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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18화 (118/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18화

    희나는 빙그레 웃었다.

    ‘연구’로 화제를 급히 바꾼 것이 역력한데 그대로 넘어가버린 것도 그렇거니와, 사탕 빼앗긴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한 유한이가 어쩐지 떼쓰는 동생처럼 느껴졌던 덕이다.

    “너도 살림이 얼마나 큰 성취감을 주는지 모를걸. 너랑 나는 각자 좋아하는 일이 다른 것뿐이야.”

    “……좋아하는 일이 다르니까, 그렇다고.”

    유한이는 한참 동안 시무룩하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시금치 응용을 중심으로 방향을 틀자 이거지?”

    “맞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탐구하기는 힘들겠지만, 대신 응용 연구 과정을 좀 더 꼼꼼히 진행하는 건 어때?”

    희나가 절충안을 내밀었다.

    버릇없는 새끼 원숭이처럼 굴던 유한이가 풀 죽은 모습을 보니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전문가인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계획을 다시 한번 짜 보자. 대신 이번에는 ‘공동 연구자’인 나한테 뭐 숨기는 일 없이 차근차근 설명해 줘야 할 거야. 지난번에는 너한테 휘둘려서 낭비한 것들이 너무 많아.”

    살살 달래며 칭찬해 주자 티 나게 밑으로 가라앉았던 유한이의 어깨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뭐, 그, 그래. 이런 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긴 하니까. 아무래도 일반인보다야 나 같은 전문가가……!”

    어느새 유한이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떠벌떠벌 앞으로의 계획을 떠들었다.

    “우선, 우리가 제일 먼저 해 봐야 할 일은…….”

    그 모습이 영 밉게 보이지 않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희나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 * *

    “나 왔다!”

    유한이는 노크도 없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틀 만의 방문이었지만, 안부 인사 따위는 시원하게 생략하는 게 엊그제 본 사이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느새 유한이의 태도에 익숙해진 희나는 곧바로 결과를 물었다.

    “연구 결과는 어때?”

    “이 몸이 못 해내는 게 있을 리가! 이거 봐!”

    유한이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인벤토리에서 연두색 액체와 짙은 녹색의 가루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원액 추출기를 통해 액체 상태의 에센스를 뽑아냈고, 하나는 동결 건조 공정을 통해 가루로 만들었어.”

    그러면서 줄줄 설명을 이어 갔다.

    전문 용어가 많아 완전히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둘 다 시금치의 효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래. 처음에는 포션 만드는 방법처럼 접근했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더라고. 단순 처리 공정만 거쳐도 효과는 일정하게 유지돼. 그편이 수율도 훨씬 높고 과정도 간단하지. 아, 그렇다고 이게 말처럼 간단한 건 아니야. 나 같은 뛰어난 연금술사가 섬세하게 처리해 주어야 하는 구간이 있으니…….”

    유한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다.

    ‘하여간, 연구라면 죽고 못 산다니까.’

    희나는 한숨과 함께 손을 휘휘 저어 그의 말허리를 똑 잘랐다.

    “알았어. 어쨌든 네 대단한 능력으로 시금치를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지?”

    “그렇고말고!”

    “그럼 네가 보기엔 시금치 에센스랑 시금치 가루 중에 뭐가 더 만들기 간편할 것 같아?”

    대답은 시원하게 나왔다.

    “시금치 가루 만드는 게 훨씬 쉽더라. 양도 더 많이 나오고. 아, 물론 꼭 양이 많이 나온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야. 단위 그램당 효과는 에센스가 훨씬 더 높아.”

    “에센스 효과가 그렇게 좋아?”

    “그런데 나오는 양이 워낙 적어서……. 그걸 고려해 보면 총 효과는 시금치 가루랑 비슷하다고 봐도 될 것 같더라.”

    유한이가 실험 노트를 펄럭펄럭 넘기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무언가 수기로 작성한 표와 그래프를 보여 주는데, 너무 심한 악필이라 알아보기 힘들었다.

    희나는 음, 하며 턱을 짚고 생각에 빠졌다.

    “그럼 내 생각에는 동결 건조로 가루를 생산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시금치 가루를 만드는 편이 훨씬 더 쉽다고 하니 품도 덜 들 것 같았다.

    ‘액체는 고체보다 계량이 어렵기도 하고…….’

    거기다 농도가 진한 에센스니, 조금이라도 계량에 삐끗했다가는 오차가 크게 날 게 걱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한이가 엄청 신경 쓰면서 난리 치겠지?’

    뒷말은 슬쩍 삼키고 까닭을 차근차근 설명하자 유한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너도 이제 과학적 사고란 걸 시작했나 보구나? 하긴 옆에 있는 사람이 나 같은 대단한 천재니…….”

    동시에 눈꼴 시린 자기 자랑을 시작하기에 슬쩍 흘겨보며 말을 흘렸다.

    “방금, 소중한 공동 연구자에게 뭐라고 한 거니?”

    그러자 유한이가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너도 꽤 한다고!”

    “그래?”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하늘을 찌르는 자뻑에 희나는 결국 질린 낯을 하고야 말았다.

    “하여간, 유한이. 입이 방정이야!”

    “내가 뭘!”

    결정은 빠르게 내려졌다.

    두 사람은 동결 건조로 생산한 시금치 가루를 가지고 적절한 아이템을 구상해 보기로 했다.

