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20화
희나와 희원, 강진현은 참외 여섯 개를 깎아 먹고 나서야 배를 두드렸다.
“요즘 참외가 제철이야.”
“다음에는 수박 사 와야겠다. 진현 씨 한동안 바쁜 일 없죠? 반 통은 썰어 먹고, 반 통은 화채 해서 먹어요. 우리.”
“좋습니다. 수박화채,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셋은 도란도란 서로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문득 희나가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오빤 과일나무 같은 거 심을 생각은 없어?”
“글쎄. 묘목 들여오는 게 복잡해서 나중으로 미뤄 두고 있어. 과일나무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치?”
그 설명에 강진현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묘목은 부피가 크니 집 안을 통해서 옮기기엔 번거롭겠군요.”
“차라리 씨를 뿌려서 키우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해.”
태평한 계획이었다.
“씨 뿌려서 언제 나무 키우고, 또 언제 열매 따 먹게?”
“바둑이가 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희원이 바둑이의 매끈한 잎사귀를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왜, 있잖아. 바둑이가 뿌리는 금가루를 맞으면 식물 성장이 빨라지거든. 그러니까…… 혹시 알아? 나무도 키울 수 있을지.”
-벌떡!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서 뒹굴던 바둑이가 호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둑아? 참외 더 먹고 싶어?”
질문에 바둑이는 휙휙 꽃봉오리를 가로저었다.
탁탁탁, 챱챱!
그리고 뿌리로 방바닥을 탁탁 치며 잎사귀로 현관문을 가리켰다.
“산책 나가고 싶다는 뜻이야?”
희원이 눈치 좋게 물어 오자 바둑이가 반가운 기색으로 잎사귀를 짝짝 맞부딪쳤다. 정답이었던 듯하다.
“이제 곧 해 질 시간이라 던전 산책은 위험한데…….”
챱챱! 챠잡! 챱!
희나는 망설였고, 바둑이는 계속 고집을 피웠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정신없이 굴었다.
결국 보다 못한 강진현이 상황 중재에 나섰다.
“안전 구역인 앞마당 정도만 나갔다 돌아오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저도 따라가면 되고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고민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요. 후식도 먹었는데 잠깐 바람 쐬고 오는 셈 치죠.”
희나의 허락에 오색이는 바둑이를 향해 고물고물 기어갔다. 그리고 축하한다는 듯 안테나 두 개를 짝짝 마주쳤다.
「(경) 극적 의견 타결! (축)」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맑은 던전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이찼다.
이때다 싶었는지 바둑이는 쏜살같이 튀어 나가 앞마당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희원이 가꾸어 놓은 밭들을 이리저리 헤치며 다니는 모습이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힘 넘치네.”
희원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오색이도 비슷한 감상을 받은 듯했다.
「젊음은 좋은 것이여~」
한편, 뛰어다니던 바둑이는 어느 한 지점에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줄기를 부르르 털었다.
“어?”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둑이의 전신에서 반짝거리는 금빛 가루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평소 바둑이가 뿜어내던 빛가루보다 훨씬 색이 짙고 환했다.
금색 빛무리는 바둑이의 줄기와 꽃봉오리를 한 번 감싸 안는 듯하다, 한 줄기의 광선이 되었다.
그리고 바둑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어느 위치를 환히 비추었다.
“저게 뭐지?”
이것이 무언가 싶어 성큼 다가가려는데 어깨를 붙잡혔다. 시선을 힐끗 올려다보니 강진현의 단단한 턱선이 보였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멀리서 지켜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는 경계하듯 바둑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저도 바둑이를 믿고 있습니다만, 일단 던전에 관련한 일이니까요. 한 걸음 물러서서 관망합시다.”
“알았어요.”
바둑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강진현의 지적 또한 맞았다.
아무리 안전지대라 해도 이곳은 던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다.
‘거기다 바둑이는 약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희나는 바둑이를 믿었다.
행동이 철없어 보이는 게 문제일 뿐, 바둑이는 어지간한 하급 몬스터들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신체 능력이 상당했다.
한편, 바둑이의 금빛 광선을 받은 곳에서 짙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파아앗!
검고 푸른 기운은 한데 뭉쳐 마치 블랙홀 같은 검은 구멍을 만들어 냈다.
“어어?”
신비하다 못해 기괴하게까지 보이는 광경에 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희나를 붙잡고 있던 강진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게이트?”
그의 읊조림이 끝나자마자, 검푸른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꺅!”
희나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해충 박멸’ 스킬을 펼쳤다. 주먹이 움직이며 부웅!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한 방에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스윙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헛손질에 그쳤다.
사아아아…….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기운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홈 스위트 홈 앞마당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다들 얼떨떨하게 주위를 살폈다.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챈 건 시력 좋은 강진현이었다.
“저건 뭐지? ……나무인가?”
“나무요?”
“저기, 바둑이 앞에 무언가가 생겼습니다.”
속닥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바둑이가 평소와 별 다름없이 펄쩍펄쩍 달려왔다.
이파리를 나풀거리며 희나와 희원, 강진현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바둑아! 너 방금 뭘 한 거야?”
자칭 ‘바둑이 아빠’인 희원이 바둑이를 다그쳤다.
그제야 바둑이는 뜀박질을 멈추고 세 사람을 이파리 덩굴로 잡아끌었다.
