 진입한다!”

    창밖을 살피던 최상훈이 강진현의 도착을 알렸다.

    다들 숨을 죽이고 시선을 교환했다.

    결국 S급 헌터인 강진현이 그들의 존재를 먼저 알아챌 것이란 걸 알고 있긴 해도, ‘깜짝 파티’라는 이름은 은근히 사람을 설레게 했던 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강진현이었다.

    “제가 문 열어 드릴게요! 잠시만요!”

    후다닥 달려 나가며 사람들에게 눈짓했다. 다들 손에 폭죽이니 풍선이니 꾹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세요, 진현 씨!”

    희나는 활짝 웃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역시 강진현은 사람들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로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

    “생일 축하해요!”

    “축하해!”

    “귀 빠진 날! 축하한다!”

    우렁찬 환호에 강진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기척은 눈치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깜짝 파티는 성공했다!

    “이건, 무슨……?”

    “진현 씨, 오늘 생일이잖아요! 생일 축하해요!”

    희나는 강진현의 등을 톡톡 밀었다.

    커다란 몸이건만, 그는 희나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움직였다.

    “뭐야, 진짜 놀란 거야? 사진! 사진 찍어 둬야 해! 저 표정 좀 보라고!”

    “우민아 헌터, 말만 하지 말고 비켜 보십시오.”

    깔깔거리며 웃는 우민아 옆에서 강목현은 말없이 찰칵, 찰칵, 사진을 찍어 댔다.

    희나는 그런 인사팀장의 모습에 하하 웃었다.

    ‘의외로 좀…… 아니, 상당히…… 팔불출……이시구나.’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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