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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34화 (13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34화

    희나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시스템이 무언가 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특히 지난번 퀘스트로 확신하게 됐다.

    ‘뭔가 시스템이 우리에게 직접 설명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일을 꼬아 가는 거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은 알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마침내 희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어휴. 어렵네요. 아무쪼록 원덕삼 아저씨랑 최 감정사님이 무언가 좋은 정보를 찾아 주시기를 바랄 수밖에요.”

    * * *

    “당연히 감정해 줄 수 있고말고! 너라면 공짜라도 가능하다!”

    S급 감정사 최상훈은 희나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희나는 두 손을 맞잡고 구구절절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해요.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 거라 번거롭게 여기실까 봐 신경 쓰였는데, 이렇게 받아 주셔서…….”

    한없이 이어지는 인사치레에 최상훈은 마침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고맙다는 얘기는 그만 들어도 되고…… 감정은 얼마든지 해 줄 테니까 이것부터 마저 먹게 해 주면 안 되겠냐?”

    감사 인사를 듣느라 식탁 위에 소담히 차려진 후식을 먹지를 못하니 죽을 맛이었던 탓이다.

    그랬다. 지금 이곳은 청룡 길드에 있는 희나의 주방이었고, 그는 희나에게 점심을 대접받는 중이었다.

    “아! 드세요, 드세요. 얘기는 드시면서 들으시면 돼요.”

    희나는 후식 접시를 최상훈 앞에 밀어 놓았다.

    땅콩으로 만든 강정과 색색의 양갱, 곶감 호두 말이 등이 나무 접시에 예쁘장하게 담겨 있었다.

    물론 희원이 재배한 특수 작물로 만든 음식은 아니었다.

    땅콩강정은 희원의 특수 땅콩 개발을 위해 일반 작물로 미리 만들어 본 시제품이었다.

    또한 양갱은 그동안 자주 만들다 보니 자신이 생겨서 내놓은 것이고, 곶감 호두 말이는 전통 간식 느낌을 내려고 추가한 것이었다.

    “와, 희나야. 이 양갱, 맛이 아주 기똥차구나.”

    최상훈이 눈을 빛내며 후식을 집어 먹었다.

    강진현은 그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슬픈 눈동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도 마음껏 먹고 싶다.’

    하지만 여기는 최상훈을 위한 식사 자리였으니, 강진현은 식탁 위로 향하는 손을 꾹 참아 내야 했다.

    최상훈 감정사는 후식을 8할 정도 비우고 나서야 체면을 차렸다.

    “큼흠, 흠……. 그래, 희나야. 그래서 어떤 감정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지?”

    “아, 그게요…….”

    희나와 강진현은 최상훈 감정사가 식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은근슬쩍 감정 허락을 날치기로 받아 두었다.

    참고로 이건 희나의 미식계에 당해 본 강진현이 내놓은 계책이었다.

    ‘희나 씨가 정성 들여 해 주시는 밥입니다. 그 어떤 것도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래도 S급 감정산데, 좀 더 대단한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전혀 필요 없습니다.’

    강진현의 호언장담은 맞아떨어졌다.

    최상훈이 희나가 차려 준 점심상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것이다.

    희나는 그런 최상훈을 앞에 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우선 마석에 대고 맹세부터 해 주실 수 있으세요? 감정품에 대해 다른 곳에 말하지 않으시겠다고요.”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기에 맹세까지 시키려는 거냐? 나 입 무거워. 이봐, 강 헌터. 내 신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얘기 좀 해 줘 봐.”

    배부른 최상훈은 아주 마음이 넓었다. 크하하 웃으며 식탁 위를 쾅쾅 쳤다.

    커다란 손이 식탁을 때릴 때마다 바닥이 울리며 그릇이 덜그럭거렸다.

    “상훈 아저씨가 얼마나 입 무거운 사람인지는 진현 씨한테 이미 많이 들었어요.”

    최상훈은 어쩐지 떨떠름한 기색으로 희나와 강진현을 번갈아 보았다.

    “어어. 그래……? 너희, 대화가 참 많은가 보구나…….”

    시선에 무언가 의문이 어린 듯 보였으나, 공간의 씨앗 때문에 마음이 급한 희나는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게 저한테는 꽤 중요한 일이라서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마석 얘기를 꺼내게 된 거예요. 절대로 상훈 아저씨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요.”

    대신 열심히 해명을 했다.

    “뭐, 그렇게 쩔쩔맬 필요는 없다. 마석에다 대고 맹세하마.”

    “고맙습니다!”

    최상훈은 강진현이 꺼낸 상등급 마석에 감정품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자. 이제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꺼내 봐라. 천하의 이희나 팀장이 식사까지 친히 차려 주면서 뭘 보여 주려나, 궁금해서 밥이 안 넘어갔지 뭐냐?”

    궁금해서 밥이 안 넘어갔다는 사람이라기엔 고봉밥 다섯 그릇을 내리 해치우긴 했지만…… 그 사실은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여기요. 이 씨앗 좀 살펴 주세요.”

    희나는 인벤토리에서 공간의 씨앗을 꺼내 건넸다.

    최상훈의 눈이 흥미로 가득 찼다.

    “오, 이건 처음 보는 건데.”

    그는 씨앗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럼 어디 볼까?”

    스킬을 쓰는 듯, 씨앗을 살피는 최상훈의 눈동자에 금빛 테두리가 비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희나의 눈도 덩달아 반짝반짝 빛났다.

    ‘어떤 힌트를 얻어 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도 잠시.

