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19화
사실 각성 전, 이전 회사에서 일할 때는 그보다 더한 성격 파탄자들도 겪어 보았다.
하지만 청룡 길드에서 지내며 어느새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희나가 가진 청룡 길드의 이미지와 영 동떨어진 성질머리를 가진 유한이를 만나니 더더욱 반발감이 들지 않겠는가!
‘심지어 나랑 동갑이잖아. 그래서 더 아니꼽게 느꼈을지도.’
희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흥, 하고 콧바람을 뿜어냈다. 그러면서 양갱을 등 뒤로 숨겼다.
“아무튼, 더 못 줘. 이건 다른 사람들 몫이야.”
유한이가 억울하게 발을 굴렀다.
“따지자면 나도 다른 사람인데!”
“정확히 말하면 ‘착하고 예의 바른’ 다른 사람들한테 주려고 만든 거거든.”
“이익!”
호리호리한 말라깽이라 해도 희나보다는 체격이 큰 편이라 양갱을 빼앗으려면 빼앗을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저도 자존심이 있는지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씨근덕거리는 게 제법 우스웠다.
“메롱.”
희나는 혀를 빼꼼 내밀었다. 내게 이렇게 유치한 면이 있었나, 스스로 깜짝 놀랄 만한 행동이었다.
“착하고 예쁘게 굴어야 뭐 하나라도 더 줄 맘이 들지! 보기 예쁜 사람한텐 자다가도 떡이 떨어진다는 말, 몰라?”
“난 그런 말 몰라! 그리고 내가 너한테 예쁘게 보여서 뭘 하냐? 엉?”
“글쎄. 나한테 예쁘게 보이면 양갱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야! 이희나!”
정말로 약이 올랐는지 유한이의 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양갱의 단맛을 잊지 못해 입맛을 짭짭 다시는 게 아주 웃겼다.
“아하하하!”
결국 희나는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희나의 웃음에 유한이가 억울한 낯을 했다.
“사람 가지고 노니까 기분이 좋냐? 엉?”
“응. 재미있네.”
“……방금 뭐라고 했어?”
“아하하.”
이번에는 정말로 달려들 기세라, 희나는 유쾌한 기분으로 등 뒤에 둔 양갱을 한 주먹 쥐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먹어.”
계속 안 된다고 튕기던 희나가 불쑥 양갱을 내밀자 유한이가 의심스레 눈알을 굴렸다.
“아, 안 준다며?”
“하여간, 줘도 못 먹는다니깐……. 나 웃겨 준 값이야.”
원래는 미운 놈에게 줄 양갱 따윈 없었지만, 약이 올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잔뜩 놀려 놓고 안 주는 것도 좀 그렇지?’
즐거운 웃음 속에서 넉넉한 인심이 피어올랐다.
희나의 웃음기 어린 낯을 보던 유한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후다닥 제 몫의 양갱을 챙겼다.
“줬다 뺏는 거 없기다?”
그리고 희나가 양갱을 다시 가져가기라도 할까, 입안에 와르르 욱여넣었다.
“……쩝, 보기보다 맛이, 괘안네.”
유한이는 입안의 것을 열심히 우물거렸다.
부드러운 간식이라 금방 삼킬 법도 한데 단맛이 사라져 가는 게 아까워 무른 앙금을 물이 될 때까지 씹고 또 씹었다.
유한이가 달콤한 양갱을 아껴 가며 씹어 삼키고 있을 때쯤, 익숙한 인영이 등장했다.
“희나 씨.”
요즈음 길드에서 ‘희나 뒤를 금붕어 똥처럼 따라다닌다’며 소문이 자자한 S급 헌터, 강진현이었다.
“……!”
지난번, 강진현의 기세에 호되게 당한 유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아! 진현 씨! 어서 오세요!”
반면, 희나는 금붕어 똥……, 아니, 강진현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이인데도, 출근 후 회사에서 만나는 건 여전히 반가웠다.
“그런데 지금 스케줄 있는 시간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취소됐습니다.”
“그래요? 중요한 미팅이라고 본 것 같은데.”
매월 초마다 한 달 치 계획표를 보고받는 터라, 희나는 강진현의 스케줄을 개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희나가 기억하는 바로…… 오늘 강진현의 일정은 꽤 빡빡했다. 아주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긴 했습니다만…… 회의실이 갑자기 부서지는 바람에 취소됐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희나는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어머! 회의실이 부서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부실 공산가?”
“뭐…… 예. 그런가 봅니다.”
“다친 사람들은 없고요? 진현 씨는 괜찮아요?”
강진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다들 고랭크 각성자들이라 딱히……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나저나 희나 씨 손에 든 건 뭡니까?”
그는 희나가 들고 있는 양갱에 큰 관심을 보였다. 희나는 몹시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이거요? 제가 어제 만들어 본 양갱이에요. 맛보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진현 씨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오셨네요.”
“양갱? 그런 것까지 만들 줄 아십니까? 대단하군요.”
“별로 안 어려워요. 쉬워요. 양갱은 이번에 시금치 개발 연구에 쓸모가 있을까 해서 미리 만들어 본 거예요.”
