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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32화 (13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32화

    희나는 넓은 어깨 너머를 힐끔거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라면, 맛있겠다.’

    이상하게 해 진 후에 먹는 라면은 특히나 별미처럼 느껴졌다.

    ‘왜지? 야식으로 먹는 라면은 왜 늘 맛있는 거지?’

    심오한 라면 철학에 빠져 있던 희나를 깨운 건 강진현이었다.

    “면은 반 쪼개서 넣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넣을까요?”

    자연스러운 물음에 희나는 얼떨결에 답했다.

    “아, 저는 그대로 넣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는 작은 냄비에 면을 넣었다. 그 후에 젓가락으로 면을 풀어 젓는 스냅이 제법 프로페셔널했다.

    ‘맛있는 냄새.’

    끓는 물에 스프까지 넣으니 매콤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희나는 식탁에 턱받침을 한 채 라면을 끓이는 S급 헌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해도 되는데…….’

    몇 분 전, 강진현은 꼬르륵 소리를 듣고 자기가 직접 라면을 끓여 주겠다고 자원했다.

    ‘물론 희나 씨가 직접 끓인 것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조리법 그대로 지켜 끓이면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은 날 겁니다.’

    그러면서 매번 자기가 얻어먹기만 하니, 한 번쯤은 식사를 대접해 주고 싶다는 게 아닌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어?’

    결국 희나는 강진현에게 라면 끓이기 미션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 됐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라면이 다 익었나 보다.

    강진현이 팔팔 끓는 라면을 희나 앞에 대령했다.

    “잠시…….”

    그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수저를 놓고, 김치를 꺼냈다. 시원한 보리차도 한 잔 꼴꼴 따라 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드십시오.”

    “와…….”

    희나는 작게 감탄했다.

    사실 강진현이 끓인 라면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칠칠맞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였으니, 음식을 해 봐야 얼마나 잘하겠냐는 생각이 있을 수밖에.

    ‘……그런데 생각보다 더 그럴싸하게 끓여 왔잖아?’

    눈으로 척 보기에도 합격이었다. 물 양은 완벽했고, 면은 꼬들꼬들했다.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희나는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호로록.

    라면 한 젓가락을 그대로 흡입하자마자 희나는 눈이 커다래졌다.

    “음!”

    조리 방법을 철저히 지켜 조리한 라면 면발은 아주 탱글탱글했다.

    단숨에 면을 삼키고, 이번에는 푹 익은 김치를 라면에 한 점 얹어 입안에 넣었다.

    ‘이 맛이지! 역시 라면은 김치 맛으로 먹지!’

    아작아작한 김치가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 주면서 진한 라면 국물과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뤘다.

    희나는 냠냠, 열심히 라면을 먹어 치웠다.

    심지어 앞자리에 강진현이 앉아 있다는 사실마저 잠시 잊었을 정도였다.

    “너무 잘 먹었다!”

    냄비째로 들어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호로록 삼키고 나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벌써 다 먹어 버렸네…….”

    찬밥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말아먹을 수 있었을걸.

    그렇게 아쉬워하며 뒤늦게 숟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진현이었다.

    그제야 희나는 그가 자기 앞에 앉아 식사하는 장면을 모조리 지켜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앗.”

    어지간히 허겁지겁 먹었어야지. 희나의 얼굴이 또다시 새빨갛게 변했다.

    민망함에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보리차를 찰랑찰랑 담은 컵이 앞으로 주욱 밀려왔다.

    “입이 짤 텐데, 한 모금 하십시오.”

    “네에.”

    희나는 커다란 머그잔을 붙잡고 보리차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냄비와 마찬가지로 머그잔 또한 깨끗하게 비웠다.

    탁.

    희나는 머그잔을 내려놓고는 휴, 하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진현 씨 있는데 한마디도 없이 먹기만 했네요. 정말 맛있어서 그랬어요.”

    “……그렇습니까?”

    거나한 칭찬에 강진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로 기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럼요. 제가 먹은 라면 중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아무래도 일이 일이고 각성자 클래스가 클래스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렇게 음식을 대접받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게 비록 라면일지라도, 정성이 잔뜩 느껴졌다.

    희나는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라면 조리법을 읽고, 타이머를 맞추던 강진현을 떠올렸다.

    가슴 한구석이 날아갈 듯 즐거워져서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진현 씨 손재주 좋네요. 사실 이런 거 잘 못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연달아 날아오는 칭찬에 강진현이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것도 다 희나 씨 덕분입니다. 희나 씨 아니었다면 이렇게 섬세하게 힘 조절도 못 했을 테고…….”

    중얼중얼 부연 설명이 길었다.

    하지만 은근히 붉어진 귓바퀴가 보여서일까? 희나에겐 그의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못 하는 게 없는 천하의 S급 헌터가, 고작 라면 끓이는 일에 칭찬을 받았다고 쑥스러워하다니.

    “그래도 정말 고마워요. 남이 해 준 밥은 정말 오래간만이라서, 더 좋았어요.”

    “……고맙습니다.”

    그 덕분에 받게 된 혜택이 얼마나 많은데, 강진현은 언제나 희나에게 고마워했다.

    무엇이라도 하나 더 해 주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배를 든든하게 채워서 그런지, 한새벽인데도 힘이 부쩍 났다.

    둘은 빈 냄비를 가운데에 두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잊은 채 동이 틀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 * *

    “희나야, 희나야! 좀 일어나 봐!”