“바둑이가 뭔가 보여 주고 싶어 하는데, 가 볼까요?”
「고고싱! 뛰뛰빵빵!」
오색이까지 안테나를 까딱거리며 희나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에 강진현은 잠시 고민하다 순순히 힘을 풀고 바둑이를 따라갔다.
“특별한 이상이 느껴지진 않으니…… 좋습니다. 살펴만 보는 겁니다.”
세 사람과 달팽이 하나는 방금까지 바둑이가 빛을 뿜어내던 자리에 서서 머리를 모았다.
“이거, 정말 나무네요.”
“그러게. 나무네.”
“하지만 나무치고는 조금 작아 보입니다.”
「조금 ㄴㄴ. 많이 작음.」
검푸른 기운이 뭉쳐 검은 구멍이 있었던 장소엔 1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둑이는 작은 나무 옆에 서서 줄기를 빳빳이 세웠다.
아주 자랑스러운 듯한 몸짓이었다.
나무와 바둑이를 번갈아 가며 보던 희원이 아, 하고 손끝을 튀겼다.
“설마…… 아까 바둑이의 도움을 받으면 과일나무도 쑥쑥 키울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한 것 때문에 그런 거야? 네 힘을 쓰면 나무까지 자라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짝짝짝짝!
바둑이는 잎사귀로 손뼉을 치며 커다란 꽃봉오리를 붕붕 흔들었다. 격렬한 긍정이었다.
“이야, 정말 대단한데! 풀만 쑥쑥 자라게 하는 줄 알았는데, 나무까지 키워 낼 줄이야!”
희원이 과장한 목소리로 바둑이를 칭찬해 주었다.
「능력 제법! 한층 성장한 모습! 참 잘했어요♠」
오색이도 칭찬을 거들었다.
그러자 바둑이의 뿌리가 탭 댄스 추듯 흥겹게 움직였다. 칭찬은 바둑이도 춤추게 했다.
그사이, 희나는 허리를 숙여 나무를 살폈다.
“신기하게 생겼네.”
나무는 덜 자란 게 아니라 보통 나무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것처럼 작았다. 마치 모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빠, 그럼 이건 무슨 나무야? 여기에 뭐 심어 놨는지 기억나?”
묻자, 희원이 나무 밑동에 나동그라져 있는 팻말 하나를 찾아내 보여 주었다.
<알 수 없는 씨앗>
“이거, 그거네. ‘공간의 조각’ 사용하고 나온 알 수 없는 씨앗.”
“죽은 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희원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니! 몇 주 전에 시금치 캘 때 얘기했잖아. 싹 텄다고.”
“으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당시는 시금치 이야기에 흥분해서 그 주제를 완전히 뒷전에 놓아 버렸다.
떠올려 보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신기하지? 몇 달 만에 겨우 싹 틔운 걸 바둑이가 이렇게 크게 키워 냈네! 바둑이 가루 효과가 여간 좋은 게 아닌가 봐. 역시 능력 있어, 내 새끼.”
희원이 바둑이를 잔뜩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워했다.
한편, 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둑이가 키워 낸 나무를 살폈다.
“몇 달 동안이나 싹을 틔우지 않았다고? 그 정도면 심은 씨앗은 썩어서 사라지고 같은 자리에 잡초가 자란 게 아닐까? 바둑이가 키워 낸 건 그 잡초인 거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하지만 희원은 꽤 자신 있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냐. 새로 난 싹의 상태 설명 창에 ‘□□□ 새싹’이라고 떴거든. 먼젓번에 심은 이름 모를 씨앗이 싹을 틔운 거라고 설명도 쓰여 있었어.”
희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뭐? 그렇게 중요한 말을 왜 빼먹었어? 다음에라도 얘기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희원이 허허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완전 깜빡했어. 알잖아, 시금치 때문에 나도 정신없었던 거.”
결국 희나는 속 좋게 웃는 오빠를 흘기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참 나……. 바둑이가 이렇게 안 키워 놨으면 평생 까먹고 말 안 해 줬겠네.”
“그럴 수도?”
희원은 너스레 떨며 그때 미처 못 꺼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희나와 강진현은 귀를 쫑긋 세우고 설명을 경청했다.
“아무튼, 여전히 이름은 완전히 쓰여 있지 않았는데 설명은 좀 더 자세해져 있었어.”
“뭐라고 되어 있었는데?”
“완전한 나무가 되려면 충분한 거름이 필요할 것이라고 써 있었어. 사실 나는 충분한 거름이라고 해서 예전보다 비료만 좀 더 주고 말았거든. 근데 지금 와서 보니 그 거름이 바둑이 가루였던 거구나 싶다.”
남매가 나무의 정체에 대해 속닥거리는 사이 강진현은 허리를 굽혀 나무를 관찰했다.
나무에 가까이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자 시스템 설명 창이 떴다.
<□□□ 나무(50%): □□□ □□, □□□ □□, □□□ □□, □□□…….>
설명 창은 어지러운 빈칸투성이였다.
강진현이 알아볼 수 있는 건 ‘나무’라는 단어와 그 뒤에 붙어 있는 ‘50%’라는 퍼센티지 숫자뿐이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없었기에 강진현은 시선을 빠르게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한 줄은 읽을 수 있는 문장이었다.
<*특정 클래스에게만 공개된 정보입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