    “대체 이거 정체가 뭐냐? 기본 설명만 뜨고 추가 정보값이 제대로 안 뜨는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고등급의 감정품도 아니고, 고작 등급 미정급 물건에 내 스킬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최상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긴, 보통 물건이었으면 내게 가져왔을 리가 없지.”

    그의 혼잣말에 희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상훈 아저씨 능력으로도 안 되는 거예요?”

    “안 될 리가!”

    최상훈이 큰소리쳤다.

    “대신 시간이 좀 필요해. 이런 경우에는 도구를 사용해서 꼼꼼히 살펴봐야 하거든.”

    그러면서 본격적인 감정 일정이 좀 밀려 있는 탓에 결과를 보려면 빠르면 몇 주, 늦으면 몇 달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희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급한 일은 아니니 좀 늦는 건 괜찮아요. 무엇보다 이건 사적으로 부탁드리는 거니까요.”

    이렇게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해 갈 때 즈음이었다.

    희나와 강진현을 스리슬쩍 살피는 듯하더니, 최상훈이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그런데 너희, 혹시 태릉에 있는 토끼 던전 다녀왔냐?”

    “예?”

    희나는 화들짝 놀랐다.

    S급 감정사쯤 되면 점쟁이 스킬이라도 얻게 되는 걸까?

    강진현 또한 최상훈이 그걸 짚어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혹한 기색이었다.

    “하하! 표정 보니까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최상훈이 낄낄거리며 공간의 씨앗을 만지작거렸다.

    “요놈만 봐도 내 눈엔 다 보인다고. 그러니까 너희들도 내 나이쯤 되면 젊은 남녀 간 사정 정도는 훤히 꿰뚫게 된다, 이 말이야.”

    “예?”

    이번엔 왜 또 뜬금없는 남녀 간의 사정을 거론한단 말인가?

    희나와 강진현은 급작스레 도약한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머리를 굴 밖에 내놓은 한 쌍의 미어캣 같았다.

    최상훈은 결국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모른 척해도 다 아는 방법이 있단다!”

    ……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가 궁금했다.

    희나의 표정을 읽은 최상훈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 씨앗에 태릉 토끼 던전 정보 뜬 거, 다 봤다.”

    “헉. 좌표값만 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나쯤 되면 그 정도 정보는 지도로 보기 좋게 나타나거든.”

    역시 S급 감정사는 S급 감정사였다.

    희나와 희원, 강진현의 눈에는 고작 숫자의 나열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곧장 지도의 한 지점으로 표시되어 보인다니…….

    최상훈은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씨앗에 특정 던전 좌표가 붙어 있다는 건, 어쨌든 그곳과 연관이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그렇다는 건 이 씨앗을 그 던전에 갔다가 주웠을 확률이 가장 높지 않겠냐? 으하하! 그렇지? 너희, 이번에 휴가 내고 거기 다녀왔지?”

    최상훈의 추론은 잘 나가다가 삐끗, 엇나갔다.

    ‘엥?’

    공간의 씨앗은 주운 것이 맞긴 했지만, 그 토끼 던전에서 주운 건 아니었다.

    ‘나는 던전에 못 들어가는 일반인에 가까운데, 상훈 아저씨는 왜 이걸 주워 왔다고 확신하시지? 그리고 왜 유난히 신나 보이는 거야?’

    의문에 희나는 콧잔등에 주름을 세웠다.

    “으음.”

    “태릉 토끼 던전은 뭐, 알다시피 아주 유명한 곳 아니냐?”

    “초보 헌터 수련장으로 많이 쓴다고…….”

    강진현이 희나를 위해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상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희나와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설마, 희나야. 너 모르고 들어간 거냐? 태릉 토끼 던전은 헌터들 사이에서 유명한 데이ㅌ…… 어이쿠!”

    그는 신나게 설명을 시작하려다 무엇인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앉은 채로 펄쩍 뛰어올랐다.

    최상훈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한참 동안 엉덩이를 싹싹 문질거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강 헌터! 아무리 수줍다고 해도 사람을 이렇게 찌르는 건……”

    강진현은 시치미를 뚝 뗐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검은 기운을 날카롭게 갈무리해 최상훈의 왼쪽 엉덩이를 쿡 찌른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한 태연함이었다.

    “뭐예요, 방금 무슨 일 있었어요?”

    이 일련의 사건 모두는 순식간에 벌어졌으므로, 가운데에 낀 희나만 어리둥절한 상황이 됐다.

    상황은 희나가 사태를 눈치채기 전에 마무리됐다.

    “알았다고, 알았어, 강 헌터. 얘기 안 할 테니까 눈 좀 그만 부라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평소처럼 눈 뜨고 있습니다.”

    “에잉, 요놈 이거 아주 낯짝 두께가 S급이네.”

    그러면서 최상훈은 ‘요즘 놈들은 패기가 없다’며, 자기 때는 무엇인가를 ‘당당하게 쟁취했다’라고 한참을 시부렁거렸다.

    “아무튼, 태릉 토끼 던전은 일정 급수 이상의 헌터증만 제시하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주워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소리다. 강 헌터는 S급이니 동반인 정도야 그냥 들여보내 줬겠지.”

    “아…….”

    들어 보니 다행히 이 토끼 던전은 쉽게 오갈 수 있는 장소인 듯했다.

    ‘그래서 상훈 아저씨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구나.’

    조금 엇나가서 짚긴 했지만, 그 정도면 고마운 오해였다.

    희나의 상황을 캐려고 하는 것처럼 곤란한 일은 없었다.

    ……적어도 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거운 일에는 한없이 무거운 최상훈의 입이 가벼운 소문에는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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