    희나는 베개에 머리를 푹 박고 이불에 몸을 휘감았다.

    “음냐…….”

    간밤에 강진현과 수다를 떠느라 너무 늦게 잤다. 매일 보는 사이인데, 뭐 그리 잡다하게 얘기할 게 많은가 싶었다.

    과묵한 첫인상은 퇴색한 지 오래다.

    ‘S급이라는 강인한 이미지에다가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그래 보일 뿐이지 사실은 되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지.’

    그는 알아 갈수록 진국인 사람이었다.

    희나는 반쯤 잠든 상태로 히죽 웃었다.

    ‘히…….’

    그 모습에 희나를 깨우던 희원이 기겁하며 남매다운 직언을 날렸다.

    “야, 불길하니까 그렇게 그만 웃어라.”

    희나도 역시 친혈육답게 오빠의 직언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투정했다.

    “으으, 졸리니까 깨우지 마. 나 어제 늦게 잤단 말이야…….”

    “미안한데 그래도 너 지금 일어나 봐야 해. 집 상태가 이상해! 내 상태도 좀 해결해야 하고!”

    “……뭐? 집이?”

    ‘집’ 이야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희나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건 참아도 ‘내 집’에 이상이 생겼단 얘기와 밥 굶었단 얘기는 못 참는다는 뜻이었다.

    “뭔데? 또 벌레라도 나타났어?”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희나는 희원의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꼴은 또 왜 그래?”

    “머리 감는 중인데! 단수됐어!”

    희원이 거품 가득한 머리를 쥐어뜯었다. 몹시 급박해 보였다.

    “탈모 샴푸 개시했는데! 하자마자 단수냐!”

    ……시스템에게 당한 대머리 협박이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듯했다. 그사이 탈모 샴푸까지 구입하다니.

    “아무튼, 오빠 탈모는 알 바 아니고. 단수는 갑자기 무슨 말이야?”

    눈을 비비며 묻자 희원이 무릎 위에 오색이를 얹었다.

    「으;」

    샴푸가 남아 있는 손길에 오색이는 질색하며 더듬이로 거품을 닦아 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주택 관리자님이랑 마저 나눠 봐. 집주인이 있어야 해결 가능하다고, 입을 안 열어.”

    「주택의 일은 집주인이 책임져야 하는 법.」

    “……이렇대.”

    희나는 방금 일어나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이놈의 집은 어째 제대로 굴러가는 달이 없냐?’

    자가 관리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단수 문제는 급한 대로 강진현이 준 마석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서비스 복구해 줘!”

    꽤 질 좋은 마석을 바쳤는데도, 넉 달어치밖에 안 됐다.

    시스템은 오늘도 즐겁게 약을 올렸다.

    ‘어째 갈수록 얄미워지는 것 같단 말이야.’

    희나는 이를 아드득 갈며 오늘도 시스템에 대한 앙심을 쌓았다.

    희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전기 때문에 마석이 계속 필요한 상황인데, 수도까지 마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말이지?”

    오색이가 안테나를 세 번 까딱까딱했다.

    「긍정. 긍정. 긍정.」

    “아이고.”

    대화를 지켜보던 강진현이 나섰다.

    “마석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제게 충분히 있으니까요.”

    희나는 강진현의 얼굴을 힐끔 바라봤다.

    그 또한 거의 잠을 자지 못했을 게 분명한데, 피로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되레 얼굴에서 반들반들 빛이 났다.

    ‘어째 평소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아…….’

    희나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헛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했다.

    희나는 한숨과 함께 팔짱을 꼈다.

    “으음. 집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처리하다 보면 언젠간 한계가 올 것 같아요.”

    마석은 만능이 아니었다. 유예 기간을 벌어 주는 역할만 했다.

    ‘즉, 집을 유지하기 위해선 마석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줘야 한다는 뜻인데.’

    앞서 언급했듯 지금 ‘홈 스위트 홈’의 전기도 강진현이 제공한 상급 마석을 바쳐 돌아가고 있는 판이었다.

    여기에 단수 문제에, 차후에 생길 이슈까지 감안한다면 ‘홈 스위트 홈’ 유지에 필요한 마석은 점점 늘어 갈 게 분명했다.

    “전기까지는 진현 씨가 어떻게 도와준다고 쳐요. 하지만 마석을 무한정 소비할 수는 없어요.”

    “아닙니다. 제가 충분히 공급할 수 있습니……”

    “아니에요, 진현 씨. 언젠가는 분명히 한계가 찾아올 거예요. 그리고 그때마다 의존할 수만도 없어요.”

    희나는 답지 않게 강진현의 말을 딱 끊고 단언했다.

    이런 식으로 매번 문제가 생기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느끼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에 오색이가 동그란 머리통을 파르르 떨었다.

    「혼자 남기는 싫음!」

    「( ˃̣̣̥᷄⌓˂̣̣̥᷅ )」

    오색이가 느끼는 강한 슬픔에 서서히 집 안 습도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안 돼! 막아야 해!’

    오색이가 울면 집에 비가 왔다.

    불길함을 감지한 희나와 희원은 앞다투어 나서서 오색이를 달랬다.

    “아니! 오색아! 널 혼자 남겨 둔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왜 오색이 널 두고 가? 넌 우리 가족이야, 가족! 뚝! 눈물 뚝!”

    「따흐윽. 떼흐윽.」

    오색이는 간신히 텍스트 눈물을 그쳤다. 촉촉해졌던 공기가 다시 가벼워졌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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