희나는 재잘거리며 강진현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예쁜 그릇에 양갱을 소담히 담아 귀여운 포크와 함께 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입이 너무 달아 질릴까 봐 시원한 우유도 한 잔 같이 따라 주었다.
유한이와는 천지차이인 대우였다.
“처음 만들어 본 건데 꽤 맛있게 됐어요. 진현 씨 입맛에도 맞으면 좋겠네요.”
강진현은 정갈하게 차려 나온 간식과 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희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표정을 읽은 강진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맛있게 드세요.”
한편, 배시시 웃으며 양갱을 권하는 희나의 모습에 유한이가 입속의 음식을 꿀떡 삼키곤 짜증을 부렸다.
“왜 먹을 거로 사람 차별해? 너무한 거 아냐? 누구한텐 적선하듯 넘겼으면서, 누구한텐 가져다 바치기야?”
하지만 희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강진현에게 사근사근 말을 붙였다.
“시끄러우시죠? 일하는 중이라 어쩔 수 없어요. 거기 앉아서 얌전히 계시면 조금 있다가 점심 차려 드릴게요. 양갱 더 먹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꺼내 드시고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마침내 유한이는 강진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고 빽 소리 지르고야 말았다.
“너무해! 강진현 있다고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8. 거울 나라의 살림꾼
시작에 잡음이 좀 일기는 했지만 유한이와의 공동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얼마만큼의 시금치 가루를 넣어야 효과가 최대로 발현하는지, 양갱을 어느 정도 먹어야 적당한지, 과잉 섭취 시 중독 증상은 나타나지 않는지 등등을 확인했다.
희나는 유한이가 지적했던 대로 정확한 계량과 조리법을 실행하기 위해 애썼다.
강진현도 자처해 나서서 둘을 도왔다.
도움이라고 해 봤자 희나가 만든 샘플을 하나씩 먹어 치우는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틈만 나면 희나의 사무실 겸 조리실에 들러 상황을 확인했다.
가끔 희나를 위해 커피를 사 오는 센스마저 발휘했다.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유한이가 자기 건 없냐며 신경질을 부리긴 했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절반은 넘게 바닥에 흘리고 왔을 텐데! 이젠 음료도 거의 안 흘리고…… 멀쩡한 상태로 가져왔어!’
장족의 발전이었다. 커피를 바닥에 잔뜩 양보하고 다녔던 몇 달 전 강진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이런저런 소란이 이는 와중에도 시금치 개발 연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주말 저녁, 후식 시간이었다.
“지긋지긋한 유한이 얼굴도 며칠만 더 보면 끝날 것 같아!”
예쁘게 깎인 참외를 냠, 하고 집어먹으며 희나가 희소식을 전했다.
“고생 많았습니다, 희나 씨.”
강진현은 어쩐지 몹시 반갑게 들리는 어조로 축하를 건넸다.
거실에 반쯤 드러누운 채 바둑이의 쩍 벌린 봉오리 안에 참외를 던져 주던 희원도 고개를 슬쩍 들었다.
“오. 유한이면 같이 시금치 양갱 만든다던 사람 이름이지? 생각보다 빨리 끝나네.”
“생각보다 빨리 끝나긴. 걔랑 얼굴 본 게 거의 한 달이야. 어휴!”
“너무 진절머리 내는 거 아니냐? 이젠 말도 꽤 잘 듣는다며.”
희원의 지적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한데, 뭘 해도 밉상인 녀석이라.”
시약술사는 포션을 직접 맛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미각이 마비된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상대적 미각치가 많았다.
유한이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는데, 이상하게도 희나의 수제 양갱에는 죽어 있던 미뢰가 반응했다.
희원의 시금치 연구에 이어 희나의 양갱까지 추가되니, 목 뻣뻣하던 유한이는 어느새 희나의 눈치를 살살 보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뭐, 사실 성질 더러운 들짐승 길들인 느낌이라 뿌듯하기도 해.”
희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즐거워했다.
의외의 모습에 오색이가 몹시 놀라 안테나 한 쌍을 빳빳이 세웠다.
「속보: 집주인, 사디즘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순간.」
“사디즘? 너 그런 단어는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험난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필수 상식.」
“……언제부터 이런 게 상식이 됐지?”
그 의문에 작은 달팽이 한 마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 ㅎ」
물론 달팽이는 표정을 지을 수 없으므로 문자 이모티콘을 사용했다.
희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쟤는 날이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어 가네.”
「주택 관리자 ≠ 구렁이!」
「주택 관리자 = 박식한 달팽이!」
오색이는 곧바로 자기가 구렁이가 아닌 달팽이임을 확실히 했다. 특히 ‘박식한’을 볼드체로 표현하며 자신의 박식함을 강조했다.
찰푸닥!
그 옆으로 바둑이가 커다란 몸을 벌러덩 눕히며 뒹굴었다.
희원과 희나가 오색이에게만 관심을 가지니, 자기에게도 신경을 써 달라는 몸짓인 것 같았다.
「주택 관리자 = 근엄한 달팽이!」
애교를 피우며 바동거리는 바둑이 곁에서 오색이는 의젓함을 마음껏 뽐냈다.
조금 이상하지만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