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36화
* * *
거울상 던전과 관련한 퀘스트를 처리한 이후,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청룡 길드에 들어온 이래 제일 바빴던 한 주였던 같아.’
시금치 연구가 끝물이었다.
김규희 길드장에게 시제품 확인에 승인까지 받자, 일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희원이 또다시 길드에 방문해 길드장과 담판을 지었으며, 남매는 아주 큰 돈을 얻게 되었다.
한편, 희나는 유한이가 제공한 시금치 가루를 사용해 양갱을 대량 생산했고, 연구 종결 보고서도 작성했다.
참고로 연구 종결 보고서는 유한이의 기이한 집착이 섞여 거의 법전 수준으로 두꺼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희나는 그 와중에 일반 헌터들을 위해 간식까지 마련했다.
사실 이건 필수가 아닌 선택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희나의 음식 앞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그들을 외면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 함께 모여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내 배가 다 부르다니까.’
시원한 휴게실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원한 화채를 함께 들이켜니 더위가 싹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바빴던 건 희나뿐만이 아니었다.
강진현도 많이 바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진현은 지금도 몹시 바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얼굴 잠깐 보기도 힘들 정도네.’
대충 언질을 받은 바로는, 정부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상은 기밀이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러면서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아 갈 즈음이었다.
인사팀장 강목현으로부터 내선 전화가 걸려왔다.
- 잠시 인사팀 사무실로 내려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번거롭겠지만, 부탁합니다.
“그럼요. 오늘은 마침 할 일이 똑 떨어졌던 참이에요.”
말을 꺼내자마자 희나는 ‘일이 없어서 농땡이 피울 예정이었다’는 소리를 이렇게 당당하게 해도 됐던가, 후회했다.
- 잘됐습니다. 그럼 언제든 시간 되실 때 내려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강목현은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휴. 나도 간덩이가 많이 부었지.’
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팀장 강목현이 희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시원한 음료수 한 병도 밀어 주기에 냉큼 따서 꼴깍꼴깍 마셨다.
한없는 을에 불과했던 이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호쾌한 모습이었다.
막대한 재산과 안정된 직장이 주는 뽕이란 이렇게 대단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희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하루를 빈틈없이 살아가는 강목현에게는 시간이 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일은 아니고, 사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사팀장님이 사적으로 부탁하실 일이 있다고요?”
희나는 입을 작게 벌렸다. 바늘 한 개도 안 들어가게 생긴 강목현 인사팀장이 자신에게 ‘사적인 부탁’을 한다니.
강목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렇게 이희나 팀장을 따로 부른 까닭도 개인적인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들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아, 어쩐지 회의실로 데리고 오더라. 여기가 방음이 철저하다고 했지.’
희나는 코끝을 긁적였다.
“어…….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당연히 해 드리겠지만, 일단 어떤 일인지 들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천하의 강목현 인사팀장이 이렇게 따로 불러 청할 정도의 일이라…….
희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인사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강목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돌아오는 음력 7월 7일이 진현이 생일입니다. 생일 밥 좀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 * *
“끄응.”
희나는 침음을 내뱉었다. 정확히 스물세 번째 내뱉는 소리였다.
참다못한 희원이 먹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 한마디 했다.
“이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째 밥상머리 앞에서 표정이 안 좋다? 아까부터 계속 한숨이잖아.”
「근심 / 사람수」
오색이도 근심은 나눌수록 줄어든다며 강조했다.
거실 한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던 바둑이까지 챱챱챱 다가와 식탁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식구들이 이렇게 열렬히 관심을 가지니, 희나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음력 7월 7일이 진현 씨 생일이래.”
“정말? 잠시만…… 날짜 좀 따져 보자……. 에잉, 며칠 안 남았네?”
정확히 이틀 남았다.
“생일 선물을 뭐로 해 줄지가 영 고민스러워서.”
희원이 별걸 다 고민한다는 듯 대꾸했다.
“진현이는 네 밥 좋아하잖아. 생일상 차려 주면 되겠지.”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선점됐어. 진현 씨 형님 되시는 분이 따로 부탁하셨거든.”
“저런.”
강목현이 희나를 따로 불러낸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각성한 이후, 제대로 된 생일 밥을 먹어 본 적 없다면서 희나에게 식사를 부탁했다.
강목현은 그 정도는 그냥 당연히 해 줄 수 있다는 희나의 제안을 극구 거절했다.
‘아닙니다. 동생을 위한 선물입니다.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온전히 동생을 위한 부탁이라는 뜻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저도 진현 씨한테 선물드릴 겸 밥해 주는 걸로 대충 퉁 치고 싶어요!’라고 은근슬쩍 올라탈 수가 없었다.