    “뭐 생각해 둔 거 있어? 요리는 네 전문이잖아.”

    유한이는 종이 위에 글씨를 끄적거리며 희나를 향해 턱짓했다.

    그동안 희나의 손맛을 보고, 연구 위협을 당하는 등 여러 사건을 거치며 버릇을 많이 고쳤다지만, 건방진 태도는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음.”

    희나는 준비해 둔 수첩을 꺼내 뒤적였다.

    유한이가 없었던 이틀 사이 희나도 마냥 논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구상에, 검색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몇 개 생각해 둔 게 있긴 해. 찾아보니까 시금치 가루나 시금치즙은 천연 색소로 많이 쓰더라고.”

    천연 색소를 사용하는 요리법을 찾아보다 보니 무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왔다.

    ‘아무래도 액체인 포션만큼이나 적은 부피에 높은 효과를 보이면서 섭취가 간편한 게 좋겠지.’

    그렇게 후보군을 줄여 가다 보니 선택지는 몇 가지 남지 않았다.

    “경단류의 떡이나 사탕, 과자…… 예를 들어 양갱 같은 건 어때? 나는 개인적으로 양갱이 제일 좋아 보여.”

    “양갱?”

    유한이는 생각조차 못 해 본 제안이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희나는 씨익 웃으며 하나하나 까닭을 꼽아 가며 설명했다.

    “그래. 사실 난 한입 크기의 떡을 제일 먼저 떠올렸는데, 생각해 보니까 전투 중에 먹기에는 좀 위험할 수도 있겠더라고. 급하게 먹다가 목에 걸리면 큰일이잖아. 그래서 그것보단 입에서 사르르 녹을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을 생각해 봤어. 그중에 이왕이면 한식 비슷한 거면 좋겠다 싶어서 양갱까지 떠올려 봤지. 말랑말랑 보들보들하고 입안에서 잘 녹으니 딱 좋을 것 같지 않아? 어때? 딱이지?”

    희나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리며 말을 마쳤다.

    유한이도 희나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금세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흠……. 양갱이라. 나쁘지 않은데? 맛도 달달해서 헌터들이 좋아하겠네. 맨날 포션 쓰다고 징징거리는 놈들밖에 없었으니까, 흥.”

    순순한 대답에 희나는 신이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았어! 사실 그럴 줄 알고 양갱 만드는 것도 연습해 봤지롱!”

    어제 양갱을 떠올리고 얼마나 뿌듯했던지, 연습 삼아 색색의 양갱을 만들어 본 참이었다.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고, 작고 예쁜 모양 틀까지 잔뜩 사 모았다.

    “만약 만든다면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 볼까 해.”

    희나는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양갱을 꺼내 와 놓았다.

    백앙금, 흑앙금으로 만든 양갱이 한입 크기로 잔뜩 쌓여 있었다. 반들반들한 게 때깔이 곱디고왔다.

    “……오.”

    유한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양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작은 꽃 모양을 한 것이 손에 집혔다.

    예쁜 모양이 아까울 법도 하건만, 유한이는 양갱을 냠 하고 한입에 집어삼켰다.

    “……!”

    이내 유한이의 눈이 커졌다.

    냉장실에 두어 차가웠던 양갱이 입안에서 사르르 풀렸다. 굳이 이로 씹을 필요도 없었다.

    단단해 보이던 양갱은 침과 함께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려 혀끝으로 누르기만 해도 마치 구름처럼 입안에 퍼졌다.

    작은 양갱 조각은 순식간에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유한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놀랐다.

    ‘뭐야? 단맛이 이렇게도 날 수도 있어?’

    혀 아래에 고인 달곰한 침을 보면 분명히 단 건 맞았다. 하지만 이건 유한이가 알던 보통의 ‘단맛’과는 달랐다.

    혀가 아려 올 듯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은근한 뒷맛에 곧장 이어지는 쌉쌀 고소한 팥의 풍미가 조화로웠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어제저녁에 이어 아침 식사마저 거르고 온 유한이의 위장이 꼬르륵, 하고 울었다.

    유한이는 본능적으로 양갱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희나가 양갱을 담은 통을 뒤로 빼는 게 더 먼저였다.

    유한이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 질렀다.

    “아! 왜!”

    “더 먹으면 안 돼! 나머지는 선물할 거야.”

    “너무해!”

    “샘플용으로 하나 먹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니?”

    희나는 새침하게 양갱 통의 뚜껑을 닫았다.

    사실 몇 개쯤은 더 줄 수 있었지만, 길드의 다른 동료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단호해졌다.

    ‘그 사람들은 쟤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좋아해 줄 테니까!’

    자신의 작은 친절과 정성에 뛸 듯이 기뻐할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나, 생각보다 아부나 아첨에 약한 성격이었을지도?’

    살살 뺨을 긁으며 생각에 빠졌다.

    떠올려 보니 살림꾼으로 각성한 이후, 희나에게 상냥하고 깍듯한 사람들만 만나 왔던 것 같았다.

    물론 유한이처럼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을 날리는 헌터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말만 거칠었다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털털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희나에 대한 호감을 스스럼없이 표현해 주었으니까!

    ‘유한이의 첫인상이 유독 안 좋았던 것도 이것 때문일지도 몰라.’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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