희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강 팀장님의 마음을 담은 선물이니까, 이건 내가 뺏으면 안 될 것 같아.”
심지어 강목현은 무슨 음식을 해 주면 좋겠는지까지 리스트 업해 왔다.
예전, 강진현이 각성하기 전에 생일마다 먹었다던 음식도 끼어 있었다.
“덕분에 메뉴 선정 고민은 줄었지, 뭐.”
아마 강진현 생일상 메뉴까지 고민해야 했다면 제법 고역이었을 거다.
특별한 날이니, 특별한 메뉴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일 테니까.
“같이 사는 식구 생일도 눈치 못 채고 있었다니……. 으으.”
“진현이가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겠어?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인 거지.”
희원의 위로 아닌 위로에 희나는 또다시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오늘 퇴근길에 보았던 무엇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냐. 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우리만 몰랐던 것일 수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회사 옆 건물 위에 큰 광고판 하나 있잖아.”
“……그런 게 있었던가?”
“거기에 진현 씨 생일 축하 광고가 떠 있더라고. 진현 씨 팬클럽에서 띄운 거래.”
청룡 길드에서 실거주지로 되어 있는 아파트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
희나는 운동 삼아 그 길을 매일 걸어 출퇴근했다.
‘쉬는 날 빼고 매일! 어제도 출근했고, 그제도 출근했는데!’
그런데 강진현 생일 광고를 오늘에서야 발견했다는 게 말이 되나!
물어보니까 생일 축하 광고를 띄운 지는 한 일주일 정도 지났다고 했다.
“……그걸 오늘 발견했어. 다 알고 있었나 봐. 우리는 같이 살고 있는데도 몰랐고!”
희나는 어쩐지 억울한 마음에 투덜거렸다.
한편, 희원은 다른 의미에서 질겁했다.
“헉. 그런 건 아이돌이나 하는 것 아닌가?”
“뭐…… 유명하고, 잘생겼고. 아이돌 비슷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강한 데다 유명하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팬클럽이 없는 게 이상했다.
“아무튼, 그거 보니까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 있지.”
희나는 입술을 내밀었다.
“생일날 광고까지 뜰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에게 뭘 해 줘야 마음에 들까, 싶더라.”
물론 강진현은 희나가 뭘 해 주든 ‘희나 씨가 주시는 선물은 뭐든 소중합니다.’라고 말할 게 뻔했다.
‘마음씨가 원체 좋은 사람이니까……. 뭐든 좋다고 해 주겠지.’
하지만 선물을 주는 입장에서는 상대에게 좀 더 의미 있는 걸 주고 싶은 게 사실.
“뭘 줘야 진현 씨가 진짜 좋아할까……? 진짜 쓸 만한 걸 주고 싶은데.”
덕분에 밥상머리에 앉아서까지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게 됐다.
그 모습을 희원이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 내 생일은 그냥 지나쳤다?”
희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지나치기는. 생일 때 오빠가 집에 없어서 건너뛴 거지.”
참고로 희원의 생일은 4월 5일로, 던전 광산 노예로 잡혀 있을 때 지나가 버린 탓에 챙기지 못했다.
이에 희원은 제법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그건 그거고…… 넌 내 생일 때 그거의 반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고민해 본 적 있긴 해?”
“그런 시간 낭비를 왜 해?”
“…….”
단호한 대답에 희원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친혈육의 반응 따위는 희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어휴,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뭘 어떻게 한담? 좋은 생각 좀 떠오르면 좋겠는데.”
그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뿐.
* * *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방 안을 뒤적거리던 와중, 익숙한 천 조각 몇 장을 발견했다.
“앗, 이건?”
로브의 천 자락이었다.
“은신의 로브…….”
몇 개월 전…… 그러니까 희나와 강진현이 처음으로 던전에 같이 떨어졌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 몸에 비해 옷이 너무 길다고 말하니까 진현 씨가 그대로 북북 찢어 내 버렸지.’
비싼 아이템을 찢은 게 아까워 찢어 낸 옷자락을 허둥지둥 챙겨 왔는데, 그게 여기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진현 씨는 참 친절했었어.’
희나는 몇 개월 사이 추억이 되어 버린 기억을 더듬으며 옷자락을 매만졌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눈앞에 상태 창 하나가 뿅 하고 떴다.
<천 조각(B): 뛰어난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천 조각. 특별한 손길과 깊은 정성, 간절함이 닿는다면 원하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을지도?>
“오?”
한 번도 찢어진 천 조각을 눈여겨볼 생각을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것 또한 시스템 설명 창이 뜨는 던전 부산물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하네. 로브도 아이템이니까, 자른 조각도 아이템이겠지.’
희나는 B급의 천 조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강진현에게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